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6] 자유와 해방의 전사 아나키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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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평등·이상사회를 향한 투쟁
민중에 의한, 민족을 위한 대동을 꿈꾸다
글 | 편집부
백여 년 전 하얼빈에 울려 퍼진 세 발의 총성은 동북아 평화를 깨뜨린 제국주의의 심장을 향한 안중근의 의거였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민중혁명 신호탄이었다. 안중근의 의거와 동양평화론은 3·1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를 중심으로 한 무장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이회영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의 자치, 평등, 평화, 대동주의 공동체 건설 운동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이회영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석주 이상룡은 한국 아나키즘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신채호, 김원봉, 김구, 윤봉길, 김좌진 등 무장독립투쟁을 했던 이들 대부분은 아나키즘을 수용하거나 동조했다. 자칫 아나키즘을 공산주의, 무정부 자유주의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덕일 한가람연구소 소장은 “아나키즘은 각 개인, 각 지방, 각 조직이 자유롭고 동등한 권리 속에서 서로 연합해 정부를 구성하자는 것이지 정부 자체를 부정하는 사상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백여 년 전, 나라를 잃고 제국주의 열강의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혼란의 시대에 그들이 꿈꿨던 세상은 민중에 의한, 민족을 위한, 세계 인류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이었다. 이회영, 자유와 평등 몸소 실천한 아나키스트 만주에서 자치기관 경학사를 만들었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헤이그특사 파견을 구상했고, 고종황제 망명을 추진했으며, 임시정부보다는 자유연합 성격의 독립운동본부 구성을 주장했다. 이회영은 베이징에서 무정부주의에 심취해 있던 이을규·이정규 형제, 러시아 혁명에 깊은 관심을 가진 조소앙, 의열단에 관련돼 있던 신채호·김창숙 등과 가깝게 지냈다. 이들과 교류하면서 독립 후 건설될 사회는 국가 사이의 민족자결 원칙만이 아니라 민족 내부에서의 자유와 평등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1924년 신채호·유자명·정화암 등과 함께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기관지 『정의공보』를 발행했다.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도 이회영과의 토론을 기초로 나온 것이다. 1930년에는 상하이에서 아나키스트 무장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1931년 중국인 아나키스트 왕야차오·화쥔스 등과 함께 공동으로 항일구국연맹과 일본기관에 대한 직접 공격을 위해 흑색공포단을 조직했다. 이회영은 신민회, 다물단, 흑색공포단, 대한통군부, 대한통의부,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등 숱한 단체와 기관을 만들었으나 단 한 번도 감투를 쓰지 않았다. 그는 지위나 물욕보다 명예와 가치를 중시했으며 자유와 평등을 몸소 실천한 진정한 아나키스트였다. 소탈하고 인정이 많았던 그의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를 거치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거론하기 힘들 정도다. 유림, 세계 최초 합법적 아나키즘 정당 창설 “나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 다 같이 노동하고 다 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있다.” 환국 직후 기자회견에서 단주 유림이 한 말이다. 유림이 독립운동에 첫발을 내디딘 시기는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때였다. 경술국치의 소식을 접한 그는 손가락을 끊어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고 혈서를 썼다. 당시 12세였다. 안동에서 부흥회, 대구에서 자강회를 조직했다가 왜경에 잡혔으며,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이상룡, 김동삼 등과 군정서에 참여해 무력항쟁을 벌였다. 1922년 성도대학 사범부 문과에 입학하면서 아나키스트로 사상을 바꿨다. 1925년 광동, 상해, 무한을 오가며 중원대륙 국민당 내 좌파를 이루는 아나키스트 원로들과 친분을 맺었고, 진형영 등 사회주의 세력과 접촉을 시도하면서 광동의거, 무창폭동에 참가했다. 이후 만주로 돌아와 북만주 일대의 민족세력을 규합, 김좌진 등과 한족총연맹을 조직해 독립군의 통합과 강화에 힘썼으며 1928년 평양에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서기부 주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일개민족, 일개정부, 일개이념, 일개집단’의 구호 밑에 임시정부 중심의 단결을 호소했으며, 임시의정원 경북대의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했다. 1946년 임시정부의 법통기관인 비상국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세계 아나키즘 최초의 아나키즘 이념정당인 독립노동당을 결성해 당수로 취임했다. <노동신문>을 발간해 자유, 평등이라는 평생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힘썼다. 유자명, 남북에서 인정받은 민족주의 국제주의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자까지도 혁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민중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다는 구실 하에 실제로는 민중과 혁명을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희생시키려는 자가 있는 것이다.” 유자명이 중국 국민혁명 주도세력을 비판한 내용이다. 충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수원농림을 졸업하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은 유자명은 1919년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학생들을 주도해 만세운동을 계획하다 사전에 발각되었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임되고, 신한청년당에 참여해 본격적인 항일투쟁의 길에 나섰다. 또한 시대적 전환기에 신사상을 수용하면서 의열단,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 폭넓고 다양한 궤적을 남겼다. 일제밀정 김달하 처단, 1926년 나석주의거가 그의 지도하에 결행됐다. 1927년에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해 중국·인도 등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국제연대 활동을 펴고, 조선혁명자연맹의 간부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8년 조선의용대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고, 1942년 임시정부가 중국 관내 좌우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해 통합 의회를 구성하자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유자명은 아나키스트로도 활동했지만 계급과 이념보다 민족과 조국이 절대적 가치였다. 그런 까닭에 ‘민족주의적 아나키스트’라고 불린다. 중국의 곽말약·파금·나세미·노신 등 정치문화계의 인물들과 우의를 다지며 양국을 연계하는 역할을 한 덕분에 국제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유자명은 남과 북으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남한 정부로부터 196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197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급 국기훈장을 받았다. 신채호, 임정 노선에 맞서 민중 직접혁명론 정립 하지만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사회개조·세계개조론과 결합된 대동사상을 수용하게 되었고, 1919년 3·1운동에서 민중의 힘을 목격한 뒤 민중 해방을 표방하는 사회주의에 주목하게 됐다. 신채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임통치론’을 펴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임정을 탈퇴해 반임정 투쟁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임정의 독립운동 노선에 맞서 아나키즘에 입각한 ‘민족해방 운동론’, ‘민중 직접혁명론’을 정립해 나갔다. 신채호가 꿈꾸었던 사회는 빈부격차와 계급이 없는 ‘대동사회’였다. 민족주의자들이 광복 후 자본주의 사회를 꿈꿨다면, 신채호는 ‘빈부 평균’의 사회를 지향했다. 신채호는 전위조직의 지도하에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도 부정했다. 그는 민중 직접혁명은 몇몇 지도자가 아니라 선각한 민중의 직접행동을 통해 이뤄진다고 역설했다. 아나키스트 국제조직인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운영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1928년 외국환 위조를 시도하다 일제에 검거되어 1936년 만기출옥을 2년 앞두고 뇌일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