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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항쟁사 [2021/01]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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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맥 기반으로 서구 열강에 자국 중심 논리 전파 

일본의 젊은 지성, 군국주의 기틀 마련하다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한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는 세 가지의 길이 있다. 전쟁에서 지거나, 더 강한 나라의 외교 전략에 휘말리거나, 아니면 국가 경영 능력이나 지탱력이 없어 스스로 강대국에 흡수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멸망은 어디에 해당할까? 전쟁을 하다가 진 것은 아니니 장렬하달 것도 없다. 스스로 나라를 바친 것이 아니니 합방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도 있다. 우리는 외교로 멸망했으니, 지배계급의 죄와 책임이 더 크다. 망국이 치열한 외교전이었다고 한다면 그 외교 주역의 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근대화의 중추적인 인물, 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외교 주역, 그 가장 앞자리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있었다. 이토는 성(姓)도 없는 적빈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민한 아들을 집안에 잡아두지 않고, 잡역부이자 하급 무사(足輕)인 이토 나우에몬(伊藤直右衛門)의 양자로 보냈다. 어려서 정한론(征韓論)의 효시인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만난 것이 운명적이었다. 쇼카존주쿠(松下村塾)에서 개명(開明)한 그는 에도(江戶)로 진출하여 도막파(倒幕派)에 가담하면서, 남들보다 유난히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인맥을 파악하는 탁월한 후각과 상사의 호감을 살 줄 아는 뛰어난 친화력을 가진 이토는 외치파의 거두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를 만나 유럽을 거쳐 미국을 돌아보는 외교 사절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이때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당시 대통령인 그랜트(Ulysses S. Grant)를 면담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그 뒤에 그는 사위 스에마쓰 겐조우(末松謙澄)를 통하여 미국 특히 T.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 뜻 이은 지식인들 일본 군국주의의 기틀 마련 


  이토 히로부미의 뜻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한 후배는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였다. 메이지유신 직후 외무성에 들어간 그는 주미공사와 상무대신을 거쳐 외무대신을 지내면서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조약의 체결에 공로를 세웠다. 가쓰라 타로(桂太郞)는 독일 유학 출신으로, 젊어서 유럽 시찰한 뒤 독일공사관 무관으로 봉직하면서 프러시아의 군제를 공부하고 귀국하여 육군차관을 지냈고, 청일전쟁에 무공을 세워 대만(臺灣) 총독을 거쳐 육군대신과 총리대신을 지내며 군국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사이온지 긴모찌(西園寺公望)는 일본인으로서는 드물게 프랑스에 유학한 뒤 귀국하여 1880년에 메이지(明治)법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뒤에 외교계에 투신하여 유럽 각국 공사로서 격동기의 대유럽 외교를 수행한 공로로, 문부대신과 외무대신을 거쳐 총리대신으로서 러일전쟁의 전후 처리에 이바지했다. 


하야시 타다스(林董)는 젊은 날에 총명함을 인정받아 영국 공사 파크스(Harry Parkes)의 주선으로 런던에 잠시 유학하던 중에 메이지유신과 함께 서둘러 귀국하여 외무성에 투신했다. 그 뒤 그는 외무부상, 유럽 각국의 공사와 대사를 맡아 영일동맹을 성사하였으며, 외무대신으로 러일전쟁의 전후 처리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구리노 신이치로(栗野愼一郞)는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한 뒤 1881년에 외무성에 채용되어, 유럽 각국 공사를 지낸 인물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의 전후(前後) 처리에서 능력을 발휘하였으며, 1902년에 영일동맹의 체결을 수행했다. 다카히라 고고로(高平小五郞)는 가이쇼우(開城)학교를 졸업한 뒤에 외무성에 입사하여 외무차관과 외상을 지낸 다음, 미국 공사의 자격으로 포츠머스회담 전권위원을 지냈다.


코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는 하버드대학에서 법학·정치학을 공부한 뒤 외무성과 사법성에서 근무하다가, 갑오농민전쟁 당시에는 점령지 민정장관을 지냈다. 그는 각국 공사를 지내고, 가쯔라 타로 내각에서 내무대신을 거쳐 외무대신의 자격으로 1905년 포츠머스강화회의 전권 대표를 지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인물은 카네코 겐타로(金子堅太郞)이다.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를 따라 미국에 시찰을 떠났다가 그곳에 남아 하버드대학에서 수학하며 코무라 주타로와 같은 집에서 하숙한 친미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귀국한 그는 도쿄(東京) 대학 교수로 잠시 봉직하다가 이토 히로부미의 비서로 발탁되어 상무대신을 거쳐 사법대신과 추밀원고문을 지냈다.

