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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1/01] 애국청년 이봉창의 투혼, 일왕을 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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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새로운 빛     

제국주의 심장 향해 분노를 던지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 교외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된 관병식을 마치고 궁성으로 돌아가는 일왕 히로히토의 행렬을 기다렸다 그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애국청년 이봉창(李奉昌)의 분노의 폭발이었다. 그로부터 83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히로히토를 향해 힘차게 수류탄을 던지던 그 당당한 모습과 그의 투혼은 우리의 가슴에 뜨겁게 살아 있다. 


이봉창은 도쿄(東京) 교외의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궁성(宮城)으로 돌아가는 히로히토의 행렬을 기다렸다. 초조한 마음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양쪽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수류탄을 만져보았다. 수류탄이 두 손에 닿았다. 그리고 성공을 빌었다. 김구(金九)와의 약속을 이행할 기회가 왔다. 


애국청년 이봉창의 의거, 한민족의 새로운 기회 되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5분경, 히로히토를 향하여 힘차게 수류탄을 던졌다. 일본의 수도 도쿄 경시청(警視廳) 앞에서였다. 첫 번째 마차가 지나갔다. 그러나 첫 번째 마차에는 히로히토가 보이지 않았다. 이봉창이 그 다음으로 달려오는 두 번째 마차를 향해 힘껏 수류탄을 던졌다. 이봉창의 분노가 담긴 수류탄이 터져 ‘꽝’ 하고 커다란 폭음을 일으키자 히로히토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던 참관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흩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가 던진 수류탄의 위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요란한 굉음을 울리며 폭발한 수류탄은 몇 명의 근위병(近衛兵)에게 부상을 입히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하늘이 이봉창을 돕지 않았던 탓일까? 마차 행렬은 아무 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일왕 히로히토를 향한 수류탄은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독립운동에 한 줄기 큰 힘이 되었다. 또 이 사실이 보도되면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일본과 맞서있던 중국에서는 우리 한민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애국청년 이봉창 의거의 위대한 힘이었다.


이봉창이 상해(上海)에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宣誓文)을 떠올렸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돼야 적국(敵國)의 수괴(首魁)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그리고 이봉창은 선언서를 가슴에 걸고 양손에 각각 한 개씩의 수류탄을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1931년 12월 13일이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이렇게 일왕척살계획은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1932년 1월 8일, 이 날 이봉창의 의거는 일본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그들이 신(神)처럼 떠받드는 히로히토를 향한 대한(大韓)의 애국청년 이봉창의 수류탄 투척은 또 한 번 일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1909년 10월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일, 1919년 9월의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폭탄을 던진 일들이 떠올랐을 것이다.   


일제의 차별과 핍박 속, 더욱 확고해진 항일의식


  이봉창은 1901년(고종 38년) 8월 10일 경성부(京城府) 원정(元町) 2정목(丁目)(지금의 서울 용산구 원효로 2가)에서 이진구(李鎭球)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집안이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는데, 아버지의 병환으로 말미암아 이봉창이 13세가 되던 때에는 매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봉창은 이러한 가정형편 때문에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와다에이세이도(和田衛生堂)의 점원으로 들어갔는데, 어린 나이에 주인으로부터 ‘조센징’이라는 굴욕적인 말을 듣고 크게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이봉창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는 ‘나라를 빼앗긴 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20년 1월 16일, 그는 철도회사의 역부(驛夫)가 되었다. 이로부터 1년 쯤 되었을 때, 승급과 봉급, 상여금 등이 일본인과의 차별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 ‘왜, 이럴까?’ 참기 어려운 굴욕이었다.  


1924년 4월, 역부를 사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새로운 삶을 구상하였다. 1925년 11월, 오사카시(大阪市) 어느 한국인 하숙집에 머물면서 일자리를 찾았다.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이곳 저곳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식민지의 백성으로 살아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1910년 8월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일제(日帝)의 무단정치(武斷政治)의 질곡에 빠져있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병탄한 후 영구히 그들의 수중에 넣기 위하여 발빠르게 경제수탈(經濟收奪)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 재벌(財閥)들로 하여금 조선(朝鮮)에 진출하여 토지에 투자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 대지주(大地主)가 등장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점점 정치세력(政治勢力)으로 성장해나갔다. 이로써, 조선의 농민들은 자기의 농지를 잃고 소작농(小作農)으로 살아가는 딱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한일병합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들고 나왔다. 또 그들은 내선일체(內鮮一體)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하는 간교한 수작을 부리면서 민족말살(民族抹殺)을 자행하였다. 나중에는 우리 말과 글을 쓸 수 없게 하였으며, 우리의 성(姓)마저 빼앗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봉창의 삶인들 오죽하였겠는가. 그는 오사카와 도쿄를 오가며 막노동으로 겨우 생계를 꾸려나갔으며, 일본에서 살아가는 방편으로 이름을 기노시타 마사조(木下昌藏)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와의 만남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오사카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로부터 상해에는 항일독립운동을 하는 임시정부(臨時政府)가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틔었다. 항일운동에 뜻을 같이 하는 동지를 찾아나서는 길이었다. 조선인이라는 차별이나 압박을 받을 때마다 느꼈던 감정이 항일의식(抗日意識)으로 바뀌어 가슴속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구국정신을 떠올리곤 하였다. 


   1930년 12월 10일, 이로부터 이봉창의 상해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찾아나섰다. 빼앗긴 나라를 찾는 일에 자기 한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뒤였다. 그가 찾은 임시정부는 마랑로(馬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에 있었는데, 민단(民團) 사무소도 함께 있었다. 이봉창이 민단 사무소에서 김구를 만난 것은 1931년 1월이었다. 김구를 만난 이봉창은 임시정부와 민단의 강령,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이로부터 김구와의 계속되는 만남이 결실을 맺어갔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하여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백범일지』 중에서) 이 말은 김구를 크게 감동시켰다. 


그리고 이봉창은 그 해 12월 17일 일왕 히로히토를 격살할 계획을 가슴에 품고, 수류탄 2개를 몸에 숨기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나는 히로히토를, 다른 하나는 자신이 죽을 수류탄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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