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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1/02] 민족운동의 선구 신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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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투쟁적 행동강령 앞세운 민족유일당  

대동단결로 민족 역량 총결집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철폐, 생존권의 수호, 우리 말과 글의 사용, 학원(學園)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노동자의 단결권·파업권의 확립 등의 투쟁을 전개한 신간회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두 갈래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했다. 창립 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한 신간회는 전국에 200여 개의 지회와 분회를 두었으며, 1930년에는 그 회원수가 4만 명에 이르러,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민족운동은 활기를 찾아갔다. 





민족주의·사회주의 하나로 통합 

신간회 탄생


  1927년 2월 15일, 이날 신간회(新幹會)가 민족운동(民族運動)의 기치를 높이 올리면서 창립되었다.  


이 무렵은 3·1 독립운동 이후 많은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이 일제에 의하여 회유 당하는 상황하에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이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들로부터 사상적(思想的)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커다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의 극복을 위하여 민족지도자(民族指導者)들의 대동단결이 요망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신간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1927년 2월 15일, 권동진(權東鎭)·신석우(申錫雨)·김준연(金俊淵)·문일평(文一平)·백관수(白寬洙)·신채호(申采浩)·안재홍(安在鴻)·장지영(張志暎)·유억겸(兪億兼)·이갑성(李甲成)·이승훈(李昇薰)·한용운(韓龍雲)·조만식(曺晩植)·홍명희(洪命憙) 등 34명의 발기인이 서울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의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회장에 이상재(李商在)를, 부회장에 권동진을 추대하였으며, 하부조직으로 서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 등 7개 부를 두었다.


이때 신간회는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을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창립되었으며, 그 정강정책은 ‘우리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과 ‘전(全) 민족의 현실적 공동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 그리고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이었다. 이처럼 신간회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급진적·투쟁적 행동강령을 앞세운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이었다. 1931년 5월 16일, 신간회가 해소될 때까지 4년 3개월 동안 민족운동(民族運動)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1927년 5월 27일 여성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근우회(槿友會)와 손을 맞잡고 농민운동·노동운동·학생운동·청년운동 및 여성운동을 지원하였다. 


더욱이 신간회의 창립은 민족주의(民族主義) 진영과 사회주의(社會主義) 진영이 두 갈래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던 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민족의 역량을 총결집하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신간회는 창립 후 꾸준히 세력을 확장하여 전국에 200여 개의 지회와 분회를 두었으며, 1929년 7월에는  만주의 간도(間島), 일본의 도쿄(東京)·교토(京都)·오사카(大阪)·나고야(名古屋) 등에도 지회를 설치하였다. 이처럼 지회와 분회를 두면서 회원을 늘려간 결과, 1930년에는 그 회원수가 4만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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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신간회가 창립되고 회원수가 늘어남으로써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민족운동은 활기를 찾아갔다. 신간회는 민족계몽운동(民族啓蒙運動)을 통하여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심어주는 데 주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법령의 철폐, 생존권의 수호, 우리 말과 글의 사용, 학원(學園)의 자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노동자의 단결권·파업권의 확립 등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8년 7월부터는 지방순회 강연을 시작하였으며, 1929년 11월에는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이 일어나자 김병로(金炳魯)를 비롯한 법조계(法曹界) 인사들을 광주에 파견하여 그 진상을 조사케 하고 일본 경찰의 부당한 조치에 항거하였다. 이때 신간회 광주지회도 학생들의 항일투쟁을 격려, 후원에 나섰다. 이를 계기로 하여 전국적인 민중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으나, 조병옥(趙炳玉)·이관용(李灌鎔)·이원혁(李源赫) 등 주요 인사들이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전 민족의 공동이익 실현 위해

143개 지회에서 맹활약


신간회는 한민족의 완전독립·절대독립의 궁극적 목표를 설정하고 일제에 맞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협동·연대하여 1차적으로 신간회의 당면과제를 실천에 옮겨나갔다. 


신간회의 당면과제란 ‘농민 교양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경작권의 확보 및 외래이민을 방지한다’,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확보한다’,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 ‘협동운동을 지지하고 지도한다’, ‘염의단발(染衣斷髮)의 여행(勵行)으로 백의와 망건의 폐지를 고조한다’였다(신용하 『신판 신간회의 민족운동』 중에서). 


신간회는 이와 같은 6개 항의 당면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해나감으로써 전(全) 민족의 공동이익을 실현해나갔으며, 일본에 빼앗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회복, 각종 악법을 철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일제의 경제수탈로 말미암아 일본인과의 사이에 노동쟁의와 경작권의 다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의 재벌들이 토지에 투자를 계속하면서 우리 농민들이 토지소유권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높은 소작료의 징수에 시달리는 농민의 수가 나날이 늘어만 갔다. 이에 더하여, 일제는 농업이민(農業移民)을 추진함으로써 많은 농업회사가 설립되고, 우리의 농토는 하나 하나 일본인의 수중으로 들어가는 현상이 빚어졌다. 이로 말미암아 노동자·농민들의 설 땅마저 없어지게 되었는데, 신간회는 이들의 노예적 삶을 해결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다.


신간회는 이러한 활동을 위해서 지회의 활동을 확대나갔다. 1927년 12월에 해외지회를 포함하여 104개의 지회를 시작으로 1928년 12월에는 143개의 지회로 확대되었다. 이 중 서울(京城)지회의 경우는 1927년 6월에 회원 290여 명으로 출발하였는데, 한용운을 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서울지회는 이로부터 매년 지방을 순회하면서 민중계몽을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이관구(李寬求)·이황(李晃) 등이 연사로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들의 연설내용은 일제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경제수탈을 비판하고, 노동자·농민들의 삶의 어려움을 하나하나 들어가면서 이들의 경제적(經濟的) 해방을 부르짖었다. 일제는 이러한 서울지회의 활동을 원천적인 봉쇄에 나섰고, 1928년 12월 18~19일 개최할 예정인 제3회 정기대회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서울지회는 굽히지 않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을 계기로 서울지회는 전국적인 민중대회를 열 계획도 가졌으나, 지회장 조병옥이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당시 일제의 탄압은 나날이 심해져갔다. 


일제의 탄압이 있었지만, 신간회의 지회활동은 계속되었다. 서울지회에 이은 부산지회(지회장 김국태)가 1927년 7월 30일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 4월 24일 경성지회 이관구를 초청하여 ‘신간회운동의 의의’라는 주제의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1929년 11월 20일에도 부산지역의 사회단체 대표를 연사로 모시고 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민중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종호(李鍾浩)의 ‘우리의 사명’ 등이 그것이었다.


이 밖에도 평양지회(지회장 조만식)·대구지회(지회장 이경희)·광주지회(지회장 최흥종)·전주지회(지회장 백용희)·청주지회(지회장 손현수)·함흥지회(지회장 한영호)·청진지회(지회장 김창권)·신의주지회(지회장 박영휘) 등이 크게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쿄지회(지회장 조헌영)도 국내의 여러 지회와 연계하여 활동하였던 흔적이 보인다. 이처럼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 주요도시 및 일본의 지회를 통해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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