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순국스크랩 [2021/01] 독립운동가와 가족 수난사

페이지 정보

본문

국가는 후손들 삶 외면…행방불명·백색테러·고아원 전전

3대 이어지도록 고통스런 삶 계속되어


글 | 김병기(광복회 학술원 원장)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의 침략과 불의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지사는 대략 90여 명에 이른다. 자정순국(自靖殉國)은 일제가 힘으로 짓밟고 억눌러도 결코 꺾이지 않고,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의기(義氣)의 표현이다. 단식을 견뎌야 하는 본인도 그렇지만, 그 여러 날 동안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힘겹고 안타까운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제의 손에 학살된 경우 또한 숱하게 많았다. 조국광복 후에도 후손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고 처참한 삶을 살았다.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한 이도 있었고, 6·25전쟁 중에 행방불명되고 백색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남은 자녀들은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에 일제의 침략과 불의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지사는 대략 90여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60여 명이다. 


1895년 국모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화서학파 이봉환(李鳳煥)은 7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하였다. 최초의 순국지사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때는 시종무관장 민영환, 의정대신 조병세 등이 이에 항거하는 자결순국으로 이어졌다. 자결순국투쟁은 1910년 경술국치 때 절정을 이루었다. 1910년 한 해 동안 전국에 걸쳐 자결순국한 지사가 38명에 달하였다. 선성의병장 출신 향산 이만도, 호남의 선비 매천 황현, 금산군수를 지낸 홍범식 등이 이 시기에 자결순국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자정순국(自靖殉國)은 그저 살기 싫어 세상을 버린 것이 아니다. 일제가 힘으로 짓밟고 억눌러도 결코 꺾이지 않고, 무릎 꿇지 않겠다는 의기(義氣)의 표현인 것이다. 순국 방법은 단식이 절반을 차지하고, 다음이 음독이었다. 부모가 물려준 몸을 해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단식을 많이 선택했지만, 그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견뎌야 하는 본인도 그렇지만, 그 여러 날 동안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도 힘겹고 안타까운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오는 손님들을 접대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밥을 먹고 살아야 했다. 어른은 굶고 있어도, 이를 돌보는 가족들은 눈물과 한숨으로 억지로 음식을 삼켜야만 했다.


향산 이만도 선생의 자정순국과 가족사


향산 이만도(1842~1910)는 자결순국투쟁을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향산은 퇴계 이황의 11대손으로 태어나 1866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10여 년 동안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한 정통 관인이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유린되던 세상을 통탄한 향산은 52세 되던 1893년 하계 향리에 백동서당(柏洞書堂)을 짓고 은둔하였다. 


일제는 1895년 8월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야만적 범죄를 자행하였고, 이어 단발령을 내렸다. 1896년 1월 진성이씨 문중이 주축이 된 <예안통문>에 의해 선성의병을 결성하였고, 향산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선성(宣城)은 예안의 옛 이름인데, 후에 예안이 안동부에 편입되기는 하지만 안동과는 독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전기의병 당시 안동과 예안 두 곳에서 각각 별개의 의진(義陣)이 편성된 것도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선성의진은 안동의진이 관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열을 갖추기도 전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향산이 입산 은거한 후 선성의진은 이중린의 주도로 진성이씨 문중이 주축이 되어 재편되었다. 이들은 연합의진에 참가하여 상주 태봉전투를 벌였다. 태봉전투를 치르고 난 뒤 선성의진이 청량산으로 들어가 전열을 가다듬자, 일본군은 의병을 추격하여 의병 본거지를 초토화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의 주도세력을 진성이씨 문중이라 보고 상계의 퇴계 종택에 불을 질러 집 일부와 1천 4백여 권의 서책을 불태웠다. 


이런 와중에 향산은 1898년 4월 장래가 촉망되던 작은아들 이중집(李仲執)을 잃었다. 겨우 2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향산은 1910년 순국 때까지 10여 년 동안 광덕과 백동을 근거지로 삼은 채 인근 각지를 떠돌며 민족의 위난에 고통스러워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의 체결 소식을 들은 향산은 을사오적 처단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자신이 직접 상경하고자 했지만, 병 때문에 아들 이중업을 대신 서울로 보냈다. 


