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항쟁사 [2021/03]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 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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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도(空島)정책과 해양 문화의 몰락
선조들 누렸던 바다의 영광 되찾아야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우리 민속에 뿌리내린 ‘공수(恐水) 심리’ 첫째로는 왜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역사에서 이웃 나라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신의 저주와 같은 악연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한일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왜구는 일찍이 신라 시대 초엽부터 나타난다. 왜구란 일본의 준(準)국가적 해적 집단이었다. 섬나라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폐쇄공포증과 자원 결핍 그리고 그에 따른 공격성은 국가의 묵인 아래 조선과 중국 연안의 우환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까운 사람끼리 서운함이 더 많은” 인간의 원죄 때문에 한일 관계는 화목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에 들어오면 왜구의 문제는 적극적 대처보다는 차라리 해안과 도서에서 주민을 소개(疏開)시키는 이른바 공도(空島)정책으로 바뀌게 된다. 이를테면 단종(端宗) 시대의 병조판서 조극관(趙克寬)의 상소에, “섬과 연안 주민을 육지로 옮겨 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해양 정신의 몰락을 가속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단순히 실질적 정책에 머무르지 않고 개척과 진취의 포기라는 점에서 비극적 해양사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둘째로는 탈주/모반 또는 외세와의 연통(聯通)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정권이 불안한 중앙집권의 체제에서는 병졸들이 주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으므로 변방 세력의 반란에 대응하는 속도나 효과가 뒤떨어지며, 따라서 모반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전함의 축소나 제조 금지로 나타났다. 선박의 구조에도 문제가 있었다. 곧 연안 선박 이외에는 대양에 나갈 수 있는 함선의 축조도 법으로 금지되었다. 먼바다에 나가려면 바닥이 각(角)을 이루는 첨저선(尖底船)을 만들어야 파도로 말미암은 기울음으로부터 복원(復元)이 빠르고 속도를 낼 수 있는 법인데 모든 배는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平底船)을 만들어 대양 진출을 금지했다. 따라서 연안의 배조차도 선미에 달린 노로써 저었다. 여러 사람에 의한 측면 노(櫓)는 군선(軍船)에 대해서만 지극히 제한적으로 허락했다. 섬이나 해안에서의 반란에 대하여 정부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었던가의 문제는 1901년에 제주도에서 이재수(李在守)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프랑스함대에게 이의 진압을 의뢰하고 외국인 고문까지 파견하여 초기 진압에 힘을 기울인 사실이나, 제주 4·3사건 당시 미군정은 육지 병력 1,600명을 투입하여 초토화작전을 수행한 사실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하멜 일행에게 서양기술을 배우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갑자기 서구에 대한 기피감(xenophobia)을 보인 것은 중국의 비극적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 그와 같은 계기로 형성된 쇄국의 일환으로 조선의 국왕이 실시한 정책이 곧 금의 채광을 법으로 금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용어로 보석상을 “금방”이라 부르지 않고 1960년대까지도 “은방”(銀房)이라고 불렀던 것도 금을 은닉하려던 쇄국 정책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한 예로서 1816년 9월에 서해안 비인(庇仁) 현감 이승열(李升烈)이 영국의 항해사 홀(Basil Hall)을 만났을 때 이승열은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며칠을 보냈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처형된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괴로워했다는 기록은 흥미롭다. 우리와 똑같이 난파 선원을 받아들인 일본은 난파 선원들로부터 조총의 기술은 물론 조선술과 항해술을 배워 이른바 난학(蘭學: Dutch Science)이라는 독특한 학문 체계를 완성했고 이것이 조선 침략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넷째로는, 뱃사람에 대한 비하 때문이었다. 유교 문화가 남긴 가장 아픈 상처는 계급 질서였다. 그들이 아무리 인의와 애민을 주장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계급적 교류를 허락하지 않았고, “칸막이의 문화”를 해체할 의지가 추호도 없었다. 해양 유산과 관련하여 신분 질서가 문제 되는 것은 수군(水軍)이나 운조(運漕)처럼 물에 관계된 직업을 천민으로 분류했다는 사실이었다. 조선조의 천민은 칠반(七班)이라 하는데, 관아의 조예(皁隷: 노비), 나장(羅將), 지방청의 일수(日守: 잡부), 조운창(漕運倉)의 사공(漕軍), 수영(水營)의 수군, 봉군(烽軍), 역졸(驛卒) 일곱 가지를 뜻한다. 이들에 대한 정의는 속대전(續大典) 병전(兵典) 면역(免役) 조에 법률로써 명기되어 있다. 곧 천인의 대부분이 해상 운수와 관련이 있었다. 일단 천민으로 분류된 그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나 토지소유권도 없었고 피혼(避婚)의 대상으로 굳어져 갔다. 전근대의 우리 사회에서는 뱃사람은 “뱃놈”이라고 불렀고, 섬사람은 “섬놈”이라고 불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 여천(麗川)에서 대한민국당으로 출마한 황병규(黃炳珪) 후보의 선거 구호는 “섬놈은 사람도 아니냐?”였다. 그리고 그는 당선되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정조(正祖)가 재위 19년(1795)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를 참배하고자 행차할 때의 일이었다. 이때 그는 당연히 한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는데 배를 타지 않고 다리[舟橋]를 건너 왕복했다는 사실이다. 백성의 노고를 그리 걱정했던 그가 왜 배를 타지 않고, 수많은 사공과 공장(工匠)과 역군(役軍)을 동원하여 지금의 용산에서 노량진까지 다리를 놓는 고역을 강요했을까? 정조는 금상(今上)의 몸으로서 “천한 뱃놈”이 노를 젓는 배를 사공과 함께 타기보다는 다리를 건너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정조의 뜻이었든, 아니면 조신(朝臣)의 뜻이었든, 그 무렵 수군이나 사공을 비하하던 풍조의 가장 확실한 세태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왜 조선조의 통치자들은 뱃사람을 천시했을까? 인성으로 볼 때 바닷사람들은 거친 대양과 싸우는 동안 인성이 굳세고 끈질기다. 따라서 이들 사이에는 정치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 정치적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심이 강하며 체력적으로도 강인하다. 역사적으로 해양국가의 민중이 민주적이고 농경문화 민족이 과두지배 체제에 더 익숙하다. 바닷사람이 더 민주적이라는 지적이 인상적이다. 그러므로 지배 계급으로서는 거칠고 순종하지 않는 기질의 바닷사람들을 싫어하고 버겁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알게 모르게 뱃사람을 기피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했다. 요컨대 민족 멸망의 일차적인 원인은 군사력의 열세에 있으며, 19세기 후반으로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최소한 해상권만 있었더라도 조선이 멸망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결국 바다를 잃어 나라를 잃었다. 우리가 군사력,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제해권의 강화를 소홀히 한다면 지난날 우리의 조상들이 겪었던 국가 멸망의 쓰라림이 우리의 시대에 재연되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바다로 눈을 돌려 선조들이 누렸던 바다의 영광을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바로 생존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