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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항쟁사 [2021/04] 자신의 모든 것 조국의 광복 위해 바친 최재형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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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난을 품은 위대한 순국자


한없이 따뜻했던 난로 ‘페치카’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4월이 되면 우리는 하나의 관행처럼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읊었던 영국의 시인 토머스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떠올린다. 워낙 난해하기로 유명한 시인만큼 그 뜻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지금으로부터 꼭 101년 전인 1920년 4월에 러시아 연해주에서 일어난 ‘4월참변’을 생각하면, 적어도 우리에게 그 구절은 글자 그대로 정확했다. 이때 일본군은 러시아에서 한인 독립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연해주의 한인 마을을 습격해 지도자들을 학살한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 희생자가 최재형(崔在亨)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조국의 광복을 위해 바친 최재형의 삶. ‘4월참변’ 101주년을 맞아 안중근 의사를 후원했던 위대한 순국자의 60년 생애를 되돌이켜 본다.


굶주림 때문에 이주한 연해주에서 

러시아 언어와 생활을 익히다


최재형은 1860년 8월 15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860년(철종11년)은 그의 생애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가 앞으로 활동 거점으로 삼게 되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이 해 7월 2일에 제정러시아 정부에 의해 신설되며, 또 그가 만년을 보내다가 일본군에 학살되는 곳인 우수리스크가 이 해 10월 18일에 청나라로부터 제정러시아로 할양됐다.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이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 및 지원국에게 자신의 영토 가운데 일부를 떼어주게 되었을 때 지원국이었던 제정러시아에게는 우수리스크가 포함된 연대주를 떼어준 것이다.


최재형은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두만강에 접한 삼림지대로 함경북도의 다른 지역들처럼 농사가 어려워 가난에 찌든 곳이었다. 그가 9~10세 때인 1869~1870년에 경원군을 포함한 함경북도 북부지방에 대기근이 발생하고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어 나가자 주민들 가운데 일부는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해 거기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때 조선정부는 백성이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월경죄인(越境罪人)’을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건 행위였지만, 그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절박한 심정에서 모험을 단행한 것이다.


최재형은 자연히 아주 어려서부터 극빈에 익숙해졌다. 더구나 아버지는 노비에 가까운 빈농이었고 어머니는 기생이어서 천대마저 감내해야만 했다. 아홉 살 때인 1869년에 아버지는 그와 그의 형을 데리고 1861년부터 월경한 조선인들이 개척한 연해주 지신허로 이주했으며 그들을 그곳의 러시아정교 교회에 입교시킴과 동시에 그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로써 그는 러시아의 언어와 생활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었다.


러시아 선장 내외의 보살핌 속에서 

연해주 ‘큰 부자’로 성공하다


  최재형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은 그 무렵에 이루어졌다. 열 살 때쯤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는 지신허보다 먹고살기가 좀 더 낫다는 이웃 포시에트로 단신 가출한 것이다. 항구도시인 포시에트에 도착했을 때는 너무 배가 고팠기에 기진맥진해 쓰러졌다. 다행히 러시아 선원들에게 구조돼 배로 옮겨졌으며 거기서 러시아인 선장 부부를 만났는데, 바깥세상에 눈이 떴고 게다가 학식이 높았던 그들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교양을 쌓게 됐다. 대체로 이때부터 그는 선장의 이름을 따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쓰게 된다.


최재형은 그들을 따라 약 6년 정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해 국내외를 다닌 후 독립하여 상거래와 무역을 익혔다. 천성이 정직하고 성실했던 그의 상거래는 러시아인들의 신용을 얻었으며, 그는 연해주에서 도로건설사업과 군납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제정러시아 정부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훈장을 받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30세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연해주에서 ‘큰 부자’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동의회 발족 .대동공보. 창간

