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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2] 영원한 생의 반려 부부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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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동락하며 조국 위해 싸운 부창부수

  

둘이라서 더 강하고 아름다웠다


글 | 편집부


머나먼 이국땅에서 목숨 바쳐 독립전쟁을 치러야 했던 그 처절한 현장에서 부부는 말없이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남편이 전장에서 싸울 때 아내는 홀로 생계를 이어가며 자식들을 독립운동가로 훌륭히 키워냈다. 부상 당한 동지들을 간호하고 뒷바라지하는 일에도 아내는 지극정성을 다했다. 직접 총을 들기도 했다. 남편은 아내의 묵묵한 지원과 희생을 등에 업고 더 힘차게 싸웠다. 부부라는 인연의 끈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인했다.   


독립군 부부에서 광복군 가족으로  

오광선·정현숙 부부


  1913년 오광선과 정현숙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당시 두 사람 나이가 17세, 14세였다. 부친 오인수는 1905년 일제가 조선의 외교권과 군사권을 강탈하자, 용인과 죽산 일대에서 벌어진 의병활동에 참여해 8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게 되자, 1913년 출옥하자마자 결혼을 서둘렀다고 전해진다.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은 오광선은 신혼생활 중임에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상동 청년학원에 입학했다. 이곳은 상동교회와 함께 신민회 간부들의 비밀회합 장소로 활용되던 곳이었다. 그러나 일본 총독부에 의해 1915년 폐교조치 당하면서 오광선은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조선의 광복을 되찾겠다’는 뜻을 담아 오광선(吳光鮮)으로 이름을 바꿨다. 


  남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 제1대대 중대장을 비롯해 1920년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냈고, 1930년에 결성된 한국독립당의 의용군 중대장으로 활약했다. 1936년 북경에 파견되어 비밀공작대를 조직하고 일본 관동군 참모장 암살을 준비했다. 1937년 1월 일제에 피체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0년 11월 출옥 후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1945년 광복 후 귀국해 광복군 국내지대장을 지냈고, 한국군 육군대령으로 임관되어 준장으로 예편했다.


정현숙은 용인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1919년 육로를 한 달 동안이나 걸어 만주에 도착했다. 이후 남편을 만나 여러 차례 이사를 거듭해야 했고 마적단의 습격과 추위, 배고픔,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손수 나무를 잘라 화전을 일구며,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받은 품삯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갔다. 교관인 남편이 밤이건 새벽이건 부하들을 데려와 밥을 먹였기에 집안 식량은 매일 동이 났지만 불평 한마디 없이 독립군을 위해 헌신했다. 이 때문에 ‘만주의 어머니’로 불렸다. 1941년 한국혁명여성동맹원으로 활동했으며,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정부에서는 오광선에게 1962년 독립장을, 정현숙에게 1995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부부의 두 딸 오희영·오희옥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1939년 2월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담해 선전활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 광복군에 입대해 공작 활동을 했다. 오희영의 남편인 신송식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신송식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오희영·오희옥 자매는 1990년 나란히 애족장을 받았다.  


아버지와 부부, 딸 둘과 사위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펼쳐진 40여 년 동안의 항일독립운동 가족사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다. 


임시정부 재정과 안살림을 책임지다  

신건식·오건해 부부


  신건식은 1889년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 덕남사숙에서 공부하다 상경해 무관학교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12년 중국 저장성 성립 의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형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1년 국내에 밀파되어 정보수집과 군자금 등을 모집하면서 임시정부와의 연락을 취하다 일본경찰에 잡혀 복역했다. 1925년에 저장성 육군형무소의 군의관으로 봉직했다. 1937년부터 난징에서 광복진선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했고,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며 임시정부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1943년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었고 재정분야 전문가로 활동했다.


오건해는 1926년경 남편 신건식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해 임시정부의 안살림과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 데 정성을 다했다. 사위 박영준은 “독립운동가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았으며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바친 분”으로 회고했다. 1937년경에는 병약해진 이동녕의 병환 치료에 정성을 다했고,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특히 1938년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당한 백범 김구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소생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녀는 단지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만 그치지 않았다. 1940년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자 이에 참가했고, 1942년부터 한국독립당원으로 참가해 활동했다.


신건식·오건해 부부의 독립운동은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에게 이어졌다. 박영준과 신순호는 한국광복진선에 입대해 조국독립에 투신했다.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큰형 정식의 아들), 사돈 박찬익까지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이었으니 가히 독립운동 명문가라 할 만하다. 


정부는 신건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오건해에게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사위 박영준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딸 신순호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남녀평등 지향하며 독자적 활동  

김규식·김순애 부부


  김규식은 189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로녹 대학에서 공부하고,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를 받았다. 영어, 불어를 포함해 8개 언어를 구사했다고 한다.


김규식은 국내에서 강연을 통해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13년 상해로 망명해 한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한국 대표로 파견되었으며,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자격으로 한국독립에 대한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외교 선전활동을 펼쳤으며, 조소앙·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주석 김구와 함께 독립을 이끌었으며 1950년 납북되어 그해 서거했다.


김순애는 기독교 신앙을 배경으로 자랐고 집안에서 세운 소래학교에 입학해 신식교육을 받았다. 1909년 연동여자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평생의 반려자가 될 김규식과 만났다. 당시 김규식은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고, 같은 교회에 다니던 김필순(김순애의 셋째오빠)과 절친한 사이였다. 1906년 무렵 혼담이 오갔지만, 김순애가 결혼보다는 공부에 더 뜻을 두고 있어서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순애는 1909년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해 한국사 교육이 금지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그러다 105인 사건으로 김필순이 체포될 위기에 몰리자, 오빠를 뒤따라 1912년 중국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김필순은 이곳에서 병원을 열고 수입 대부분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이회영의 신흥강습소의 운영자금으로 제공했다. 김순애는 오빠의 연락책으로 김규식과 자주 접하면서 차츰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1919년 1월 결혼했다.


김순애와 김규식은 각자의 영역에서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순애는 1919년 7월 상해에서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으며, 간호사양성소를 설립해 독립전쟁을 지원했다. 또한 독립군자금을 모금하며 일본 정부대신 및 친일 한국인을 처단할 목적으로 대의용단을 조직했다. 1934년에는 상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간부로 활약했으며, 1943년에는 충칭에 있는 각계 각파 부인 50여 명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재건대회를 개최해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11월 고국으로 돌아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했다. 


정부는 1989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김순애에게 1977년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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