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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4]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 펜은 칼보다 강하다 민족저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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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총칼을 이겨낸 영혼의 시어(詩語)   


봄을 기다리며 희망을 노래하다  


글 | 편집부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 바이두 백과사전에 우리 민족의 대표 저항시인 윤동주가 ‘중국 조선족’으로 표기돼 있다는 뉴스를 보고 분노했다. 조국독립에 영혼을 바친 시인의 생(生) 앞에서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했다. 이육사, 한용운, 윤동주, 김소월, 이상화…. 서슬 퍼런 총칼 앞에 굴하지 않고 펜으로 나라와 민족을 지켜낸 저항시인의 이름이 함께 떠올랐다. 절절한 시어들이 가슴을 울렸다. 빼앗긴 들에 봄이 온지 어느덧 76년, 따사로운 봄 햇살 아래에서 그들이 세상에 남긴 이야기에 귀 기울여본다. 


17번 투옥에도 지조 지킨 

‘강철무지개’, 이육사


육사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립투쟁에 바쳐졌다. 일제강점기에 항일정신을 보여준 시인은 많았으나, 그처럼 삶과 문학에서 한결같이 저항의 길을 걸었던 경우는 흔치 않다. 육사는 시인이기 전에 의열단 정식단원으로 활동했다. 그로 인해 열일곱 차례나 투옥되었으며, 모진 고문에도 끝끝내 지조를 지킨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육사는 1904년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에서 퇴계 이황의 13대손인 이가호의 6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육사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일본식 성명강요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한 집안이었다. 투철한 항일의식은 이런 가풍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1925년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고 일본과 중국을 무대로 항일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26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이때 수감번호 264번을 따서 호를 ‘육사(陸史)’라 지었다. 출옥 후 중국 베이징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 의열단 등 여러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면서 학문과 항일운동을 겸했다. 


북경에서 본격적으로 무장 항일투쟁에 뛰어든 육사는 1932년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간부훈련반인 조선군관학교에 들어갔다. 상해, 안동, 신의주를 거쳐 귀국해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중 1934년 서울에서 일경에게 검거되었다. 이때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시와 글을 통해 민족의식을 깨우치고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북돋우겠다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다.  


육사는 육신이 쇠약해질수록 더 명징한 독립의지를 불태우며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41년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이 민족혼을 억압하는 상황에서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지었고 1942년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했다. 시를 비롯해 수필, 평론, 번역 등에서 광범위한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모친과 백형의 소상(小祥)으로 1943년 5월 귀국한 육사는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어 1944년 1월 16일 오전 5시, 마흔의 나이에 베이징의 교도소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죽는 날까지 ‘침묵’하지 않은 

꼿꼿한 수행자, 한용운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은 조국을 위해 한순간도 ‘침묵’하지 않았던 혁명적 실천가요, 저항시인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투옥 후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민족대표들을 꾸짖어 경종을 울린 일화는 유명하다. 1926년에는 첫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해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조선의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떻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며 냉골의 거처에서 꼿꼿하게 앉아 지냈다. 


만해는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했다. 본관 청주,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 인제의 백담사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해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해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했다.


1918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 불교의 대중화뿐 아니라 암울했던 식민지 무단통치 아래서 민족의 입과 귀 역할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19년 7월 10일에는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논설을 집필해 명쾌한 논리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했다.


1921년 석방된 뒤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펼쳐나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했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운동 등을 펼쳤다.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1944년 6월 29일 입적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조국을 사랑한 휴머니스트,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 윤동주는 일제의 강압에 고통 받는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대해 그 누구보다 고뇌하고 아파한 휴머니스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그의 시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깨달음의 정수를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했으며,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이 담겨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해 송몽규 등과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했다. 1932년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나 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당해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 중학부로 편입해 졸업했다.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으며,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했다. 1942년 일본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다.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 16일 하늘의 별이 되었다. 당시 형무소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아야 했는데, 그것이 그의 사인(死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연길 용정에 묻혔다. 정부는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윤동주의 첫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48년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초판 서문에는 그가 늘 동경하던 시인 정지용이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라는 글이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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