향산이 경술국치의 소식을 들은 것은 9월 4일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서파 유필영 등이 찾아와 변고를 전한 것이다. 향산은 비에 막혀 며칠을 더 머물던 유필영에게 문득 “공은 2백자 글을 지어주게!” 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유필영이 “제목 없이 무슨 글을 짓는가?”라며 의아해하자, “당연히 제목을 달게 될 것이야”라고 답했다. 이때 향산은 이미 자신의 굳은 결심을 예고했던 것이다. 실제로 유필영은 향산의 장례 때 2백자 뇌사(誄辭)를 지었다.


죽음을 결심한 향산은 국치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날마다 선조의 묘소를 찾아다니며 종일 통곡하였다. 비통하게 10여 일을 보낸 향산은 9월 17일부터 자정(自靖)을 결심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향산이 단식한 처소의 주인인 이강호(李綱鎬)는 향산의 자정 과정을 매일 일기로 남겼다. 


향산은 마지막 임종을 편안히 자택에서 맞을 수 없었다. 객사(客死)를 결심한 향산은 양부(養父)의 묘소가 있는 재산 명동을 최후의 귀착지로 택하고 그곳을 향했다. 향산은 도중 율리에 있는 재종손 이강호의 집을 찾았다. 이때 이강호는 단식을 결심한 향산에게 울면서 식사를 권했다. 향산은 자신의 각오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을미년 변란이 일어났을 때 죽지 못하고, 다시 을사년에 5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또한 죽지 못하고 산에 들어가 구차하게 연명한 것은 그래도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이미 아무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어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을 바라겠는가? (중략) 지금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명동에 가서 생을 다할 참이다. 다시는 여기에 대해 말하지 말라.”


이에 이강호는 울면서 “이곳 역시 궁벽한 객지이지만 하계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신다면 이곳에 머무십시오”라며 명동으로 가지 말고 자신의 집에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하였다. 이에 향산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율리 청구동에 있는 고조부 이세사의 주손인 이강호의 집에서 단식을 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9월 18일. 이강호가 향산에게 아침상을 올렸으나 물리쳤다. 그 뜻을 짐작한 이강호가 “대의(大義)가 달린 문제라 감히 다시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만, 저희들 사정은 어찌합니까?”라고 마음을 돌리기를 재삼 호소하였지만 향산은 단호하게 “다시 말하지 말라. 내 뜻은 이미 정해졌다”며 다시는 자신에게 음식을 권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9월 19일. 이날은 큰 비가 내렸다. 향산이 음식을 끊은 지 이틀이 지난 데다, 또 더 이상 이를 만류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강호는 성곡(城谷)에 있던 향산의 본가에 기별하여 아들 이중업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장조카 이중숙이 소식을 듣고 빗속을 뚫고 급히 달려오자, 향산은 “비가 이리도 내리는데, 조금 기다려 그친 뒤에 와도 되거늘 어찌 이같이 달려왔느냐”며 오히려 그를 안쓰러워하였다. 


 9월 20일 아침. 이날 늦게 기별을 받고 아우 이만규와 아들 이중업이 급히 달려왔다. 아우는 형의 손을 잡고 통곡하고 함께 자진하려 하였다. 향산은 자신의 사후에 집안을 잘 다스려줄 것을 당부하면서, 이를 적극 만류하였다. 이때 이중업이 본가로 돌아갈 것을 간곡히 청하자, 향산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향산은 나라를 망하게 한 죄를 지은 죄인으로 자처하여 안방에서 편히 죽는 것조차 호사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한자리에 모인 일가친척들은 차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향산은 주위 사람들에게 저녁을 먹을 것을 두 번 세 번 권했으나 누구도 그 말을 쉽게 따를 수 없었다. 그러자 향산이 크게 역정을 내며 곧바로 자진(自盡)하려 하였다. 이에 놀란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엎드려 잘못을 빌고 음식을 먹은 뒤에야 비로소 자진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9월 22일. 단식 6일이 지났지만 정신은 더욱 맑아 평소와 같이 문객들을 대하면서 젊은 시절 이야기와 여러 가지 훈계를 하였다. 원근의 문중 사람들, 친우와 문하생들이 매일 50~60명, 많게는 80~90명이 찾아왔다. 향산은 이들을 일일이 반갑게 대하고 마치 평상처럼 담소하였다.


