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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1/02] ​3월의 전설(68회) ┃ 충북 영동군의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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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천 미터 산곡간에 울려퍼진 함성  

민생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이 만나다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충청북도 양동군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에 접하고 있다. 고대에는 영동 양산 금강 상류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양국의 전초기지가 이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3·1운동 때에는 민생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이 만나는 곳이었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은 조선 민중의 생활고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시점이다. 전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만세시위 중  주민들이 당하고 있었던 극심한 생활난이 전국의 만세시위의 외침 속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의아하다. 그런 중에 민중의 생활고를 외쳤던 충북 영동군 학산면 독립만세 시위는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삼국의 접경, 충청 전라 경상도가 만나는 영동  


  충청북도 양동군은 경상도(경북 김천·상주) 충청도(충남 금산, 충북 옥천), 전라도(전북 무주)에 접하고 있다. 고대에는 영동 양산 금강 상류가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양국의 전초기지가 이곳에 마주하고 있었다. 3·1운동 때에는 민생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이 만나는 곳이었다. 


1919년 3월 최악의 민생 위기 


1919년 3월은 식민지하 민생의 관점에서 보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위기는 6개월 전 1918년 8월부터 본격화되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였다. 일본은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국 측에 속했다. 대전은 지구 반대편 유럽에서 벌어졌다. 유럽 제국은 일본의 팽창야욕에 간섭하거나 제동을 걸 여력이 없었다. 그 틈에 일본은 중국 산동반도의 독일 조차지 청도(靑島)가 있는 유주만을 무혈 접수했다. 요동반도 관동주(關東州) 조차와 남만주철도 권익 기한 99년 연장 등 21개 조를 중국에 강요하여 자국의 이권을 확대했다. 유럽 면제품 대신 일본 면제품이 아시아 시장을 접수했다. 전시 수송수요가 폭증하여 일본의 해운업, 조선업이 호황을 누리며 세계 제3위의 해운국이 되었다. 철강, 화학, 전력 등 중화학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1914~1918)은 농업국 일본이 공업국으로, 만성 적자국이 흑자국으로 도약한 시기였다. 공장은 밤낮 돌아갔고, 돈이 넘쳤다.


  일본의 넘친 돈이 쌀 투기로 흘러갔다. 일본의 쌀값이 폭등했다. 주부들이 들고일어났다. 성난 주부들이 쌀집을 습격하고  불을 질렀다.. 이 미소동(米騷動)으로 일본 내각이 붕괴되었다. 일본 정부가 자국 쌀값을 진정시키기 위해 스즈키상점(鈴木商店) 등 유력 무역상사들에게 비밀리에 조선 쌀의 매점 반입을 지령했다. 일본 상사들이 부산, 군산, 인천 등 부두에 배를 대고 품군들을 대거 동원하여 조선 쌀을 실어대자 조선의 쌀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1년 전인 1917년까지만 해도 도정한 쌀(精米) 한 섬(石)당 14~15원(圓)하던 것이 그렇지 않아도 전시 인플레의 영향으로 23~24원으로 오르고 있긴 했었다. 그러나 완만한 상승이었다. 그러던 쌀값이 1918년 8월 일본의 조선 쌀 비밀 매점이 사작되자 갑자기 대폭 뛰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매일신보 지면에 생활고로 굶어 죽는 사람들, 관헌에 집단적 저항의 움직임 관련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굶어 죽었다는 기사는 지면마다 넘쳐났다. 쌀값은 그때로부터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불과 1년 전의 두배 가까운 최고 41원을 돌파한 것이 1919년 3월 초였다. 1919년 3월 1일 그날은 조선 민중의 생활고가 최악으로 치달았던 시점이었다. 


바로 그 시점, 즉 “조선인을 일본인과 똑같이 대한다”는 일시동인(一視同仁) 정책이 자국의 이익 앞에서는 언제든지 표변할 수 있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조선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 준 그 정점에서 3·1운동이 터졌다. 


