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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3]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 무장투쟁의 선봉 여성 항일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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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과 폭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든 용감한 여인들  

나라 구하는 데는 남녀 구별이 없다


글 | 편집부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이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대우받지 못하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항일독립투쟁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 여성 투사들은 총과 폭탄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었고 누구보다 용맹하게 싸웠다. 남자현은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왼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고, 안경신은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평남경찰국·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사형선고를 받았다. 자녀양육, 시부모 봉양, 남편 내조에 가족 생계까지 책임져야 했으며 애국투사들 병간호와 뒷바라지도 묵묵히 해냈던 여성 투사들, 그들이야말로 조국독립을 이끈 진정한 영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의병 지도자, 윤희순


  윤희순(1860~1935)은 을미의병부터 정미의병까지 참여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의병 지도자였으며 국내 의병활동 15년, 국외 독립활동 25년 등 40여 년간 민족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였다.


1895년 을미의병이 확산되자 윤희순은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격문을 일본군 대장에게 보내 경고했다. “…민비를 살해하고도 너희놈들이 살아서 가기를 바랄쏘냐. 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계기로 윤희순은 의병활동 뒷바라지를 시작했고, 의병가사와 경고문 등을 지어 일반인과 여성에게 독립의지를 각인시켰다.  


고종 퇴위와 군대해산 등으로 국권상실 위기에 처하자 윤희순은 ‘안사람의병단’을 조직했다. 안사람의병단은 강원 춘천지역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무기 및 탄약 제조·공급, 군수품 전달, 의병 연락 활동,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 군사훈련에도 참여했다. 이후 일본 식민지가 현실화되자 의병 가족들과 만주로 이주해 항일 근거지를 개척하고 ‘노학당’을 건립해 항일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윤희순은 노학당의 폐교 이후 애국계몽운동에서 무장투쟁운동으로 선회했다. 만주와 연해주, 간도 지역 일대에 흩어진 의병운동가 후손과 문인들을 규합해 ‘조선독립단’을 조직, 무장투쟁 활동을 펼쳤다. 또한 중국인과 한중연합 투쟁활동에 주력해 항일 연합투쟁에 참여했다. 윤희순은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에게도 의병가사를 보급하며 한중연합 투쟁의 필요성을 연설했다.


또한 20여 명의 친인척으로 구성된 ‘가족 부대’를 결성했다. 지도자가 먼저 모범이 되어야 한다면서 백발을 휘날리며 군사훈련에 참가했으며 통신연락, 모금활동, 정보수집, 군사훈련 등을 감행했다. 한평생 조국독립의 염원을 가슴에 품고 살았던 윤희순은 1935년 75세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후손에게 당부하는 『일생록』을 남겼다. 정부는 1983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손가락 잘라 쓴 혈서로 일제 만행 고발, 남자현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며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생활로 사경에 이르자 남자현은 독자(獨子) 영달에게 중국 화폐 248원을 주며 말했다. 유언에 따라 1946년 3·1절 기념식 때 독립축하금은 백범 김구와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총과 폭탄을 들고 용감하게 적진으로 뛰어들었던 남자현(1872~1933)은 영화 ‘암살’에서 안옥윤 역의 모티브가 되었던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872년 경북 안동에서 영남의 석학인 부친 남정한의 삼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7세 때에 국문에 능통했고 소학과 대학을 통달했을 정도로 총명했다. 19세에 결혼한 그는 남편 김영주가 영양의병장 김도현 의진에서 전사하자 복수심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복자 성삼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했다. 당시 46세였다.

남자현은 서로군정서에 가입해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시작했다. 한편 북만주 일대에 12개의 교회를 건립했으며,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 계몽운동에 힘썼다.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주살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했으나 실패했다. 1927년 나석주 의사 추도회 겸 강연회에서 일제가 안창호·김동삼 등 300여 명을 체포하자, 남자현은 투옥 중인 애국지사들을 정성껏 옥바라지를 했다. 1931년 9월에는 투옥된 김동삼에게 아무도 접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김동삼의 친척으로 위장해 연락책 역할을 거뜬히 해냈다. 


무엇보다 1932년 9월 국제연맹조사단이 일제의 침략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만행을 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하기 위해 왼손 넷째 손가락 2절을 잘라 ‘조선독립원(조선은 독립을 원한다)’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조사단에 전달하기도 했다. 때문에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기도 한다.


1933년 주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무등신의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2월 29일 거지로 변장, 권총 1정과 탄환, 폭탄 등을 몸에 숨기고 하얼빈으로 떠났으나 미행하던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생활 끝에 죽기로 결심하고 15일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억울하게 보석으로 석방된 남자현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3년 6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임신한 몸으로 폭탄거사 단행, 안경신


  안경신(1888~?)은 1919년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개월간 구류를 살았다. 이 일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19년 11월 감리교 여성 신자로서 오신도, 안정석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여기서 그는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보내는 평양본부의 교통부원 겸 강서지회 재무를 담당해 활약했다. 


1920년 10월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안경신은 상해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으로 피신했다. 그는 대한광복군총영에 가담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광복군총영은 적의 통치기관 건축물 파괴, 적괴·창귀(倀鬼) 암살, 적의 행정기관의 문란 등을 목적으로 하는 임시정부 군사기관이었다. 


안경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동지들과 만나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이다”라는 포부를 밝히곤 했다. 


광복군총영에서는 미국의원시찰단 일행이 한반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항일투쟁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제적 여론을 환기하자는 목적으로 서울, 평양, 신의주 세 도시에서 폭탄 거사를 단행하기로 계획했다.


1920년 8월 당시 임신 상태였던 안경신은 제2대에 참가해 장덕진·박태열 등과 함께 상해를 출발해서 평양에 도착했다. 제2대는 3개 조로 나뉘어 8월 3일 평남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던져 성공시켰고, 평양시청과 평양경찰서에도 투탄했으나 도화선이 비에 젖어 불발되고 말았다. 그 후 피신해 함경남도 이원군에 숨었으나, 1921년 3월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과 악형 끝에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공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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