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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1/01] 3월의 전설(67회) ┃ 경북 의성군의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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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본 고장, 경북 3·1운동 시발지 

모든 계층 연속 시위, 23일간 21번 ‘독립만세’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경북 의성군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발로 안평·봉양·장곡·신명·춘산면에서 4월 초까지 전개되었다. 이때 신학교 입학생, 대구로 유학 간 자제로부터 만세시위 소식이 속속 전해지자 어른과 아이 없이 모두 나섰다. 거기에는 책 보따리든 보통학교 학생들, 기독교 목사와 영수 등 역원들, 마을 선비와 아이들이 따로 없었다.  안평면 대사리의 경우처럼 작은 마을에서 4일이나 연속 만세시위를 벌인 예는 전국적으로도 드문 경우였다.   


신학생 김원휘


  1919년 3월 3일 의성군 안평면 괴산동 사는 장로교회 조사(助事) 김원휘(金原煇)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 그러나 신학교 교문은 꽁꽁 닫혀 있었고, 시내 곳곳에서 만세시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시위는 이틀 전인 3월 1일에 대대적으로 시작되었고, 일본군 보병 1개 중대가 출동하여 총칼로 진압하고 있었다. 


김원휘는 3월 6일 고향 의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비안면 쌍계동 장로교회 박영화(朴永和) 목사에게 평양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며 말했다. 


“우리도 해야 합니다.” 


이틀 뒤인 3월 8일 대구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시위 현장에 의성 안평면 괴산동 장로교회 영수(領袖) 박우완(朴又完)과 대구 계성학교 학생 박상동(朴尙東)이 있었다. 그들은 뛰는 가슴을 안고 고향에 돌아왔다.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비안면 안평동(安平洞) 기독교인들의 만세시위는 이렇게 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비안보통학교 학생들 


서울·평양·대구 소식을 들은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 박만녕(朴萬寧)은 3월 9일 밤 박기근(朴基根, 또는 朴望牙)을 찾아갔다. 곧 비안 공립보통학교 우희원(禹熙元)·정인성(鄭寅成 또는 寅星) 등 상급반 급장들이 모였다. 3월 11일 오전 11시 박만녕은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 전원을 교정의 아카시아 나무 밑에 집합시켰다. 


“오늘 방과 후 비안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이다. 수업 마친 후 비안 시장에 모여라!”


졸업생들에게는 태극기를 만들어 오도록 연락하였다. 3월 11일 그날은 비안 장날이었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주재소 순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하고 대비한 것이다. 박만녕은 할 수 없이 해산을 선언했다. 


일인 교장이 이 사실을 알았다. 

“모두 퇴학시키겠다!”

교장이 길길이 뛰었다. 학생 간부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음날인 3월 12일. 오전 9시 수업 시작종이 울리자, 

“책보를 들고 뒷산에 모여라!” 학생 대표들이 운동장의 전교생들을 향해 호령했다. 


주도 학생 4명을 일인 교장이 교무실로 불러 설교했다. 그사이에 전교생 약 1백 50명은 책보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연달아 높이 외쳤다. 교장 설교를 듣던 주도 학생 4명도 교장 제지를 뿌리치고 뒷산으로 달려가 합세했다. 주재소 순사들과 교사들이 달려왔다. 학생들은 강제해산을 당하고, 주도했던 우희원·박기근·저인성 3명은 검거되었다. 박만녕은 종적을 감추었다가 2년 뒤 1921년에 붙잡혔다. 학생 일부는 강제해산을 당한 후 비안면 쌍계동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비안면 쌍계동 교회 사람들 


한편 평양신학교 입학하러 갔다가 만세시위로 되돌아온 김원휘는 3월 6일 곧장 쌍계동 교회에서 박영달(朴永達), 박영신(朴永新), 배중화(裵重曄)·배달근(裵達根)과 상의하였다. 또 이튿날인 3월 7일 괴산동 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를 만나 서울과 평양 소식을 전하며  의성에서도 일어날 것을 종용하였다. 이튿날 대구 계성학교 학생인 박영화 목사 장남 박상동(朴尙東)이 왔다. 아들은 대구 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대구 시위 소식을 전했다. 


