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0/05] 여성항일운동의 선봉, 근우회(槿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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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항일운동의 선봉, 근우회(槿友會)
여성운동에서 항일투쟁까지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새 장 열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근우회는 1927년 여자의 단결과 지위향상이라는 강령으로 창립총회를 열었고 근우회 해산론이 대두되던 1931년초까지 70여 지회가 국내외에 조직되었다. 여성 지위향상을 위해 사회적·법률적 일체 차별 철폐, 봉건적 민습과 미신타파, 조혼폐지 및 결혼의 자유, 부인노동의 임금차별 철폐 등으로 사회구조적 문제와 경제적 차별에 문제를 제기했다. 근우회는 계몽적 범주의 여성운동을 여성해방운동의 차원으로 끌어올린 점에서 한국 근대여성운동사의 중요한 장을 이루어 한국여성해방운동의 모태로 평가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 연합한 여성항일단체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 무렵, 1927년 5월 15일 이상재(李商在)를 회장으로 하는 새로운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이에 크게 자극을 받은 여성지도자들이 회합을 갖고, 그 동안 분열되어 있던 여성항일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 때, 김활란(金活蘭) 이현경(李賢卿) 유각경(兪珏卿) 등이 여러 차례 창립준비위원회를 개최한 후 1927년 5월 27일 서울기독교여자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김활란을 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이에 참여한 주요 여성지도자로서는 김활란 이현경 유각경을 비롯하여 현신덕(玄信德) 홍애시덕(洪愛施德) 최은희(崔恩喜) 방신영(方信榮) 박원민(朴元玟) 황신덕(黃信德) 조원숙(趙元淑) 정종명(鄭鍾鳴) 박원희(朴元熙) 유영준(兪英俊) 등이었다. 이로써, 그 동안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두 갈래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던 상황을 하나로 통함으로써 여성항일독립운동의 역량을 총집결하였다.
그리고, 근우회는 창립총회에서, ‘1.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을 기함. 2. 조선 여자의 지위향상을 도모함’을 강령으로 채택하는 한편, 7개 항으로 된 행동준칙도 결정하였다. 이로써,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진영이 연합한 여성항일독립운동단체가 큰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런데, 근우회는 초기에는 주로 여성들을 위한 토론회‧강연회 등 계몽활동에 주력하였으나, 신간회와 연계하여 활동을 펴나가면서 점차 여성들의 독립사상의 고취라는 민족운동으로 진전되어 나갔다. 그리고, 본부에 서무부 ‧ 재무부 ‧ 선전부 ‧ 교양부 등을 두어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법령의 철폐, 생존권의 수호, 한국어의 사용, 학원의 자유,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노동자의 단결권‧파업권의 확립 등의 투쟁을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활동은 근우회가 1931년 해산될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고, 서울에 본부를 두고 지방의 지회조직에도 힘을 기울였는데, 1927년 8월에 전주지회(全州支會)의 결성을 시작으로 하여 김천 평양 춘천 강릉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지회를 설치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외에도 일본의 도쿄와 교토에, 중국의 간도(間島)와 장춘(長春) 등 해외에도 지회를 두었다. 이로써, 1928년 5월에는 70여 개의 지회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회원도 3,000여 명에 이르렀다.
급진적 행동강령 앞세운 우리 민족 대표단체 신간회
1926, 27년 무렵에는 3‧1 독립운동 이후에 조직되어 활동하던 항일독립단체들이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해체된 상태였으며, 또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에 회유 당하는 상황하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절박한 심정이 녹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로부터의 사상적)인 도전에 직면함으로써 국권회복운동에 위기감을 겪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한 방편으로 민족지도자들의 대동단결을 위한 단체의 조직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재 권동진(權東鎭) 신석우(申錫雨) 김준연(金俊淵) 문일평(文一平) 백관수(白寬洙) 신채호(申采浩) 안재홍(安在鴻) 장지영(張志暎) 유억겸(兪億兼) 한용운(韓龍雲) 조만식(曺晩植) 홍명희(洪命憙) 등이 중심이 되어 민족지도자들을 총결집하여, 1927년 5월 15일에 신간회의 창립을 위한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상재를 회장으로, 권동진을 부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신간회는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슬로우건으로 내세우고 창립되었으며, 그 정강정책은 ‘우리는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과 ‘전(全) 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이었다. 이처럼 신간회는 일제강점기에 급진적, 투쟁적인 행동강령을 앞세운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이었다.
이 때, 신간회의 창립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두 갈래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우리 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에 200여 개의 지회와 분회를 두었으며, 1929년 7월에는 일본 도쿄(東京) 교토(京都) 오사까(大阪) 나고야(名古屋) 등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지회와 분회를 두면서 회원을 늘려간 결과, 1930년에는 그 회원수가 4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회의 가입조건이 글씨 모르는 사람은 입회시키지 않았다고 하니, 그 당시로서는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근우회, 신간회와 짝 이뤄 조직적인 항일운동 전개
신간회의 활동은 일제의 식민통치(植民統治)에 반대하는 민중들에게 민족‧자주‧독립의식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신간회는 전국을 순회하며 각종 집회를 열고, 민중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려갔다. 그리고, 그 때마다 민중을 대상으로 연설회를 개최하였는데, 배일사상이 강한 지도자들이 일제의 무단통치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로써, 식민통치에 짓눌려있던 민중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한편, 1929년 11월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김병로(金炳魯)를 비롯한 법조계 인사를 광주에 파견하여 그 진상을 조사케 하였다. 이 때,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세웠지만,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조병옥(趙炳玉) 이관용(李灌鎔) 주요한(朱耀翰) 등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수난을 겪었다.
1927년 5월 27일, 여성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근우회가 민족의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신간회와 짝을 이루어 조직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을 펴나감으로써 조선총독부를 긴장시켰음은 참으로 통쾌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