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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1/04]3월의 전설(69회) ┃ 안동 길안 시위와 선비 손두원의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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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 나막신으로 후려치며 당당히 죽음에 맞서 


“내 나라 내가 찾으려 하는데 무슨 죄인가!”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안동군 임하면 금소동 선비 임찬일이 고종의 인산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3월 1일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 수십 매를 입수해 고향에 도착했다. 임찬일은 금소동 고향에 도착하자 여러 동지를 규합하여 거사를 의논하였다. 이들은 3월 21일 임하면 신덕, 길안면 천지시장, 임동면 책거리[鞭卷] 시장 3군데에서 같은 시간에 동시다발의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임하면 손영학은 그 방법을 의논하고자 학식과 인품, 독립사상이 확고했던 종숙(從叔) 손두원을 찾아갔다. 이에 손두원이 발벗고 나섰다. 그는 동지 김필락과 함께 문중의 거사 참여와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인근사방으로 다녔다.




길안 만세시위


안동군 길안면은 안동군(현 안동시) 동남쪽, 의성군과 청송군 사이에 끼어 있어 안동 읍내와는 북쪽 임하면을 통해 연결된다. 3·1운동도 임하면과 연결되어 일어났다. 


독립선언서는 임하면 금소동 선비 임찬일(林燦逸)이 고종의 인산(因山:국장)에 참예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3월 1일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 수십 매를 입수하여 전했다. 임찬일은 금소동 고향에 도착하자 동리 유지 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임윤익(林潤益)·손돌이(孫乭伊)·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석현(林錫鉉) 등의 여러 동지를 규합하여 거사를 의논하였다. 처음 이들은 3월 16일 길안(吉安) 천지(泉旨) 장날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그러나 시일이 너무 촉박하여 3월 21일로 바꾸고 임하면 신덕, 길안면 천지시장, 임동면 책거리[鞭卷] 시장 3군데에서 같은 시간에 동시다발의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금소동에서 약 4km 남쪽에 있는 임하면 오대동(梧垈洞)에서는 손영학((孫永學, 25세, 농업)이 김정익(金正翼, 30세, 농업), 김정연(金正演, 30세, 농업), 김병도(金炳道), 손두희(孫斗熙) 등의 동지를 규합하여 길안 천지 장날에 만세시위를 결의했다. 손영학은 그 방법을 의논하고자 학식과 인품, 독립사상이 확고했던 종숙(從叔) 손두원을 찾아갔다. 이에 손두원이 발벗고 나섰다. 그는 동지 김필락(金珌洛)과 함께 인근 지방 문중의 거사 참여와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인근사방으로 다녔다. 손덕원의 딸 손영명(孫永命)의 증언에 따르면, 


손두원 씨는 나의 백부인데, (중략) 어머님은 생전에 늘 우리들에게 백부님의 공적을 말씀하셨다. 길안 천지장터에서 거사하기 직전 거사에 필요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청송, 의성 등 지방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대하여 선전하시며 자금을 모집하였다. 같이 다니신 분으로 용각 어른(김필락 씨)이 있었다. 특히 청송군 파천면 지경동 조부자집(조경환)에 가서 자금을 의연할 것을 말했다가 무치하게 거절당하고 집에 돌아와서 분격해 하신 것을 (어머님이) 친히 보았다고 하시었다.  


길안 주재소 사법경찰 박덕환이 정보를 입수하고 3월 21일 오후 3시쯤 시장에 나가 은밀히 내사하고 있었다. 손영학, 김정익, 김정연의 3인 행동대장들은 광목에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와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했다. 17,8명의 동지들과 300~400명의 장꾼들도 호응했다. 

“우리들만이 만세를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면사무소에 이르러 면장 및 면서기에게도 함께 만세를 부르게 하자!” 

주도자들은 시위 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순사 박덕환과 스기모토(杉本) 수석순사는 총으로 무장하고 면사무소로 달려가 경계태세를 취했다. 시위대가 면사무소 사무실에 들어가려 압박했고, 순사들은 제지했다. 손영학·김정익 등은 돌로 길안면사무소 유리·문짝 등을 파괴했다. 다시 일동은 시장으로 돌아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7시경 손영학이 김정익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든지 주재소를 파괴해야 한다.”


다시 김정익, 손영학, 김정연 3명은 3백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진입을 시도했다. 순사들은 다시 총기를 발사하여 해산시켰다. 

