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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1/04] 저항시인 이상화의 삶과 항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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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안타까운 현실과 슬픔 담은 아름다운 시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 문학가이며, 교육자, 권투 선수이기도 한 시인 이상화는 1921년 현진건의 소개로 월단 박종화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하면서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 나도향, 나혜석, 박영희 등 문인들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 후 1926년 조국의 독립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민족의 정서를 잘 다듬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민족주의적인 시를 『개벽』에 발표했는데, 그것이 1920년대 유일한 민족적 저항 시인 ‘빼앗긴 들에도 봄날은 오는가’이다.


만세운동에 참여하며

식민지 백성의 허무와 좌절 맛보다


  1943년 4월 25일, 이날 저항시인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01년(고종 38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이시우의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의 훈도를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무렵, 할아버지 이동진이 세운 우현서루(友弦書樓)에는 많은 항일지사들이 출입하면서 기울여져 가는 나라를 걱정하고 있을 때였는데, 상화도 어린 시절 이러한 분위기를 몸소 겪으면서 세상 물정을 깨우쳐갔다.


1915년, 그는 서울의 중앙학교(현재의 중앙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고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삶에 대한 번민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3학년을 수료하고 낙향하여 독서와 명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참으로 무료한 세월이었다. 그러던 중 1917년 현진건(玄鎭健)·백기만(白基萬)·이상백(李相佰) 등과 프린트판 「거화」(炬火)를 발간하면서 시작(詩作)에 눈을 떴으나, 1919년 3·1 독립운동 당시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서문시장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관헌에 쫓기면서 서울로 피신하였다. 상화가 겪는 첫 시련이었다. 


이때 경상북도 만세운동은 서문시장에서 시작되었는데, 3월 8일 대구고등보통학교·계성학교·신명여학교 학생들이 서문시장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낭독하고, 청라(靑蘿)언덕을 넘어 골목길로 이어지면서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대구 시내로 울려퍼졌다. 이것이 현재의 ‘3·1만세운동길’이다. 


상화는 이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식민지 백성으로서 허무와 좌절감에 빠져들었으며, 절망과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마 이것은 그 당시 식민지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뇌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던 중 1921년 5월, 현진건을 통해서 박종화(朴鍾和)와의 만남이 상화에게 새로운 문학의 세계를 열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1922년 1월, 이들은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노자영(盧子泳)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으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의욕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상화는 「백조」 창간호에 ‘말세(末世)의 희탄(欷嘆)’을 발표하였으며 뒤이어 ‘가을의 풍경(風景)’, ‘나의 침실(寢室)로’를 내놓았다.  


그리고 1926년 「개벽」(開闢) 6월호에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는데, 이로써 저항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필자는 여러 해 전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에 있는 상화고택(尙火古宅)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는데, 그때 자연석에 예쁘게 새겨져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제일 먼저 필자를 맞아주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어 내려가면서 작가의 체취를 느끼는 듯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식민지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조국의 광복을 갈망했던 시인의 심정이 오롯이 배어 있는 듯하였다. 


그때, 상화 고택을 나와 달성공원에 있는 ‘상화시비’를 둘러보았던 기억도 남아 있다. 이 시비는 1948년 시인 김소운(金素雲)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시비로 알려져 있다. 시비 앞면에는 그의 초기 작품인 ‘나의 침실로’의 일부가 명각되어 있었다.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엮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게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국권상실의 절망감 엿보이는 애절한 시


  필자는 저항시인 이상화를 말하려면 언제나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떠올린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중략)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시인은 국권상실의 절망감을 억누르지 못하여 몸부림치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부르짖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참으로 애절하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어김 없이 봄은 찾아왔지만, 벼 한 포기 심을 땅이 없었다. 푸근하게 몸을 맡길 땅이 어디에도 없었다. 식민지의 백성으로서의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잠식되어가는 현실 속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노래하다


  1910년(순종 4년) 8월 29일, 일본은 우리나라를 병탄한 후 영구히 그들의 수중에 넣기 위하여 경제수탈을 자행하였다. 일본의 재벌(財閥)들로 하여금 조선에 진출하게 하여 토지에 투자하거나, 농업이민(農業移民)을 권장하여 농지를 하나둘 잠식해나갔다. 이렇게 해서 일본인 대지주가 등장하게 됨으로써 그들은 점점 정치세력으로 성장해나갔다. 이로써, 조선의 농민들은 자기의 농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이던가. 우리의 어장(漁場)도 일본인들에게 개방되면서 어부들도 일터를 잃고, 허탈한 삶에 빠져들었다. 이렇게 우리 2천만 생령(生靈)들의 터전은 하나둘 일본인들에 의하여 잠식되어갔다.


‘삶의 터전’을 잃고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이 어찌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었겠는가. 이것이 식민지 백성들이 느끼는 상실감이었다.


상화는 생동감 넘치는 봄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래서,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도록 밟아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고 노래하였다. 이렇게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 시가 발표되었던 1926년은 나라의 정세가 참으로 암울하던 때였다. 4월 26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하고, 6월 10일에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순종황제의 붕어(崩御)는 우리 민족의 큰 슬픔이었다. 각급 학교가 휴교하였으며,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민생을 접었다. 


그리고 돈화문(敦化門) 앞에는 호곡하는 민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동안 일제의 무력통치하에서 탄압받으며 숨죽이고 지내야했던 민중들이 하나둘 돈화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목놓아 울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이상화도 뛰는 가슴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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