3월 13일로 비안면 쌍계동 만세시위가 결정되었다. 주도자들은 쌍계동 박영신 집에서 태극기 2백 개를 만들었다. 3월 13일 정오 박영신 집 앞에 약 2백 명이 모였다. 비안보통학교 학생 50명도 참여했다. 이들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동리를 누볐다. 급보를 받고 의성경찰서 경찰부장이 달려왔다. 주도자 5명을 비롯한 만세시위자들은 붙잡혀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에서 1년 6월 형을 받아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비안면 동부동의 청년들 


3월 12일 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어난 날 위천이 태극문양처럼 휘돌아 흐르는 비안면 동부동 청년들인 김석근(金石根)·임재호(林在虎)·박후도(朴後度)·박홍섭(朴洪燮) 등이 행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김석근의 집에 모여 한지로 태극기 1백 20여 개를 만들었다. 3월 13일 밤 8시경 김석근은 태극기를 가지고 서부동 비안시장으로 가 그곳 농민들을 모아 놓고 연설했다.

“지금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고 있소. 우리들도 일어나 국권을 회복합시다!”


모여든 50여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함께 목청껏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였다. 이들 약 1백 명의 시위대는 서부동 시장에서 서부동 시위대와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연호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3월 16일 서부동 장날이 되자 같은 동리 손동일(孫東一)은 임재호·박후도·박홍섭과 같이 오후 3시경 다시 태극기를 가지고 서부동 시장으로 가서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안평면 대사동의 그치지 않는 동리시위


대구 소식, 평양·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이 박영화 목사를 통하여 의성의 서쪽 안평면 대사동 교회로 전해졌다. 3월 16일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후 대사동 교회의 영수 이종출(李鍾出)·김옥돈(金玉頓), 집사 이양준(李良俊)·이북술(李北述, 또는 李華實) 등 4인은 교회당에 남아 만세시위 단행을 결정하고 같은 마을의 이만주(李萬俊)·배세태(裵世泰)·이맹준(李孟俊)·이수원(李守元)·정갑이(鄭甲伊)·이흔이(李欣伊) 등에게도 알렸다. 오후 7시 이들의 뜻에 호응하는 약 1백 명의 교인과 동리민이 대사동 뒷산에 올랐다. 이들은 밤이 깊도록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 후 산에서 내려와 대사동을 출발하여 기도동을 거쳐 창길동까지 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3월 17일 밤에도 만세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날 밤 8시 약 150명의 군중이 더불어 대사동 우리곡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하여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까지 시위를 전개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3월 18일에는 3백여 명이 모였다. 대사동 마을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마을을 누비다 해산하였다. 3월 19일 낮에는 4백여 명의 군중이 대사동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안평주재소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하고 화령동까지 나아갔다. 이양준은 1200~1300명의 군중과 더불어 봉양면 도리원으로 들어가 도리원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와 같이 대사동 작은 동리의 시위는 연나흘을 이어졌다.  


봉양면 사부동 선비와 아이들 


3월 17일 봉양면 사부동에 사는 유생(儒生) 이종순(李鍾珣)은 집에서 태극기 2개를 만들어 들고 밤중에 마을 앞동산으로 올라갔다.


동네 아이들이 “아저씨 밤에 어디를 가시능교?” 하고 물어보자 이종순이 “독립만세를 부르러 산에 간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말했다. “우리도 같이 가도 되니꺼?”


  이종순은 “너희가 독립이 무엇인지 아느냐? 독립만세를 부르면 잡혀갈지 모른다. 각오가 되어 있으면 따라오너라!” 대답했다.


이종순이 동산에 오르는데 아이들뿐만 아니라 주민들도 따라와 그 수가 1백여 명이 되었다. 이종순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소리가 밤하늘이 진동하였다. 이들은 밤이 깊도록 독립만세를 부르고 마을로 내려와 해산하였다. 이 감격을 잊지 못한 주민들은 다음날 밤에도 수십 명이 동리 뒷산에 올라가 밤늦도록 독립만세를 불렀다. 


도리(桃李) 주재소의 순사들이 정보를 듣고 달려와 이종순을 비롯한 주도자 3인을 체포하였다. 이들 3인은 각각 징역 6개월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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