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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0/12] 윤봉길 의사의 사상과 행동 : 순국 88주기를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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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평등과 자유 사상 기반 위에 ‘대의’ 실현  

올곧은 기개 지닌 우리 민족의 큰 스승 


글 | 김학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진 윤봉길 의사는 세권의 시집과 500여 편의 시를 남긴 시인이며, 올곧은 기개를 지닌 선비의 삶이 무엇인가를 터득한 분이시다. 금번 12월 17일,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8주기를 맞는다. 이때로부터 1년 4개월 뒤인 2022년 4월 29일은 윤 의사의 상해 의거 90주년이 된다. 이 뜻깊은 역사적 계제에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신 윤 의사의 생애, 특히 윤 의사의 의거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내일을 위한 교훈을 얻어 보고자 한다.



 대한제국기에 들어서서 그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많은 순국열사가 출현했으며 거기에는 을사늑약에 항거했던 민영환과 조병세 그리고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호소했던 이준 등이 포함된다. 이들에 이어 가장 위대했던 우리 겨레의 영웅으로 안중근 의사를 꼽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많은 순국열사가 출현했다.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애국자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많은 독립투사가 목숨을 걸고 일제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한 순국열사들 가운데 가장 걸출했던 영웅으로 윤봉길 의사를 꼽게 된다.


12세 소년, 식민지 노예 교육 거부하고 자퇴하다


   윤봉길 의사의 25년에 지나지 않은 짧은 생애를 살핌에 있어서 우선 주목해야 할 대목은 그가 겨우 12세였던 소년 시절에 고향의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한 사실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학구열이 높았고 특히 신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컸던 그였지만, 일본인들이 판을 치던 세상에서 조선인이 일본교육마저 받아야 하겠느냐는 저항의식이 그로 하여금 이 학교를 박차고 나오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일본인에 대한 저항의식은 그의 다음 시구에서도 보인다.


“피끓는 청년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 걸대나

피끓는 청년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가나”


 여기서 우리는 윤 의사 상해의거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게 된다. 덕산보통학교를 자퇴하게 만든 민족적 자아의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훗날 일제 지도자들에 대한 폭탄투척으로 꽃을 피웠다는 뜻이다.


세계를 움직이려거든 내 몸 먼저 움직여라


 

  윤봉길 의사의 사상이 잘 담겨있는 저서가 그가 20세 때인 1927년에 저술한 농민독본이다. 이 책은 구구절절이 모두 당대의 교훈이요, 후대의 귀감이 될 내용을 담았다. 그것들 가운데 다음 몇몇은 다시 음미하고자 한다.


 첫째, 만민평등의 사상이다. 이것은 「제2권 농민의 앞길」을 구성한 「제1과 농민과 노동자」 및 「제2과 양반과 농민」에 잘 나타났다.


 앞에서는 그는 “나는 농부요 너는 노동자다. 우리는 똑같은 일하는 사람이다. 높지도 낮지도 아니하다”라고 강조한 데 이어, “나는 밭을 갈고 너는 쇠를 다룬다”라고 부연했다. 조선왕조는 5백 년 내내 사(양반)·농(농민)·공(노동자)·상(상인)의 엄격한 신분제를 유지해,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와 같은 노동자를 농민 다음에 두었다. 이 신분제 사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유지됐다. 그러나 윤 의사는 이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농민과 노동자의 평등을 부르짖었던 것이다.


 뒤에서 윤 의사는 농민과 양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역설했다. 양반과 농민을 대비시키면서, “농민은 못난 사람이 아니다”라고 두 차례에 걸쳐 절규한 구절이 바로 그 점을 말해주었다. 양반은 높고 많이 배웠으며 농민은 낮고 무식하다는 것이 당대의 공통된 인식이었지만, 이미 만민평등의 사상을 체득했고 특히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사상을 지녔던 그는 구시대적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발상에서, 윤 의사는 우리나라를 ‘농민을 중시하는 나라’로 키울 것을 제의했다. 「제4과 농민」에서 그는 “농민의 손으로써 농민을 본위로 한 정치와 경제와 문학과 예술과 교육이 존재하는” 나라를 만들자고 역설한 것이다.


 둘째, 자유의 사상이다. 윤 의사는 제2권 「제3과 자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사람에게 천부의 자유가 있다.

머리에 돌이 눌리우고, 목에 쇠사슬이 걸린 사람은 자유를 잃은 사람이다.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

자유의 생각은 귀하다. 나에 대한 생각, 민중에 대한 생각

개인의 자유는 민중의 자유에서 나아진다.”


 여기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윤 의사가 민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살이다. 그는 만민평등의 사상을 지녔기에 극소수의 특권계급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의 백성을 의미하는 민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에 못지않게, 그는 인간에게는 천부의 자유가 있다는 이론을 설파했다. 천부인권론은 1776년의 미국독립선언서에서 나타났고 1789년의 프랑스인권선언문에서 다시 나타났다. 이 사상은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이 됐다. 일제도 한때, 특히 이른바 다이쇼 민주주의 시대에 이 사상을 수용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곧 군국주의 또는 전체주의로 돌아서면서 국민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했고 결국 전쟁과 패전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 의사는 구미에서의 선진적 자유주의사상을 받아들여  겨레에게 가르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윤 의사 의거의 또 하나의 정신적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일제에 억눌려 지내는 우리 겨레에게는 인간의 기본적 가치인 자유가 가장 존귀하다는 믿음에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거사했던 것이다.


 셋째, 윤 의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국민 각자가 나설 것을 강조했다. 이 점은 농민독본 「제2과 격언」에 제시한 “세계를 움직이려거든 내 몸을 먼저 움직여라”라는 구절에서 엿보인다. 어떤 대의를 실현하려면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피끓는 청년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서색은 점점 밝아 오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끓는 청년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며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그 다짐처럼 거룩한 순국


 북한의 김일성은 우리가 앞에서 살핀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지칭하며 그들의 애국활동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일정한 한계를 제시했다. 그들은 개별적으로는 훌륭했지만 그들의 행동이 조직화하지 못했기에 나라를 되찾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만이 빨치산을 조직해 일제에 대항했고 그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다. 윤봉길 의사에 국한해 말한다면, 그의 거사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살려냈고 그러했기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크게 기여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자랑하는 보천보전투라는 것도 윤 의사의 의거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윤 의사의 의거로부터 5년 뒤인 1937년에 보천보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이 그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윤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문구를 남겼다. ‘대장부가 집을 나갈 때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담은 것이다. 이 문구에 접하면 중국 전국시대 때 연나라 사람으로 폭군 진시황제를 죽이겠다는 결심으로 출향한 형가(荊軻)의 ‘풍소소혜역수한(風蕭蕭兮易水寒,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장사일거혜불복환(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를 떠올리게 된다.


 형가는 진시황제를 죽이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윤 의사는 왜적을 도륙하는 데 성공했다. 어찌 윤 의사를 형가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윤 의사는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대로 순국했다. 참으로 거룩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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