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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5]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 항일운동 앞장선, 어린 독립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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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적 폭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청춘의 꿈  


일제의 간담 서늘케 한 당당한 눈빛을 보라


글 | 편집부


일제가 독립운동가 등 요주의 인물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감시대상 인물카드 4,857매 중에는 만 20세 미만으로 투옥된 독립유공자 카드가 60여 매에 이른다. 1920년 3·1운동 재현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소은명과 성낙응은 당시 15세 소녀 소년들이었다. 철없이 뛰어놀아도 될 어린 나이에 그들은 조국독립을 꿈꾸었고 일제에 항거했다. 그 대가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모진 고문이었다. 그럼에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일제를 향한 어린 투사들의 눈빛은 그 누구보다 단단했고, 삶은 더없이 치열했다.    


일제강점기 어린 학생들의 항일투쟁은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속 학생들 역시 3·1운동을 전파하거나 일제의 식민지 교육에 반대해 동맹휴학을 주동하고, 독서회 등 비밀조직을 만들어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검거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1920년대부터 광복 직전까지 일제는 이들에게 보안법과 치안유지법, 출판법 위반 등을 죄목으로 씌워 탄압했다.


3·1운동이라는 민족적 저항을 경험한 후 일제의 억압이 견고해지면서 나이 어린 학생이라도 항일 투쟁을 벌이다 끌려가면 실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집행유예로 풀려나더라도 정식 선고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구금 상태로 취조와 고문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에 굴복하지 않고 출소 이후 독립투쟁을 이어가다 수차례 더 옥고를 치른 이들도 있다. 


비밀결사단체 조직해 학생운동 이끌어


성낙응(14세 11개월)은 1932년 서울의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 조상환, 유동태, 서승석, 신대성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반제국주의동맹반’을 결성했다. 반제국주의동맹반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결성된 독서회 형태의 학생 비밀결사였다.


1929년 후반 이후의 학생운동은 표면상 동맹휴학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학생들의 비밀결사 활동 또한 이면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동맹휴학이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이면에 학교 투쟁을 지도한 학생 비밀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학생 비밀결사는 중등 이상 각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가 주를 이루었다. 독서회는 대개 5명 안팎의 회원들을 확보해 비밀리에 사회과학 서적을 함께 읽고 토론하던 모임으로, 사회주의 이론과 실제를 학습하고 나아가 학생운동을 이끌어나갈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성낙응은 비밀리에 무산자 정치 교육과정을 설립해 학생들은 물론 일반인까지도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34년 10월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공훈을 인정해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최강윤(18세 6개월)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3월 4일 김종현·채순병 등과 함께 만세시위 참여를 호소하는 취지문 4백여 매를 만들어 배부했다. 다음날에도 계속하여 남대문역전 광장에서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펄럭이며 독립만세를 외치다 3월 9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27년 만 18세의 나이로 식민지 교육의 부당성을 알리는 격문을 배포하다 체포된 이석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소 후에도 비밀결사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또다시 체포돼 4년 여간 취조를 받았고, 2년 6개월의 옥고를 더 치렀다.


여성근로자들 규합해 항일운동 전개 


  신기철(18세 4개월)은 춘천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8년 2월 항일비밀결사인 상록회에 가입했고, 상록회장 겸 서적계의 일을 맡아 활동하다 체포돼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 사전 편찬의 중요성에 눈을 떠 평생 사전 편찬에 힘썼다. 1959년 『표준국어사전』을 처음 펴냈고, 1975년 『새 우리말 큰 사전』을 친동생 신용철과 함께 펴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여 년간의 자료수집 끝에 민족 문화를 집대성한 『한국문화대백과사전』(전 10권, 2백자 원고지 12만장 분량)도 출간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 서점에서 북한 관련 자료를 조사를 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이병희(19세 2개월)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5월 경성 신설동 종연방적주식회사의 여공으로 근무하며 항일활동에 나섰다. 1936년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김희성·박인선 등 500여 명의 여성동지들을 규합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2년 4개월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39년 4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옥 후 1940년 북경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하고, 동지 박시목·박봉필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았다. 1943년 국내에서 북경으로 망명 온 이육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북경감옥에 구금되었다.


함께 투옥된 이육사가 1944년 1월 16일 옥중 순국하자, 육사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품을 정리해 국내의 유족에게 전달했다. 그가 없었다면 ‘광야’, ‘청포도’ 같은 육사의 주옥같은 시가 존재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정부에서는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배화여학교 6인’ 98년 만에 독립운동 인정


1920년 3월 1일 새벽 배화여고 재학생 김경화, 박양순, 소은명·소은숙 자매 등 40여 명은 기숙사 뒤편 언덕과 교정에 삼삼오오 모였다. 만세운동의 위력을 실감한 일제는 3·1운동 1주년을 앞두고 철통보안 태세를 갖춘 상황이었다. 일제는 만세운동 계획을 담은 문서들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상점과 학교 등에 배포되는 것을 감지하며 주요 학교 주변에서 이를 막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수일 전부터 선교회 부속학교 교장들에게 “불미스러운 행동이 일어나게 되면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경고를 해왔다. 


하지만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청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1년 전 광경을 그대로 재현했다. 곧바로 달려온 종로경찰서 일본 경찰들에 의해 학생 24명은 연행됐고 보안법 위반을 적용받아 김경화는 징역 1년(집행유예 3년), 당시 16세였던 소은명 등은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로 인해 배화여고 교장 스미스는 강제로 교장 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조선총독부의 경고를 어기고 학생들의 시위를 방관했다는 이유다.


지난 2018년 제73주년 8·15광복절을 맞아 정부는 배화여학교 만세시위를 이끈 학생들의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했다. 김경화·박양순·성혜자·소은명·안옥자·안희경 등 공적과 옥고가 확인된 6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98년 만에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배화여고 시위에 대해 “3·1운동 1주년을 맞아 일제가 만세 시위 재연을 우려해 서울 시내 곳곳에 철통같은 경계 태세를 유지한 가운데 어린 여학생들이 과감하게 결행한 만세 시위”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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