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1/04] 만주 독립운동의 거성, 만주벌 호랑이 일송 김동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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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단체들 하나로 묶어내는 데 전념
모두에게 존경받은 ‘통합의 화신’
글 | 편집부
김동삼 선생은 1878년 6월 23일 경북 안동시 임하면 천전동 278번지에서 김계락(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긍식(肯植)이고, 종식(宗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자는 한경(漢卿)이며, 호는 일송(一松)이다. 동삼(東三)이라는 이름은 선생이 만주로 망명한 뒤에 중국 동북3성을 뜻하여 사용한 것이다. 선생은 족숙인 퇴계학맥의 적정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다. 서산 김흥락은 1895년 12월 을미의병 당시 안동의병을 일으키는 논의를 주도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사실상 전기 의병에서 영남지역 최고 인물을 스승으로 삼았으니, 선생도 청소년 시기에 이미 민족문제에 대해 깊게 생각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다가 20대 중반 나이가 된 1905년을 전후하여 서울을 드나들며 한말 구국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1907년에 안동에서 신식학교를 수립하고 교사로 나선 점이 그런 추정을 가능하게 만든다. 협동학교는 영남사회가 변하는 교두보이자, 새로운 깃발이었다. 그래서 당시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은 협동학교 설립과 발전상을 보도하면서 그 역할에 대하여 격려하고 기대감을 표시하였다. 전통유림들의 압력과 예천의병의 공격으로 교사들이 폭살당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협동학교는 신지식인, 젊은 지성을 육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양성된 인물들이 경북지역 곳곳으로 계몽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그런 학교였으므로 어려움을 겪을 때 서울의 신문에서 격려하는 글을 게재하였고, 신민회에서는 교사들을 파견해 주었던 것이다. 선생은 협동학교 경영의 일선에 나서는 한편, 비밀결사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신민회와 동지적 결속관계를 가지며 협동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서상일과 안희제 등을 중심으로 영남지역에서 조직된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경북과 경남 전체 계몽 운동가를 묶어 나갔다. 이 사실은 당시 그가 서울과 대구, 그리고 안동을 잇는 큰 틀에서 활약하였고, 계몽운동 노선 가운데서도 진취적이고 강성을 지닌 비밀결사체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겉으로는 협동학교라는 공개된 공간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갈 새로운 지성을 키워내고,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으로 방향을 가늠하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 8월에 나라가 망하자,선생을 비롯한 신민회원들은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키운 뒤에 국내진공을 감행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갈 수는 없었다. 가족들을 포함하여 대규모로 망명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1910년 후반에 집안 형님 김만식과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군 기지 건설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조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본래 선생의 족숙 백하 김대락은 계몽운동으로 전환한 선생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1908년까지 그는 협동학교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아래 처남인 석주 이상룡이 의병항쟁에 전심하다가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출범시키자, 그도 계몽운동으로 전환하였다. 무장항쟁 노선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무장항쟁을 계몽운동에 접목시켜 나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집을 협동학교에 내놓았고, 당시 황성신문에는 그를 높이 평가한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선생과 김대락, 그리고 이상룡은 족질 관계나 사돈 관계를 넘어 동지가 된 것이다. 선생은 같은 마을 출신이자 족숙인 백하 김대락에게 논의를 구하였다. 이 논의의 결과 만주 망명 계획이 수립되고, 결국 191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사이에 대거 안동을 출발한 것이다. 집과 전답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만든 다음, 안동에서 추풍령까지 걸어가고, 거기에서 기차를 이용하였다. 