그 다음날인 3월 22일 오후 다시 200여 명의 시위대가 천지주재소로 나아가 주재소를 공격하여 유리창 등을 파괴했다. 순사들은 발포로 대응했다. 시위대는 결국 오후 8시경 해산했다. 경상북도 지사는 안동에서 시위가 계속될 조짐을 보이자 증원병 4명을 파견한 뒤에 3월 22일 오후 6시 다시 보병 80연대에 출병을 청구하여 특무조장 이하 28명을 안동으로 출발시켰다. 


손두원 김필락의 순국 


순사들은 시위 배후에 손두원과 김필락이 있다는 것을 탐지하고 체포의 손길을 뻗쳤다. 다시 손영명의 증언이 이어진다. 


어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미년 음력 2월 23일 저녁 어두울 무렵 우리 종숙모님께서(동장 손태원의 처) 헐덕거리며 백부님 집에 와서 백부님 보고 

“솔티 아지뱀(즉 손두원씨) 빨리 피하소. 일본 사람이 왔어요.”


그러곤 무서워 소나무 배가리 속에 숨어 버렸다. 백부님이 피할 여가도 없이 우리 종숙부님(동장 손태원 씨)이 일본 순사 여럿을 데리고 와서 이 집이라고 가르쳐 주고는 피해버렸다. 손태원 씨는 손두원 씨의 종형이다. 


우리 종숙모님께서 나무갈이 속에 숨어서 보니까 일본 경찰이 마당 안에 들어와서 우리 백부님을 부르니 백부님은 일본 경찰을 보고 막 욕을 퍼부었고, “내 나라를 내가 찾으려 하는데 무슨 죄인가!” 하고 달려드니 일본놈은 백부님 왼팔을 쏘았다. 그러니 백부님이 분노에 못 이겨 처마 밑 축담 우에 있는 나막신으로 일본놈 머리를 갈기니 일본 경찰은 백부님 가슴을 쏘았다. 나중에 보니까 총알이 방안 벽에 걸려 있는 도포에 박혀 있었는데 어머님은 그 총알을 친히 보았다고 하셨다. 

그때 우리 아버님과 큰집의 손영학 씨, 매산 아재. 운호 아재 등 어른들은 모두 피난 가시고 백부님 시체 처리는 동장으로 계시는 손태원 씨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시체를 먼저 동네 상여간 안에 모셔다 놓고 며칠 후에 피난 갔던 분들이 돌아온 다음 장례를 간단히 치렀다고 하였다. 


한편, 김필락 씨는 동지 손두원이 총에 맞아 순국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서 피하세요!”


동리 사람들이 다급하게 피신을 권유했다. 김필락이 말했다. 


“극선(極善: 손두원의 字)이가 죽었는데 내가 살아 무엇하겠느냐.” 


그는 집에 있다가 친구이자 동지 손두원과 같은 화를 당했다. 아들 김병덕(金秉悳)도 김필락 순국 이후에도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일제에 협조를 거부하다 28세로 요절했다. 


행동대로 앞장섰던 손영학, 김정익, 김정연은 의성군 등지로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 1920년 2월 13일 이들은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여비를 조달하기 위해 의성군 산운면 만천동 박훈(朴勲)의 집에 침입하려다 붙잡혔다. 일제는 이들 3인에게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에 강도죄까지 적용하여 1920년 5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하였다. 공소는 기각되고, 이들은 대구감옥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기미년 만세시위 태극기 


손덕원의 딸 손영명(孫永命)은 집안에 비장해 왔던 시위 태극기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 후 몇 해가 지나서 내가 일, 여덟살 되던 해의 어느 하루 아버님께서(손덕원씨) 사랑방 안의 갓집 안에 치워 놓았던 태극기를 꺼내시었다. 우리 어머님께서 보시고 겁을 내시며 


 “그 위험한 것을 집안에 두면 되나요” 하시며 다른 데 치워 두라고 하시었다. 태극기는 양사 천에다 그린 것인데 백부님이 기미년 만세 부를 때 만든 것이라고 어머님께서 말씀했다. 아버님께서는 그 태극기를 접어서 변소간의 담벽 틈 사이에 끼워 두었다. 일본놈에 대한 이가 갈리는 적개심으로 불타는 우리집은 아버님이 간직하였던 태극기를 아버님이 별세하신 후 어머님과 우리 오빠가 그 태극기를 소중히 간직하여 가지고 만주로 망명하로 갔다.(진술자 손영명, 1917년생, 날인)

     

판결문 등 증빙자료가 없었던 손두원 지사에 대해 이러한 증언들이 알려지면서 2001년에 와서야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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