 

루즈벨트와의 친교 기반으로 친일 정책에 결정적 역할, 카네코 겐타로 


 위의 인물들을 거론하는 것은, 여기에서 주목할 인물 카네코 겐타로 때문이다. 하버드대학 시절에 이미 동기 동창으로서 T. 루즈벨트와 친교를 맺고 있던 그는 루즈벨트의 친일 정책과 대한(對韓) 정책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되기에 앞서 카네코 겐타로로부터 두 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하나는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가 저술한 무사도(武士道, Bushido, The Soul of Japan, 1900)였다. 루스벨트는 이 책을 통해 무사도를 처음 알게 되었고 이후 그가 지속적으로 친일 성향을 갖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예일대학교의 ‘7인의 신사’가 쓴 작은 책자였는데, “일본은 한국이 러시아에 먹히는 것을 막아준 댓가로 한국에서 우월한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인간 관계는 하버드대학에 재학 중인 일본 청년 지식인들에 대한 T. 루즈벨트 대통령의 인간적인 매료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 뒤 T.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영국의 문제에 관해서는 이들의 조언에 많은 귀를 기울였다. 그는 러일전쟁을 원만하게(?) 타결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 공로(?)에는 일본이 조선을 장악하도록 한 점도 들어 있다.


하버드대학일본유학생회, 일본 극동 지배 기반을 다지다  


  위의 인물들에서 공통되는 것은 그들이 대부분 하버드대학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하버드대학일본유학생회’(The Japan Club of Harvard)를 조직했다. 그 핵심 인물은 카네코 겐타로였다. 그는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도를 무렵인 1904년, 하버드대학에서 ‘극동의 정세’(The Situation in the Far East)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고, 이를 곧 책으로 출판했다. 그날의 연설에는 하버드대학 총장도 참석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컸다. 이 책은 일본이 극동을 지배해야 할 책임과 당위성을 설명하고자 작성된 것이었다. 그는 미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제반 문제들은 바로 이 하버드 출신들(Harvard men)이 수행하고 있다고 장담했다.


카네코 겐타로 및 하버드일본유학생회의 이와 같은 논리에 논거를 제공한 데에는 두 사람의 역할이 있었다. 첫째는 조지 케넌(George Kennan, the Elder)이었다. 암흑기의 러시아 문제에 대하여 남보다 먼저 눈을 떴던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에 AP통신과 Outlook의 극동특파원으로서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논객이자 로비스트였으며, T. 루즈벨트의 영향력 있는 조언자였다. 그는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러일전쟁 전황을 취재하고자 한국에 왔다. 그는 이 취재를 기초로 The Outlook에 네 편의 글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한국에 대하여 참아 거론하기도 민망한 악담이었다. 


케넌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민도와 문화는 아이티(Hayti) 수준이며, 일본과 비교하면 네덜란드와 베네수엘라의 차이를 보이고, 비누를 쓰지 않고 이를 닦지 않아 하이에나의 냄새가 나 한국 사람과 인터뷰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고종을 알현했는데 “마치 철없는 아이 같고 보어족(Boar)처럼 고집스럽고 무지했으며, 묶어놓은 사슴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황태자는 불구자로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며 그는 한국이야말로 다시 갈 곳이 못 된다고 글을 맺었다. 


  하버드대학일본유학생회에게 일본의 역사적 소명과 긍지를 심어준 두 번째 인물은 아사카와 간이치(朝河貫一)였다. 그는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에서 학부를 마치고 예일대학에서 극동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아사카와는 학위 논문을 보완하여 한 노작을 출판하였는데, 그것이 곧 러일전쟁사(K. Asakawa, The Russo-Japanese Conflict, Cambridge, 1904)였다. 이 책은 선악이나 정오를 떠나 극동사 연구의 중요 텍스트가 되었으며, 아사카와는 그 명성으로 예일대학 사학과 교수가 되어 35년 동안 재미 일본 유학생들에게 야마토 다마시(일본의 민족 정신, 大和魂)를 고무하며 러일전쟁의 정당성과 일본 필승의 논리를 세계에 전파하고 세계에 일본의 부상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사카와나 케넌이나 또는 하버드대학일본유학생회가 미국을 그토록 설득한 개전의 논리는 무엇일까? 일본은 습기가 스며들듯이 내려오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으로 대한제국을 병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은 무장이 해제된 사무라이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우국심과 정한의 논리와 상승효과를 일으켜 조선 병합의 성과를 달성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젊은 지성들이 그토록 치열하게 조선 정벌을 연구할 때 한국의 정부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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