신의주에서는 걸어서 압록강을 건너고,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망명길이었다. 그런 길을 선생은 가문을 이끌고 갔던 것이다. 이들의 망명은 대단위로 이루어졌다. 내앞마을 의성김씨 문중과 안동시 임청각에 자리잡은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에서 150여 명이 선두로 그 외 여러 문중이 만주로 향했다. 또 이들과 혼맥을 가진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영양주실 마을의 한양 조씨, 상주의 진주 강씨 문중 등이 대규모로 참가하였다. 즉, 한두 사람의 망명이 아니라 문중 단위, 그것도 학맥과 혼맥으로 얽힌 큰 집단의 이주가 이루어진 것이다. 남만주에 백서농장 건립 독립군 기지 건설로 군대 조직 선생은 1914년에 백서농장을 건립하고, 그 장주가 되었다. 이는 농업 생산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활동이 아니었다.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의 노동야학 졸업생 등 385명을 인솔하고,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속에 들어가 군대를 창설한 것이다. 백두산 서쪽 깊은 산속에 자리 잡았다고 ‘백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군대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농장’이라고 위장했지만, 사실상 이것은 군사병영이었다. 사방 200리가 되는 광활한 백서농장은 망명 이후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군대를 조직하는 데 힘을 쏟은 첫 결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대한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9인 청산리전투 주역으로 활약 당시 서간도에는 세 가지 조직이 결정되어 독립운동 전선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하나는 종래의 부민단을 한족회로, 다른 하나는 백서농장 군영을 서로군정서로, 또 다른 하나는 고산자에 있는 신흥중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각각 개편한 것이다. 먼저 한족회를 살펴보면, 한족회는 부민단의 유하·통화·흥경현 대표들이 1919년 4월 삼원포에 모여 결성한 것이다. 한족회는 곧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이 인적 자원을 서로군정서로 발전시켰다. 이에 따라 한족회는 민정과 군정 이원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백서농장을 해체하고 삼원포로 귀환한 선생은 한족회에서 서무사장을 맡았다. 바로 이어서 서로군정서 참모장에 취임하였고, 한족회 서무사장 자리를 같은 마을 출신이자 집안 조카인 김성로에게 인계했다. 또 학무사장은 김대락의 아들이자 집안 형인 김형식이 맡았다. 백서농장 장주를 거치면서 선생은 독립운동계의 거성으로 자리잡아 갔던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서로군정서는 당초 정부조직으로 추진되었다. 이미 「대한독립선언서」를 통해 ‘대한독립’을 선언했으니, 그렇다면 당연히 독립된 국가 수립이 뒤따라야 했다. 그래서 정부조직에 나섰지만, 4월 11일에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고서 정부 외곽 조직으로 위상을 정리하고, 이상룡이 최고 책임자인 독판을 맡았다. 한족회가 민정기관이라면, 서로군정서는 군정기관인 셈이다. 선생은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아 독립군 조직을 움직여 나갔다. 1919년 말경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이 요청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관 이장녕 외 150명을 파견하여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생도 298명을 속성으로 양성토록 하여 청산리전투의 주역이 되었으며,1920년 여름부터 일본군 침략이 간헐적으로 자행될 때, 그는 서로군정서 본대 의용군 400여 명을 사령관 김창환으로 하여금 길림성 교하시 액목현으로 이동시켰다. 7월 29일에는 신흥무관학교생도(교도대) 300여 명을 교도대장 지청천이 안도현 내두산촌 삼인방을 지키도록 하는 한편, 8월에는 왕청현 서대파 북로군정서본부를 방문하여 작전(백두산 내두산촌 삼인방 집결)을 논의하기도 했다. 청산리전투는 이곳 백두산 내두산촌 삼인방에 집결코자 이동 중 일본군과 마주쳐 군사력의 열세와 주민들의 안전을 위해 청산리계곡으로 들어가 매복 작전으로 대승을 한 전투이다. 신흥무관학교 교도대가 청산리전투를 치른 후 북상하여, 밀산에서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10여 개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러시아 자유시로 넘어갈 때, 선생은 서간도에 남아 독립전선을 재정비하였다. 북상한 부대와 달리 서간도에서도 다시 군사력을 기르고, 조직을 정비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인사회 다시 일으켜 세우고 분산된 독립군 조직 통합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일본군의 보복공세로 말미암아 서간도나 북간도 지역 한인사회는 모두 처참한 참변을 겪었다. 1920년에 벌어진 경신참변은 선생 가족에게도 그대로 밀어 닥쳤다. 일본군이 삼원포 삼광학교 교장으로 활약하던 동생 김동만을 살해한 것이다. 그에 앞서 청산리대첩 와중에 같은 마을 출신이자 집안 조카인 김성로(김규식의 아들)가 전사하는 비극도 맞았다. 선생은 월송 김형식과 논의하여 집안 인사들을 급히 북만주 영안현 주가둔(현재 연안현 강남조선족·만주족 공동자치향)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내앞마을 사람들이 서간도 시절을 마무리하고 북간도 시대를 열게 되었다. 