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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1/02] 죽은 친일파와 살아있는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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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지배자로 군림하는 강력한 친일 카르텔  

백범이 일제 패망에 낙담한 까닭  


글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해방을 맞은 백범 김구는 뜻밖에도 “이것이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한탄했다. 광복군의 참여가 아닌 일본의 패전 선언으로 독립을 맞아, 이후의 정국을 독립을 위해 힘쓴 이들이 주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제 35년의 질고를 겪은 후 새롭게 나라를 꾸려야 할 대한민국의 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거나 일제 식민지배를 옹호한 친일파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문제였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친일세력을 그대로 중용하면서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를 무산시켰다.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제와 싸웠던 독립운동가들, 그들은 해방 이후에도 친일세력에게 쫓겨야 했다.


광복 후 정국은 백범의 우려대로 흘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서안(西安)에서 맞았다.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와 오찬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중경(重慶·충칭)에서 전령을 받은 축 주석이 “왜적이 곧 항복한다”고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뜻밖에도 “이것이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한탄했다. 백범이 뜻밖의 반응을 보인 이유는 일제 패망 후의 정국을 독립운동가들의 뜻대로 주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김구 주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가 되었다”고 말했다. ‘수년간 애를 써서’ 준비한 것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는 것이었다.  


1919년 3·1혁명 직후 상해로 망명해 1945년까지 온갖 산고를 다 겪은 만 예순아홉의 노혁명가가 일제의 패망을 기뻐하기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로 여긴 이유는 한국광복군의 정식 참전을 눈앞에 두고 일제가 패망했기 때문이었다. 백범 김구는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광복군 사이의 합동작전을 합의했고, 조만간 학병 출신들을 주축으로 국내에 광복군을 잠입시켜 정보를 수집하고 세력을 확대해 전국 각지에서 군사봉기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임시정부가 참전국의 일원으로 대접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면 광복 후 국내 문제를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직전에 일제가 패망해 한국광복군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구 주석은 ‘장래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축 주석 집에서 나온 김구는 “내 차가 큰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임정 주석 김구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정국은 김구 주석의 우려대로 흘러갔다.


외세의 진주와 친일파 부활


  일제 35년의 질고를 겪은 후 새롭게 나라를 꾸려야 할 대한민국의 과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거나 일제 식민지배를 옹호한 친일파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문제였다. 그러나 백범 김구의 예상대로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기준으로 각각 남북에 주둔했고,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친일세력을 그대로 중용하면서 민족정기 바로 세울 기회를 무산시켰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일제와 싸웠던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이후에도 친일세력에게 쫓겨야 했다.


해방 공간(1945~1948)에서 한국 정치세력은 크게 좌파 사회주의계열과 우파 민족주의 계열로 나눌 수 있었다. 해방 이후 정국이 정상적으로 흘러갔다면, 즉 우리 민족 구성원의 의사대로 흘러갔다면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세력과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세력들이 각각 정당을 만들어 국민들의 선택에 의해 여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에 나섰던 정치세력은 좌파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공산당(박헌영), 근로인민당(여운형), 남조선신민당(백남운) 등이 있었고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노농당(유림) 등이 있었다. 항일에 나섰던 우파 민족주의 계열은 한국독립당(김구), 국민당(안재홍)과 사민주의를 표방한 고려민주당(원세훈) 등이었다. 한국이 프랑스처럼 좌우 레지스탕스가 각각 정당을 만들어 국민들의 선택을 받았다면 이들 정당들이 각각 여야가 되어 나라 발전을 도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3년간의 미 군정기를 마치면서 좌파 사회주의 계열은 물론 우파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세력도 모두 제거되었다. 1948년 8월 15일 환국정부가 수립될 때 여러 친일세력들이 결집한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회가 여당이 되고, 김성수 중심의 친일 지주정당 한민당이 야당이 되었다. 좌우 독립운동 세력들은 모두 제거되고 친일세력들이 여야를 이루는 기형적 형태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현재까지 한국 정치구조가 비정상적인 상황인 뿌리가 여기에 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만들어 ‘반민특위’를 구성했지만 제대로 된 친일파 한 명 처벌하지 못하고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 해체되다시피 하고 말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다음과 같은 행위를 한 자를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첫째, 일본정부와 통모(通謀)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하였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하는 자. 


둘째, 일본정부로부터 작(爵)을 받은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던 자. 