 9월 26일. 이날은 1백여 명이나 되는 많은 친우·문중 사람들이 찾아왔다. 천전의 김대락, 오천의 김노헌 등 명망지사들이 이날 향산을 찾아온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 가운데 문하인이며 영양 의병장인 벽산 김도현이 배알하자, 향산은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지가 이미 여러 해 되었거늘 어찌 이렇게 먼 곳까지 고생하면서 만나러 왔는가?” 하고 애틋하게 위무(慰撫)하였다. 이에 김도현은 울먹이며 차마 응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날 저녁에는 천전, 오천, 표곡 등지에서 온 여러 인사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며 밤이 깊도록 회포를 풀었다. 이때 향산은 마음이 편안하고 정신이 맑아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10월 3일. 단식한지 17일이나 되었지만 향산의 정신과 기색은 크게 상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내가 때때로 냉수를 마셨더니, 물기가 장부를 적셔 죽지 않은 것 같구나”라고 말하고는 이날부터 물 마시는 것마저 그만두었다.


10월 7일 단식 21일째 되던 날, 일제 경찰이 와서 가족들을 위협하고 억지로 음식을 떠 넣을 것을 강요했다. 이 무렵 향산은 며칠 전부터 기운과 호흡이 미약하고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기력이 다한 상태였다. 그런데 일제 경찰의 협박 소리에 그가 갑자기 큰 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나는 명대로 자진하고자 하거늘, 지금 너희들은 나를 빨리 죽이고 싶은가? 내 빨리 죽고 싶으니 즉시 총포로 나를 죽여라.” 죽어가던 향산이 벌떡 일어나 창을 열고 호통을 쳤다. 기세등등하던 일본 경찰은 크게 당황하며 사과하였다. 임종 직전의 최후의 순간까지도 이처럼 드높은 의기와 지조를 잃지 않았던 향산이었다.


 10월 8일. 이제 그의 기력이 다했다. 더 이상 말이 입밖으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뒤 10월 10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단식 24일째 되던 날, 장렬하게 순국한 것이다.


향산 이만도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나라가 무너진 뒤 이만도는 그 자신이 망국의 책임을 스스로 짊어졌다.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짓밟아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인물이 즐비한 마당에, 이만도는 나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의로움을 택하였다.


이만도의 순국은 후손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동생 이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아들 이중업은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중국의 손문과 오패부에게 독립청원서를 직접 전달하려고 했지만 출발 직전이던 1921년 6월 갑자기 세상을 떠남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며느리 김락의 항일투쟁은 더욱 처절하였다. 시어른의 순국, 남편의 항일투쟁, 게다가 두 아들과 두 사위의 독립운동을 지켜본 안주인이었다. 그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서 1919년 예안 3·1만세운동에 앞장섰다. 결국 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끝에 두 눈을 모두 잃었다. 


두 손자 이동흠, 이종흠은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에게 군자금을 제공하였고, 그가 피신해오자 숨겨주었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 때 심산 김창숙이 북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세우고자 자금을 모으러 국내로 몰래 들어왔는데, 여기에 맞추어 자금을 모집하는데 나섰다가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맏사위가 금계마을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김용환이었다. 그는 도박을 핑계 삼아 집의 재산을 처분하였다. 그러는 바람에 종가 재산을 거덜내자,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파락호라 비웃었지만 실제로는 만주 독립군에 군자금을 공급한 독립운동가였다. 둘째 사위 또한 정재 류치명의 증손자로 안동청년회와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에 참가하여 사회운동을 벌였다.


백남규 의병장의 회색 저고리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 가운데 어느 한 사람 혹독한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마는 그 가운데서도 백남규(1884-1970) 의병장의 혹독한 삶은 유별나다. 백남규 의병장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와 안동진위대 부위(副尉)로 복무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군인으로 평탄한 삶을 사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07년 한국군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그는 의병의 길로 들어섰다. 이때 이강년 의병장은 강원도 횡성 봉복사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이강년 의병장은 23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엘리트 코스인 선전관(宣傳官)으로 활동했던 무관 출신이었다. 당시 의병장이 대부분 선비 유생들이었다는 점에서 이강년 의병부대의 전력은 대단했다. 무관 출신답게 의병의 조직, 훈련, 군율이 다른 의병부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강년 의진(義陣)에 합류한 백남규는 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우선봉장이 되었다. 그 후 제천전투, 갈평전투, 죽령전투 등을 거치면서 도선봉(都先鋒)이 되어 이강년 의진의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우수한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도 어렵거니와 무엇보다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에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무고한 민간인들을 살상하고 민가를 불태우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분풀이를 하고는 그것을 전과로 삼아 상부에 보고하기도 했다. 따라서 의병의 출몰이 빈번한 지역은 마을 전체를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1908년 6월 작성전투에서 이강년 의병장은 발목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체포되어 그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한 이후에도 백남규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서벽, 내성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다가 1909년 12월 경기도 죽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었다. 백남규는 10년 선고를 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8년 만에 풀려났다. 