한편 선생은 김정식·김창로·김성로에게 군자금 모집을 명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은 유하현과 흥경현(지금의 신빈현) 일대로 옮겨 활동했다. 선생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는 경신참변으로 붕괴된 한인동포사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 분산된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22년 6월에 한인사회와 독립군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여 합의를 도출했으니, 그 결실이 바로 8단, 9회, 총 17개 단체로 결성된 통군부였다. 이후 8월 30일 전만 한족통일회가 결성되고, 이 무렵 통군부는 통의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여기에서 통군부 교육부장이던 선생이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청산리대첩 이후에 경신참변과 자유시참변(흑하사변)을 거친 뒤, 만주지역 군사세력을 통합하려던 그의 노력이 진척을 이루어 만주지역 무장독립단체의 최고지휘자가 된 사실을 말해준다. 1921년 초부터 임시정부의 조직개편을 비롯한 다방면의 문제 해결을 위한 국민대표회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2년 동안 준비과정을 거쳐 1923년 1월부터 5월 15일 사이에 중국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렸다. 국내를 비롯하여 상해·만주(간도)일대·북경·노령(연해주)·미주 등지에서 120여 개의 단체, 단체대표 400명 정도가 상해에 집결했고, 그 가운데 의결권을 가진 대표가 130명을 넘는 규모였다. 이 회의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많은 대표가 집결하고,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또 민주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 대표자 총회였다. 1921년 이후 침체현상을 보이던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임시정부 쇄신방안을 찾던 이 회의에서 선생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에 선출되었다. 안창호와 윤해가 부의장이었고, 선생이 의장에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독립운동계에서 갖는 그의 위상을 확인시켜 주고도 남는다. 군사력 통합해 정의부 탄생 민족유일당 결성 위해 노력 만주로 돌아온 1923년 가을, 그에게 주어진 일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를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독립군 단체들이 지리멸렬하여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경군사통일회의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결실을 이루지 못하자, 이상룡과 양기탁이 다시 군사력 통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상해에서 돌아온 선생은 이들의 역할을 인수하여 1924년 7월 10일과 10월 18일에 10개 단체대표를 모아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열었다. 거기에서 선생은 의장에 선임되어, 동년 11월 24일 정의부를 탄생시키는 데 주역을 맡았다. 참의부·신민부와 함께 만주지역 3대 조직의 하나가 된 정의부를 설립한 것이다. 그리하여 1925년에는 만주지역 한인사회는 민정과 군정 기능을 갖춘 3부로 정립되고, 독립군 양성과 무장력 향상, 투쟁 강도 강화 등을 도모해 나갔다. 선생은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6년, 안동에서 함께 망명해 온 이상룡이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은 국무령에 취임하자마자 선생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이상룡의 권유를 듣지 않고 만주에 남았다.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해야 했고, 그 터전을 버려두고 상해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27년 이후 선생은 국내·외에 걸쳐 전개된 유일당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독립군 단체 위에 하나의 지도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고, 정부를 정당 중심으로 운영하자는 것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 이념상 분화된 좌·우 세력을 통합하는 운동이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26년 10월에 안창호와 원세훈이 북경에서 대한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한 뒤에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움직임은 상해와 남경, 그리고 무한과 광주로 확산되어갔고, 국내에서 신간회가 조직되는 분위기에서 만주지역도 유일당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동안 끊임없이 독립운동계의 통합과 통일을 추진하던 선생이 이에 앞장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선생이 1927년 4월 1일 정의부 간부 30여 명과 함께 농민호 조사를 결성하여 농민들의 상호부조 속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굳게 만드는 등 농민조합운동의 단서를 열었던 것도 그러한 차원에서 펼쳐진 것이다. 