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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0/05] 창원 삼진면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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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100회를 향하여 

 

‘3월의 전설201410월 월간 순국5년 후의 31운동 100주년을 생각하며 60회를 예정하고 기획한 것이었습니다. 20201월에 60회 연재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은 자료상 드러나는 것만 2,600여건이나 되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2월까지 61회가 되었는데 이는 겨우 2%남짓 다룬 것입니다. 31운동이 너무 광범하여 지난 100년 동안 거의 언제나 대표적인 몇 군데만 언급되고 지나갔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어느 지역 어떤 형태의 시도에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긴장과 순국의 각오가 서려 있습니다. 이에 월간 순국지는 지면을 일신하고 필자와 협의하여 일단 100회를 목표로 힘닫는 데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각처 31운동의 발굴과 연재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일로써 이보다 더 필요하고 중한 일이 있을까요?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기대합니다.

 

창원 삼진면 만세시위

삼진면민이 보여준 높은 애국심과 불굴의 투지

우리 동포여,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

 

글  이정은(3. 1운동기념사업회장)

 

삼진면은 경상남도 창원군(현 창원시) 서부의 진전, 진북, 진동 3개 면이다. 삼진면 만세시위가 독특한 점은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의 압박 속에서 거의 존립할 수 없었던 국내 독립운동의 비밀 조직이 살아남아 3.1운동으로 연결되는 매우 드문 경우 중 하나라는 점이다. 그 주역은 31운동 때 꼭 30세였던 변상태(卞相泰)였다. 그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 사람인데, 자그마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축지법을 쓴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로 다부진 사람이었다.

190516살 때 나라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기우는 을사조약을 당하자, 그는 권총을 구하여 행동에 뛰어들었다. 1910년 부산상업학교 3학년 때 병합조약으로 나라가 망했다. 수천년 민족사가 단절되는 망국의 소식을 듣자 친구 6명과 대봉회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구국운동을 결의했다. 19151월 경북 달성군의 안일암에서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었을 때 그도 그 자리에 참석하여 가입했던 것은 불의와 굴욕에 참지 못하는 그의 성정을 보여 준다.

1917년 윤상태(尹相泰) 등이 대동청년단을 조직했을 때도 그는 이 비밀독립운동 단체의 모험부장이 되었다. 이런 단체들은 계엄치하 같은 살벌한 시대에 거의 살아남아 있을 수 없었던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그런 단체의 조직원으로서 변상태는 서부경남에 만세시위를 전파하고 조직하여 앞장섬으로서 1910년대 독립운동과 31운동이 하나의 맥락으로 이어지게 했다.

 

328일 진동면 고현장 시위

 

19192월 하순 변상태는 서울의 동지로부터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부랴부랴 서울로 간 그는 경남 서부지역 만세시위 책임을 맡았다. 그는 31일의 서울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함안, 고성, 창원 삼진 지역 동지들을 불러 거사를 결의했다. 이때 모인 동지는 함안군의 이희석, 조태식, 이경형, 고성군의 황태익, 창원군 진전면의 이수룡, 권태용, 권영조, 권영대, 변상섭, 변상헌 등이었다.

삼진면 동지들과는 328일 고현 장날로 첫 거사일을 정했다. 큰 집안의 재실에 숨어 태극기를 만들고, “우리 동포여,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曰我同胞 有進無退(왈아동포 유진무퇴)”를 판각하여 목판 인쇄로 격문을 찍었으며, 독립선언서도 대량 필사하여 준비했다. 진동 주변지역 시위 움직임을 탐지한 지농 헌병주재소는 325일 마산 중포병대의 지원을 요청하여 비상경계에 들어갔다.

1919328일 오후 고현장터에 5~600명의 장꾼이 모였다. 독립선언서와 격문이 배포되고, 권영대가 나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이 호응하여 독립만세가 노한 파도처럼 메아리쳤다. 시위대가 해안가 길을 따라 진동에 도착할 무렵 출동한 중포병대와 진동주재소 헌병의 저지로 11명이 체포되고 군중은 해산되었다.