셋째, 일본 치하에서 독립운동한 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 


넷째,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부의원(府議院)의 고문 또는 참의, 칙임관 이상의 관리, 일정행위, 독립 운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단체를 조직했거나 그 단체의 간부된 자, 군 경찰의 관리로서 악질적인자, 군수공업을 경영한자, 도·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된 자 중에서 일제에 아부하여 죄적이 현저한 자, 관공리가 되었던 자로서 악질적인 죄적이 현저한 자, 일본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간부로서 악질적인 자, 종교·사회·문화·경제 기타 각 분야에서 악질적인 언론저작과 지도를 한 자, 일제에 대한 악질적인 아부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반민특위가 이승만 대통령의 사주를 받은 경찰에 의해 습격당해 무력화되면서 친일파 청산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 결과 한국 사회는 아직도 곳곳에서 친일세력들이 막강한 카르텔을 구축해 사회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일본 극우파의 재등장, 신친일파 육성


현재 반민특위에서 규정한 친일파들은 거의 다 사망했다. 그러나 이들 개인은 죽었을지 몰라도 이들이 한국 사회 곳곳에 구축한 친일 카르텔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정치, 경제, 사법, 언론, 교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친일세력들과 그 후예들이 아직도 주류로 행세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서는 신친일파가 형성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사사카와 재단 등 극우세력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신친일파를 육성하고 있다. 특히 학술분야에서 신친일파들이 형성되면서 어떤 측면에서 일제강점기보다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갉아먹고 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 일본은 친일파를 양성해 대한제국을 무너뜨렸는데, “최근 비슷한 현상이 되풀이되기 시작했다”고 우려했다. 그는 “신친일파들이 한국 사회를 침식하기 시작해 이미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극우파들이 막대한 자금을 뿌려 신친일파를 조직적으로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역사학계와 경제학계에서 친일세력들의 재등장은 한국 사회의 정체성을 갉아먹고 있다. 역사학계는 심지어 ‘임나일본부설’까지 주창하고 있으며, 경제학계는 일제강점기 때 사회가 발전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제창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대부분 주요대학의 교수들일뿐만 아니라 국가기관들까지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 문부성 장학금과 사사카와 재단 같은 일본 극우파들이 주는 연구비나 장학금, 생활비 등을 받고 귀국해 친일활동을 하는 신친일파들은 외형은 한국인이지만 그 내면은 일본극우파들에 다름 아니다. 


대학 강단 장악한 식민사학자들


일본 극우파들은 각종 문헌이나 유적, 유물들을 가지고 더 이상 ‘임나일본부설’을 주창하기 힘들게 되자 한국의 친일학자들을 일본으로 초청해 막대한 연구비나 사례금을 주고 친일 대학원생들을 불러들여 장학금과 생활비까지 대주면서 신친일파를 육성하고 있다. 한국 역사학계는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할 경우 국내 대학에 자리 잡기가 아주 수월한 구조이기 때문에 이들 친일 역사학자들은 거의 구조화된 상태다. 이들은 『일본서기』를 끌어들여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 결과 2019년 12월~2020년 3월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 가야 전시인 ‘가야본성’전이 임나일본부설로 뒤덮이는 망국적 현상까지 발생했다. 각 대학의 가야사 전공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임나=가야’라는 일본 극우파들의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현상은 거의 보편화되고 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반민족행위자들인 ‘이병도·신석호’의 제자들로서 구한말 일진회의 이용구·송병준 같은 매국매사 행위를 버젓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대학의 강단을 장악한 이들 식민사학자들은 ‘역사는 자신들만의 것’이라는 논리로 전 국민을 역사에 무지한 사맹(史盲)으로 만드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왔다. 그 결과 한국은 정치인도 관료들은 물론 심지어 지식인들도 자국사에 무지한 상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막강한 식민사학 카르텔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낸 세금을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또한 경제학계 일부에서 주창하는 ‘식민지 근대화론’도 한국 사회의 정체성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회가 발전했으니 대한민국은 탄생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들 친일 사학자들과 친일 경제학자들은 다 같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찬양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한다.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인하는 학자들은 일부 언론과 막강한 카르텔을 이루어 우리 사회의 정신세계를 크게 갉아먹고 있다. 


이 카르텔을 빨리, 철저하게 해체시킴으로써 이 나라의 정신세계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또다시 백 년 전과 같은 운명에 처할지도 모른다. 


순국선열 드높이는 일에 국가가 적극 나서야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알려면 15만~20만 명에 이르는 순국선열과 그 유족들의 상황을 보면 된다.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서울 서대문의 위패 봉안실은 54평에 불과하다. 너무 협소해서 모시지 못한 순국선열 위패가 수두룩하다. 더구나 이를 관리하는 순국선열유족회에 대한 정부 지원금은 0원이다. 너무 부끄러워서 밖에다 말하기도 창피한 현상이다.


친일세력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가 순국선열과 그 유족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이제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현충사를 새롭게 건축해 외국의 국가정상이나 주요 인사들이 방한할 경우 반드시 참배해야 하는 곳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리고 순국선열유족회를 법정단체화해서 체계적으로 순국선열들을 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를 다시 장악하고 있는 신친일파 세력을 해체시키는 일과 순국선열들을 드높이는 일을 동시에 진행할 때 우리 국가와 우리 사회는 만년대계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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