이어서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 신안둔에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리자, 선생은 정의부 중앙위원 자격으로 여기에 참석하였다. 이어서 선생은 1928년 5월 정의부를 대표하여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분열된 독립운동 세력의 대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조직 결성 방법을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자, 그는 새로운 통합 방법을 찾아나섰다. 그는 1928년 7월 삼부통일회의가 결렬되자 바로 앞서 일단 정의부를 이탈하였다. 그리고 그를 비롯한 이탈세력을 규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의장이 되었다. 1929년 좌·우 합작을 도모하기 위해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가 조직되었고, 선생은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9년 4월 같은 지역에 국민부가 출범됨으로써 민족유일당 계획은 무산되고, 1929년 5월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도 해체되었다. 이어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선생은 고문을 맡았다. 이러한 복잡한 흐름에서 선생을 주목해 보면, 통합운동의 핵심에 그가 항상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포형무소에서 옥중 순국 만해 삼우장에서 장례 치러 선생은 1931년 일본군의 만주침공 직후에 일제 경찰에 체포당했다. 사돈인 이원일, 경북 영양 출신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과 함께 항일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경에 피검된 것이다. 그 공작이 일본의 만주 침공을 맞받아치는 투쟁이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당시 다행히 일경의 감시망을 피한 남자현이 1932년 2월에 만주국 주재 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처단하고자 나선 사실은 이에 대한 보복 차원이였음을 뒷받침해 준다. 일송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에서 경찰에 모진 고문을 받으며 고생하다가 국내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받았다. 처음에 평양감옥에서 고생하다가 마포형무소에 옮겨진 그는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일(음력 3월 3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장례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주선하여 치러졌다. 한용운은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른 뒤, 선생의 유언대로 화장하여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 “유사지추(국가나 사회에 비상한 사고가 있을 때, 예컨대 광복이 되었을 때 이후의 상황까지)에 분열과 혼란을 통합할 유일무이한 민족지도자를 잃었다. 2천만 동포를 잃은 것과 같다.(만해어록 참조) 만해는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만해가 일생에 눈물을 보인 적이 이때 한 번뿐이라는 일화는 선생의 위상읕 말해주기도 한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 보리라.” 선생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1907년 만 29세에 협동학교 설립으로 민족운동에 나선 선생은 30년 동안 오직 조국의 독립에만 매달렸다. 협동학교를 세워 경북 북부지역 퇴계 학맥 중심부를 혁신으로 이끌고, 민족운동의 거점으로 만들어 갔다. 이곳에서 4년 동안 힘을 쏟은 문중 인사들과 학맥과 혼맥으로 얽힌 영남지역 각 문중과 집안들이 1911년 1월 무렵에 만주지역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대거 망명하였다. 경학사/신흥강습소를 세워 부민단/신흥학교로 발전시키고, 백서농장이라 이름 지은 병영(군영기지)을 운영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서로군정서/신흥무관학교로 성장시키면서 선생은 독립운동계의 거성으로 성장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것은 그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나이 40대를 넘어선 1920년대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에서 그는 통합의 화신이었다. 작은 단위의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고,이념과 방략에 따라 나뉜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데 전념하였고, 그가 나서는 곳에는 어디서나 통합과 통일이 뒤따랐다.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수습회의의 의장으로는 으례 김동삼 선생이 꼽혔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지 않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