옥에서 나오자 단양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여의치 않자 상해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15년 징역형을 받고 복역했다.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3년간을 복역한 것이다.


백남규 의병장이 오랜 감옥살이 끝에 옥문을 나와 보니 사랑하는 아내와 하나 있던 아들은 이미 일제의 손에 학살되고 말았다. 정처없는 떠돌이 생활 5년 만에 53세의 나이에 재혼하여 아들과 딸을 두었다.  


해방이 되고 나라는 찾았지만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나섰던 사람들이 더 이상 주인 행세를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친일세력의 득세로 이 땅은 ‘도둑이 매를 드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친일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가 된 것이다.


백남규 의병장에게도 이승만 사람들이 찾아와서 건국사업에 참여하자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우국노인회 회장과 국민회 고문이 되어 활동하던 중 그동안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옛 친구 권용일 의병장을 만났다. 권용일은 이강년 의병부대에서 우군 선봉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일본군과의 무수한 전투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동지요, 동갑나기 친구였다. 권용일 역시 이강년 의병장이 순국한 후 해외로 떠돌다가 해방 후 고향인 제천에 정착한 터였다. 


6·25전쟁은 백남규 의병장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을 가져다주었다. 전쟁 중 부인이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몸소 끼니를 지어 어린 자식들과 생활을 해야 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일정한 직업도 없었기에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백남규의 유일한 낙은 제천 사는 친구 권용일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차비가 없어 충주에서 제천까지 1백 여리의 길을 걸어서 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만나면 며칠이고 항일 의병장 시절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재산이나 일정한 벌이가 없는 백남규 의병장으로서는 끼니를 잇기도 어려워 의관(衣冠)을 갖춘다는 것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늘 남의 헌옷을 입고 다녔다. 때로 권용일의 며느리가 두루마기를 지어드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어려서 뵈었던 백남규 의병장의 일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하루는 충주에 거주하시던 백남규 의병장께서 올라오셨는데 두루마기도 없이 동저고릿 바람으로 서울 용산에 살던 우리 집으로 오신 것이다. 여비가 없어서 충주에서 서울까지 무전취식을 하시며 올라오셨다고 했다. 1960년대 초반이었으니 당시만 해도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밥 한술, 잠자리 정도는 제공하던 때였지 싶다.


 입고 오신 한복 저고리가 오래되어 소매 섶은 다 닳고 깃도 다 헤졌다. 흰색 저고리가 거의 회색 저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옷차림을 보시고 희산 할아버지께서 새 옷을 내 오라 하며 갈아입기를 청했다. 그런데 백남규 의병장께서는 한사코 갈아입기를 거부하셨다. 미안해하시기도 했지만 어린 내 눈에도 의연하셨던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두 분이 사흘 동안 새 옷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느 날 희산 할아버지가 먼저 잠자리에서 일어나 백남규 의병장의 낡은 옷을 입고 앉아 있으니 ‘웬 선생님두 … ’ 씨익 웃으며 할 수 없이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었다. 


선생은 재혼 후 남매를 두었는데 따님은 결혼 후 경기도 광릉 언저리에서 수해(水害)로 일찍 죽고, 53세에 낳은 아들이 한 점 혈육으로 남았다. 너무나 가난했던 까닭에 외아들인 준기 씨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하고 말았다. 일정한 직업을 갖지 못해 시장 주변을 떠돌며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부끄럽습니다만 현재 조그만 전셋집에 살고 있습니다”라며 주눅 든 목소리로 수줍게 말하는 백준기 씨를 보며 ‘당신이 왜 부끄럽습니까? 부끄러운 것은 오히려 저희들입니다’라는 알 수 없는 울분이 목을 메이게 했다.  