 

43일 삼진면 만세시위

 

독립의 횃불을 들 때가 왔다

몸을 피한 변상태와 권영대, 권태용, 변상헌 등은 다시 6일 후, 음력으로 3월 삼짇날인 43일을 제2의 거사날로 정했다. 이들은 밤을 이용하여 진동을 중심으로 진북, 전전 각 동리 구장들에게 독립 제2회의 건이라는 문서를 돌리며 주민 동원을 당부했다. 변상태는 진전면 양촌리 토지 개간장에서 일하던 70~80명의 주민들에게 가서, “독립의 횃불을 들 때가 왔다!”며 참여를 호소했다. 일암리 초계 변씨 재실인 성구사와 회동의 안동 권씨 재실인 회계재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당일 아침, “점심을 지참하여 한 집에 한 명 이상 나올 것. 참가하지 않는 집은 가옥을 부수어버릴 것이다.”고 하며 주민들을 동원했다. 진전면에서는 진동 주재소와는 20~30리 떨어져 있었고, 오서리의 안동 권씨, 밀양 박씨, 일암 양촌의 초계 변씨, 곡안의 성주 이씨 등의 대성과 그 외에 안동 김씨, 남평 문씨, 김해 김씨 등의 집성촌이 있어서 집안 어른들의 묵인 아래 일사불란하게 동원하는 일이 가능했다.

참여하는 마을 사람들 수에 따라 20인장(), 10인장을 세우고 이마에 삼베 수건을 두르게 하여 조직화했다. 목판에 새겨 대량으로 찍은 曰我同胞 有進無退”(우리 동포여, 전진만 있을 뿐 후퇴는 없다)는 격문과, 독립선언서도 1,000매를 필사하여 준비했다.

191943일 거사날이 밝았다. 진전면 일암리와 회리 등 안골의 집결지는 양촌리 냇가였다. 아침 9시 되기 전에 냇가에 긴 장대 끝에 매단 대형 태극기가 휘날렸다. 각 마을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오전 9시경에 이미 2천여 명이 되었다.

변상태가 외쳤다.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 민족이며, 자유국의 국민이다.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2천의 군중이 골짜기를 뒤흔들며 독립만세를 연창했다. 시위대가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 읍내를 향해 임곡 삼거리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변상태는 이수룡에게 말했다.

가자, 우리는 진양군 문산으로!”

 

서부 경남에서의 또 다른 만세시위

변상태는 서부 경남 또 다른 만세시위를 준비해야 했다. 일암리에서 양촌리에 집결하여 진동까지는 30(12km) 길이었다. 연도의 마을 마을에서 사람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속속 합류했다. 부녀자들은 막걸리나 물동이를 내놓고 목을 축이게 하며 응원하였다. 오후 2시쯤 진전면 시위대가 진동 초입의 사동교라는 다리 앞에 도달했을 때 군중은 7천 명에 달했다. 사동교 건너편에는 진동 주재소 헌병과 보조원 8, 재향군인 30여명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다.

그보다 두어 시간 전 정오경, 진북면 시위대는 3월 삼짇날 민속놀이를 가장하여 남쪽의 진동으로 오는 20리 길을 걸어 무사히 진동 읍내로 들어와 진동읍내 시위대와 합류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 장터를 돌면서 진전 시위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시위대가 진동읍내에서 맘껏 활개 칠 수 있었던 것은 주재소 헌병들과 지원병력 전원이 진전 시위대 방어에 출동하여 없었고, 진동에 많이 살고 있던 일인들도 문을 걸어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어서 진동 읍내가 무주공산이 되었던 까닭이었다.

사동교에서 일본군에 막혀 있던 진전면 7천 시위대는 마냥 대치하고 있을 수 없었다. 진동 읍내의 진동, 진북 시위대와 만나야 했다. 힘이 장사인 김수동이 나섰다. 그는 태극기를 한 손에 들고 다리 위를 질주하여 막아서는 일본 병사의 목덜미를 잡아 다리 아래로 내던졌다. 그러자 일군의 총구에서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가 폭 쓰러졌다.

변갑섭이 뒤이어 달려 나가 김수동이 떨어뜨린 태극기를 주워들고 헌병 오장(伍長) 가와카미 세이타로(川上淸太郞)를 향해 달려가 머리를 내리쳤다. 가와카미는 칼을 뽑아 태극기를 든 변갑섭의 오른쪽 어께를 내리쳤다. 변갑섭은 왼손으로 태극기를 주워들고 다시 헌병 오장에게 달려들었다. 헌병 오장은 변갑섭의 왼팔도 내리쳤다. 변갑섭은 피를 뿜으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시위대는 투석으로 맞섰다. 총격과 투석의 대전이 벌어졌으나 총칼로 무장한 일군의 총력 저지를 뚫을 수 없었다.


31운동의 전설적 투쟁, 삼진면 만세시위

사동교의 격전은 동산리 김수동과 양촌리 변갑섭 외에도 일암리 변상복, 고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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