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1/03] 도산 안창호의 삶과 민족부흥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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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양성이 곧 조국독립의 길
구국 위해 ‘선비’를 일으키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살아가면서 기울어져가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하였는데, 그의 60년 삶이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맥을 같이하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산은 1878년(고종 15년) 11월 9일(음력 10월 6일) 평안남도 강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이 무렵은 미국·영국·청국·러시아·프랑스 등 세계열강들이 개항(開港)을 요구하면서 우리의 조정을 옥죄어왔다. 이보다 앞서 일본은 1876년(고종 13년)에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고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우리나라에 침투시키고 있어서, 나라의 정세가 몹시 암울하였다. 그리고 1882년(고종 19년)의 임오군란(壬午軍亂)과 1884년(고종 21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인하여 청(淸)·일(日) 양국간의 조선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 격화되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1894년(고종 31년)에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가 일어나 정국(政局)을 어수선하게 하였다. 이처럼 어수선한 때에 우리나라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본군을 지휘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참살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로써 반일감정이 격화되어 전국에 항일의병(抗日義兵)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그런데 국왕이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왕궁을 떠나 외국의 공사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국가의 자주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이에 따라, 1897년(고종 34년) 2월 20일 러시아 군사고문단의 궁궐 경비를 보장받고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환궁 후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0월 12일 황제(皇帝)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사정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도산은 이러한 절박한 때에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박은식(朴殷植)·이승훈(李昇薰)·노백린(盧伯麟)·이동녕(李東寧)·이승만(李承晩)·이갑(李甲)·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면서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가 1897년이었다. 도산은 독립협회 관서지부(關西支部) 주최로 평양에 있는 쾌재정(快哉亭)의 연설회에서 수백 명의 청중 앞에서 조정의 외세의존정책과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명연설을 펼쳤으며, 그 이듬해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 참석하여 국정개혁안을 채택하는 데 일조하였다. 동포 간 협동심 키우며 구국사업 첫발을 내딛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동포들 사이에 신뢰를 쌓고 협동심을 키워주는 일이었다. 1903년(고종 40년) 8월 20일, 이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친목회’를 발족하였다. 그리고 도산은 이 조직을 통해서 동포들 사이의 협동심을 키워나가면서, 그들의 일자리도 알선하였다. 그리고 이 친목회는 뒷날 ‘공립협회(共立協會)’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또 ‘흥사단(興士團)’으로 발전해가는 기초가 되었다. 도산이 미국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나라의 사정은 점점 더 암울해져가고 있었다. 1905년(고종 42년) 11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우리의 외교권이 일본에 빼앗기고, 나라가 있으나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에 일본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이 노골화되었다. 나라의 사정은 참으로 암울하였다. 이러한 때에 도산은 일시 귀국하여 민족지도자들과 손을 맞잡고 국권회복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때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주필 양기탁(梁起鐸)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밀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이회영(李會榮)·전덕기(全德基)·주진수(朱鎭洙)·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김구(金九)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설립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신민회는 ‘새로운 국민·새로운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꿈을 잉태하고 출발하였다. 이를 위하여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심어주고, 항일(抗日)의 선두에서 투쟁할 독립군(獨立軍)을 양성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신민회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첫 단계로 전국에 학교를 세웠다.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평양(平壤)의 대성학교(大成學校), 서울의 협성학교(協成學校), 안악(安岳)의 양산학교(楊山學校) 등이었다. 또 신민회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하여 만주 류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뒷날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이때가 1911년 6월 11일이었다. 여기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전하여 일본 정규군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민족부흥·실력양성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흥사단 창단 그리고 도산은 흥사단 창단 후 단우의 입단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흥사단의 운명이 곧 우리 민족의 운명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처럼 도산은 흥사단이 실력을 양성·강화하는 것이 곧 조국의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흥사단은 도산의 필생의 사업이요, 민족운동의 근본이었다. 108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그 고귀한 민족혼(民族魂)과 애국혼(愛國魂)은 우리 후세들에게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