임청각의 수난과 그 후손들


1910년 12월 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썰매의 행렬이 이어졌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다. 철통같은 국경 경비대의 순찰이 소홀해진 틈을 타 새벽 3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강을 건넜다. 이회영 6형제를 비롯한 대소 가족 60여명의 긴 행렬이었다. 이들의 집단망명은 만주 땅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라가 쇠락하자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 지배층의 집단이 있었던 반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 가족이 몸을 던진 집단망명자들이 있었다. 이회영 형제의 뒤를 이어 안동지역의 백하 김대락, 석주 이상룡 가족의 집단망명이 잇달았다. 


석주 이상룡(1858~1932)은 1910년 12월 주진수를 통해 신민회의 독립운동 기지건설의 계획을 접하고 처남 김대락과 함께 망명 계획을 세웠다. 이상룡은 만주로 건너가기 전에 가산을 정리하였는데, 논 몇 천 평을 남겨두어 윗대 제사의 비용에 대비하고, 밭 몇 천 평을 떼어내어 당친(堂親)의 생활 밑천으로 삼게 하며, 노비문서를 다 불태워서 많던 노복들은 각각 흩어져 돌아가서 양민(良民)이 되게 하였다.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이 쓴 「선부군유사(先府君遺事)」에 의하면, ‘신정(新正)에 오락 기구를 마련하여 여러 일족들을 불러 하루 통쾌하게 놀고 이어서 「거국음(去國吟)」 율시 한 수를 읊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이상룡은 이미 돌아올 기약 없는 길을 떠난다고 작정했던 것 같다. 


1911년 정월 5일 이른 새벽 이상룡은 가묘(家廟)에 하직하고 지체 없이 길을 떠났다. 도중에 김만식이 경성에서 내려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주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것이 일본정부에 탐지되어 이미 김도희와 주진수가 체포되었다고 알려왔다. 주변에서 ‘만주로 가는 일을 다시 헤아려보아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으나 ‘이미 떠난 길을 다소 위험하다고 하여 스스로 중지할 수는 없다’면서 갈 길을 재촉하였다. 


이상룡이 서울에서 양기탁 등을 만난 후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에 당도하자 곧 집 식구들이 뒤따라 도착하였다. 일행은 1월 27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바람은 살을 에는 듯한데 고개를 돌려 고국을 돌아보니, 돌아올 기약이 묘연했다. 이상룡은 비분한 마음에 시를 짓는다.


삭풍은 칼날보다 날카로와

차갑게 내 살을 에는구나

살 에는 것 참을 수 있으나

창자 에는 것 어찌 슬프지 안으랴

또한 짓기를,


이미 내 전지(田地)와 집 빼앗아가고

다시 내 아내와 자식 해치려 하네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되게 할 수 없도다


압록강을 건너서면 안동현이다. 이곳 서점에서 이상룡은 『만주지리지』를 한 권 산다. 그리고 마차 두 대를 사서 울퉁불퉁한 만주의 얼어붙은 길을 달렸다. 강을 건너 우리 쪽 국경을 바라보니 수백 리에 걸쳐 일본 경찰이 거의 1백 보마다 한 군데씩 초소를 설치하고는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연일 눈바람이 사납게 불어 수레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담요를 깔고, 가지고 간 솜이불을 둘러썼다. 3~4일을 달려도 눈에 뜨인 것은 말과 소, 양, 돼지와 개밖에 없었고 사람은 그림자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7일 만에 겨우 회인현 횡도천에 도착했다. 며칠 후 이상룡은 아들 이준형과 김형식을 유하현으로 보내 땅과 집을 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중도에 돌아오고 말았다. ‘외지 사람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말이 민간에 와전된 후 유하현 40리 지역에 중국 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이상룡은 할 수 없이 거처도 정하지 못한 채 횡도천에 머물며 독서에 전념했다. 『숙신사』, 『부여사』, 『고구려사』, 『발해사』 등은 물론, 토마스 홉스, 스피노자 같은 서양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유하현으로 떠날 날만 기다렸다. 때로는 이상룡보다 한 달 남짓 먼저 만주로 떠났던 처남인 백하 김대락이 찾아와 며칠씩 말벗이 되어주었고, 강화학파 이건창의 아우인 이건승과 함께 망명한 홍승헌과 정원하가 나란히 찾아와 고전을 토론하기도 했다. 


