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0/05]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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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독립운동가
분단 넘어 통합의 시대로 가는 첫걸음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를 잇다
글 | 편집부
남과 북으로 갈라지기 전, 우리는 하나였다. 일제에 맞서 너나없이 목숨 바쳐 싸웠고, 조국독립을 위해 대동단결했다. 하지만 통곡의 역사는 우리 땅을 남과 북으로 가르고 우리 민족을 두 동강 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역시 분단의 벽에 가로막혀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바야흐로 분단 70년이 흘렀다. 더 늦기 전에 단절된 역사를 이어붙이고 통합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그 첫 단추는 조국을 위해 단 하나뿐인 목숨을 바쳤던 남과 북의 순국선열을 찾아내 다함께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것이 아닐까.
24인의 독립투사들, 남북한이 함께 기린다 남한의 독립유공자 명단 1만 185명과 북한의 3대 국립묘지인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 재북인사묘 안장자 명단 883명을 대조한 결과, 남한과 북한이 함께 독립유공자로 지정해 기리는 선열이 24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 장군(1896~1934)은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과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돼 있다. 남북 양쪽 국립묘지에 묘소가 있는 독립투사는 그가 유일하다. 평안북도 철산 출신의 양세봉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크게 감명을 받아 항일 의지를 불태웠고, 1919년 3·1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22년 천마산대에 가입해 무장 항일투쟁을 펼쳤고, 1929년 조선혁명당의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에 참여했다. 1932년에는 총사령에 취임해 일제의 만주침략에 맞서 조중연합군을 형성해 영릉가 전투를 비롯한 2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광복 후 북한은 양세봉의 가족을 평양으로 데려가 정착시켰다. 양세봉은 김일성의 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1961년 후손들이 유골을 북한으로 이장했고 애국열사릉에 옮겨져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 역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4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가묘(假墓)를 조성했다. 양세봉을 제외한 23명의 독립유공자는 남한에 묘소가 따로 없다. 14명은 국립현충원 내 무후선열(후손이 없는 순국선열) 제단에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9명은 남쪽에 기록만 있고 묘소나 위패 등 추모시설은 설치돼 있지 않다. (자세한 내용은 ‘남북 공동 독립유공자 현황’ 표 참고) 최윤구·최효일 열사 혁명열사릉에 안장 북한은 국립묘지를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 재북인사묘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1975년 최초로 만든 혁명열사릉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했거나 김일성의 최측근이었던 160명이 묻혀 있는 곳으로, 평양 대성산에 위치해 있다. 이후 1986년 평양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을 만들어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와 해방 후 사회주의 건설 유공자 등 500여 명을 안장했다. 재북인사묘는 남한의 유명 인사들로, 납북 또는 자진 월북해 활동하다가 사망한 62명의 묘역이다. 미군정 민정장관을 지낸 안재홍, 국학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한 정인보, 18세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흑도회·흑우회 등 항일 사상단체를 이끌어 온 박열 등이 이곳에 모셔져 있다. 혁명열사릉에 묘소가 있는 독립지사는 최윤구와 최효일 2명이다. 최윤구는 양세봉 장군이 총사령으로 활동한 조선혁명군에서 1930년대 초반 중대장, 제1연대장, 제2사령 등을 역임했다. 양세봉이 순국한 후 30여 명의 대원을 이끌고 김일성 등 북한 정권의 중심 세력들이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고, 1938년 12월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했다. 최효일은 북한이 펴낸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28년 김일성의 숙부인 김형권 휘하에서 활동하던 중 1930년 일제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32년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독립운동단체인 국민부 산하 부대에서 국내에 잠입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가체포돼 1932년 처형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모두 항일독립운동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독립유공자 24명은 1920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통합해 1929년 결성된 국민부와 그 산하 무장단체였던 조선혁명군, 또는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임시정부와 관련된 주요 인물로는 김규식, 유동열, 엄항섭, 윤기섭, 조소앙, 조완구, 최동오 등이 있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으로 끌려갔으며,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영어와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김규식은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탄원서를 제출했고,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다. 광복 이후에는 김구와 함께 남북 분단을 막고자 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했다. 개인·민족·국가 간 균등과 정치·경제·교육 균등을 통해 이상사회를 건설하자는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조소앙은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 초안과 1941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건국강령 초안을 작성한 사상가다. 조완구는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요직을 두루 거쳤고, 윤기섭은 중국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임시정부 군무장(軍務長)을 지냈다. 일본에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유동열은 임시정부가 창설한 광복군 참모총장으로 활동했다. 최동오는 임시정부 법무부장과 임시의정원 법사위원장으로 일했고, 엄항섭은 임시정부 선전부장과 김구 판공비서를 지냈다. 오화영, 오동진은 3·1운동에 참가한 공통점이 있다. 황해도 평산 출신의 오화영은 민족대표 33인이자 신간회 간부로 활동했으며, 개성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를 담당했다. 평북 의주 출신 오동진은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했다가 이후 간도로 망명해 1920년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결성, 총영장이 되어 항일전투를 진두지휘했다. 이외에 대한통의부 권업부장·재무부장 등을 지내면서 독립투쟁에 앞장섰던 강제하, 대한통의부 제3소대장·조선혁명군 유격대 제2대장 등을 역임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던 장철호 등이 북한의 애국열사릉에서 잠들어 있다. 남북 함께 독립운동사 범위 확대에 노력해야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진보한다. 분단의 벽에 가로막혀 있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도 조금씩 변화·발전하고 있다.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도 독립운동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2005년 3월 여운형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등이 서훈을 받았고, 8월에는 사회주의 계열 47명이 대규모로 독립유공 서훈을 받기도 했다. 북한 역사학계도 1990년대를 거치면서 과거에는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한과 북한에서 독립운동사의 범위를 확대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독립운동가는 더욱 늘어날 것이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가 하나로 이어져 온전한 모습을 갖출 날도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