안중근을 후원하다


최재형은 부의 축적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이 벌어들인 큰돈을 주변의 가난한 동포들은 물론 러시아인들에게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으며,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무려 32개의 러시아정교 학교를 세워주었고 장학금을 지급했다. 사람들은 그의 온정에 감복해 그를 ‘난로’라는 뜻의 러시아어인 ‘페치카’ 또는 ‘성냥’이라는 뜻의 함경도 방언 ‘비지깨’로 불렀다. 박환 교수의 책 .페치카 최재형.의 제목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최재형은 1893년에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연해주의 크라스키노 면(面)의 면장에 해당하는 ‘도헌(都憲)’으로 뽑혔는데, 그의 평소 온정과 인품에 미뤄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최재형이 만 45세가 된 1905년에 조국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보호국’으로 전락했다. 그는 곧바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08년에 항일 망명가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되다가 재정난으로 폐간된 .해조신문.을 인수해 .대동공보.로 새롭게 출발시켰다. 


  같은 시점에, 연해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발족시켜 총재에 취임했으며, 이 단체를 통해 안중근을 만나 그의 무장독립투쟁을 후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안중근은 동의회 소속 의병부대의 우영장(右營將)으로 국내진공을 시도할 수 있었으며, 이듬해인 1909년 10월에 하얼빈에서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1910년 8월에 조국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겼다. 최재형은 러시아 당국이 일본을 의식해 항일독립운동을 억압하자 1911년 경제단체를 표방한 권업회(勸業會)를 발족시키고 재정지원을 감당했다.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제정을 무너뜨리고 종국적으로 소비에트국가를 세웠다. 구(舊)세력은 백위군을 조직해 소비에트국가에 대항했다. 최재형은 중립을 지키고자 했지만, 러시아에 군사적으로 진출한 일제는 백위군과 제휴하고 조선인 항일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그들에게 또 하나의 독립운동단체로 1917년에 발족한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 연해주 항일 파르티잔의 지도자이자 1919년에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 최재형은 제거대상 제1호였다. 일본헌병대는 1920년 4월 5일에 그를 포함한 다른 지도자들을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정식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학살했다.


체포 하루 전날 가족들은 눈치를 채고 피신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피신하면 가족들을 붙잡아 내가 어디로 피신했는지 대라고 고문하며 갖은 고통을 가할 것이다. 차라리 내가 붙잡히는 것이 낫다”라고 의연히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병률 교수는 그의 저서 .러시아 고려인사회의 존경받는 지도자 최재형.이라는 책에서 그를 ‘여명기 민족운동의 순교자’라고도 불렀다.


우리에게 남긴 세 가지 교훈


최재형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만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최재형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며 어떤 특정한 시험에 합격해 자격을 획득한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의 삶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인격을 지닌 대인(大人)이었던가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빈곤과 천대와 차별 속에서 스스로 얻은 깨달음이, 맹자의 표현으로는 곤지(困知: 곤경을 겪으며 얻은 지식 또는 지혜)가 그를 고매한 인격자로 키웠고 거기서 위대한 행동이 나온 것이다.


둘째, 최재형이 조선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성공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한말에 조선과 만주 및 연해주를 순방했던 영국인 비숍 여사는 “조선에서는 일을 열심히 해 돈을 벌어보아야 결국 관리에게 모두 뜯기기에 사람들은 차라리 일하지 않는 길을 걷는다. 그러나 관리가 착취하지 않는 해외에 나가면 특유의 성실성과 근면성을 발휘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번다”라는 취지의 글을 남겼다. 최재형의 성공사례는 비숍 여사의 이 관찰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인들이 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이주민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나라에 이주해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보다 더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셋째, 최재형의 무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를 학살한 일본헌병대가 시신을 소각하거나 암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안중근 의사와 공통점을 가졌다. 안 의사를 ‘처형’한 일제는 그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경우 한인들의 정신적 상징이 될 것을 두려워해 암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지도자 주은래는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으며 그 유언은 그대로 지켜졌다. 화장된 뒤 골회는 그의 유언에 따라 중국의 산하에 뿌려졌다. 그의 아내 등영초 역시 남편의 길을 따랐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안 의사의 무덤과 최재형의 무덤을 찾는 노력을 계속하되, 묘지에 연연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준다. 두 분의 위대한 삶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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