낯설고 물설은 만주 땅에서 거처할 곳조차 없는 신세를 돌아보면서 이상룡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가 남긴 「서사록」에는 이때의 심경을 “생각컨대 내가 50년 동안 너른 집 깊은 처마의 훌륭한 거처에 살다가 하루아침에 집을 나서서는 문득 집 없는 나그네 신세가 되고 보니, 사람의 한 생애가 대부분 허깨비임을 참으로 깨닫겠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룡이 안동 법흥동에서 거처하던 임청각으로 말하자면, 원래 아흔아홉 간의 고성 이씨 대종택이었고 그는 고성 이씨 종손이었다. 


이상룡은 김대락·이회영 형제·이동녕 등과 함께 서간도 유하현에 정착하여 독립운동 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이상룡이 사장이 되고, 이회영은 내무부장에 임명되어 한인사회를 지도했다. 그러나 두 해 동안 연이은 흉작으로 재정난이 겹쳐 경학사의 사무를 폐지하고 오직 신흥학교만 남겨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이상룡은 오두막집에 물러나 살면서 날마다 우리나라 역사를 초록하여 학생들의 교과서를 마련했다. 불편한 거처, 험한 음식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그 고생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였으나 이상룡은 홀로 태연하였다. 산비탈에 몇 마지기의 콩밭이 있었는데 이상룡은 날마다 가서 김을 맸다. 이웃 사는 동포가 모두 서로 권면하기를, “(경학사)사장 선생이 손수 호미로 밭에 가서 김을 매는데 우리들이 어찌 감히 놀며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는가” 하였다. 


1929년 이상룡이 반석현 하마허자에 살 때다. 철로 옆에 있던 집은 여름이면 비가 새어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어른이 편히 주무시라고 아들 준형과 손자 병화가 마주앉아 우산을 받쳐 들고 밤을 밝히기도 했다. 후일 광복군 총사령 대리를 지낸 황학수도 하룻밤 우산을 받쳐 들고 밤을 샜다는 회고를 남겼다.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상룡의 손부 허은은 “어른들 다 구천에 계시니, 이 소식을 어데다 전해야 할까…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지더라”고 했다. 돌아가신 어른들이 해방의 기쁜 소식을 못 듣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날을 위해 온 일가가 전 생애를 바치며 살아왔는데…. 


1932년 5월 이상룡이 서란현에서 세상을 떠나자 아들 이준형은 가족을 이끌고 귀향하였다. 귀향하자마자 또다시 상례를 치러야 했다. 이듬해 4월 모친 김우락이 돌아가신 때문이다.


1934년과 그 이듬해 각각 부친과 모친의 대상을 마친 이준형은 부친 이상룡의 글들을 모아 훗날 「석주유고」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때 임청각이 중앙선 철도 부설로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장차 철도 때문에 무너질 터인데, 4백년 지켜온 유물이 빈 언덕이 된다면 어찌 마음이 절통하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하며, “4백년 된 집을 잃을 바에야 차라리 지난 날 압록강에 빠져죽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 한다”라고도 했다. 


굴욕적인 나날이었으나 광복의 날이 머지않았음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에게 “일제가 싱가포르를 점령했다”는 보도는 세상만사를 비관하게 만들었다. 1942년 9월 이준형은 목 동맥을 끊어 자결하였다. 유서에는 “하루를 더 살면, 하루의 치욕만 더할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아들 이병화를 만주 하얼빈 동쪽 취원창에 모셔진 부친 이상룡의 묘소를 돌아보라고 보낸 뒤 보름 만에 마지막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99칸 대저택의 안락과 명문대가의 부와 명예를 초개처럼 던져버린 채 독립투쟁에 한평생을 바쳤던 석주 이상룡 선생의 간난신고의 삶은 당대에 그치지 않았다. 나라는 찾았으나 후손들의 삶은 독립된 나라, 대한민국에서 3대가 이어지도록 고통스런 삶이 계속되었다. 국가는 후손들의 삶을 외면하였고, 6·25전쟁의 와중에 손자 이병화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증손자들 또한 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되고, 백색 테러를 당하는 등 세상을 떠났다. 남은 자녀들은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나 사는 모습 보면 누가 애국하려고 할까 싶어서 … 인터뷰조차 꺼린다”는 증손자 이항증 선생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