만세시위는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현상의 하나는 전국적으로 광범하게 퍼져나간 수많은 만세시위에서 식민지 지배의 모순으로 주민들이 당하고 있었던 극심한 생활난이 독립만세의 외침 속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전혀 없지는 않지만, 나타나는 경우가 매우, 아주 매우 드물다는 것이 풀기 어려운 의문으로 되어 왔다. 충북 영동군 학산면의 만세시위는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이례적인 귀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4월 3일 학산면 시위 


양봉식(梁鳳植)은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 사람으로 38살의 농민이었다. 1919년 4월 3일 오후 4시부터 학산면 조산리 장터에서 200여 명이 모여 1차 만세시위가 있었다. 양봉식은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했다. 그날 오후 8시경.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각에 제2차 학산면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양봉식이 군중들을 이끌고 학산면 사무소로 몰려갔다. 면사무소 앞에 이르러 양봉식이 외쳤다. 


“나는 국민대표자 양봉식이요. 전라북도 군산에 사는 사람이요.”


군중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국민들은 좁쌀 살 돈도 없어 고생하는 이 어려운 판국에 값비싼 상묘(桑苗: 뽕나무 묘목)을 사라고 강요하고 있소. 우리에게 뽕나무 묘목 심을 뽕밭이 어디 있소? 차라리 묘목을 없애 버립시다!”

“옳소!” “옳소!“

“갑시다. 나를 따르시오!”


양봉식은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 구내 묘포장으로 갔다. 그곳에 주민들에게 매입을 강요하기 위해 심어 놓은 뽕나무 묘목 2만 8천 본이 있었다. 


“뽑아 버립시다!”


군중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뽕나무 묘목을 뽑아 사방으로 내던졌다. 


양봉식과 주도자들이 길바닥과 마당에 어지럽게 내동댕이친 묘목들을 보며 생각했다. 


‘묘목을 뽑아 던져버려 봤자, 내일 다시 주워 모아 마을 사람들에게 앵기고, 대금을 강요할 것이다.’

‘차라리 태어버리는 것이 낫겠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지휘부는 다시 외쳤다. 


“묘목을 주워 모아 불태워 버립시다! 내일 다시 주워 우리들에게 강제로 배포할 것입니다.”


모두들 나서 묘목을 주워 면사무소 앞 노상에 쌓았다. 불을 붙였다. 민중의 눈물이 될 뽕나무 묘목이 조선 민중의 신음과 고통, 울분과 함께 어둠 속에서 타올랐다.   

이렇게 영동군 학산면의 만세시위는 전국의 3·1운동 만세시위 가운데 당시 조선 민중이 처한 현실과 심정을 가장 잘 나타낸 시위로 언급된다. 


양봉식은 공주재판소에서 징역 5년 형을 받았다. 그는 본래 영동 사람이었는지, 군산 사람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공주재판정에서 “작년(1918) 음력 3월에 영동으로 이사왔는데 “그전 6, 7년간 군산에서 살았다”고 했다. 어떻든 그가 군산 사는 사람이라 했을 때 영동 사람들은 통 크게 그를 받아주었고, 환호했으며, 그를 따랐다. 그가 “조선 각지에서 독립을 외치는 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시국상황에 민감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독립의 기회를 기다려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치삼(金致三) 양봉식이 “2, 3일 전에 지내리 사는 양봉식이 계속 자기 마을에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협박했다”고 진술했다. 이를 보면 양봉식이 그 며칠 전부터 이날의 시위를 위해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학산면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사람은 징역 5년을 받은 양봉식 외에 학산면 봉산리 정해용(鄭海容, 이명 元日, 38세, 징역 1년 6월), 조산리 장터의 잡화상 이건양(李建陽, 27세, 징역 1년 6월), 아암리 농민 전만표(全萬杓, 이명 明國, 45세,징역 1년) 봉소리 이기영(李璣榮) 40세, 농업, 징역 1년 6월) 등이 있었다. 


4월 2·3일 매곡면 만세시위


  영동군 매곡면에서는 학산면보다 하루 전날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안준·신상희·김용선 등 21~23세 청년들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은 4월 2일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옥전리에서 3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는 다음 날인 4월 3일에도 이어졌다. 이날 오후 2시경 주도자 청년들은 매곡면민 약 2백 명과 함께 면사무소 부근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매곡면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갔다. 일동은 주재소 일인 순사 밑에서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고 있는 순사보 김영환(金令煥)을 구타하였다.


영동군에서는 4월 2일과 3일 이틀간에 학산면과 매곡면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있는 산곡간의 영동군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는 것과 함께 학산면 시위는 당시 식민지 조선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꼭 기억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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