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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1/07] 3대 독립운동 중심에 선 여성독립운동가, 김락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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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독립명문가’ 묵묵히 지켜낸 대범한 여장부 


멸문(滅門) 무릅쓰고 대 이어 목숨 바치다


글 | 편집부


향산 이만도는 금식 24일째인 10월 10일(음 9.8)에 순국하였다. 향산 공의 죽음은 친지와 문도들에 계승되고 아우, 아들, 며느리, 손자, 손서들에 이르기까지 독립 청원서, 독립 군자금 모금운동, 3·1만세운동, 유림단, 의열단 등 다방면으로 전개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며느리 김락은 기미년, 당시 57세에 예안 독립만세 시위로 안동헌병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에 의해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29년 67세의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김락 여사는 관향이 의성이며, 철종 13년(1862년) 12월 2일 안동 내앞마을에서 태어났다. 김진린 공의 4남 3녀 가운데 막내딸로, 위로는 네 명의 오라버니와 두 명의 언니가 있었다. 오라버니는 김대락(1845~1914), 김효락(1849~1904), 김소락(1851~1929), 김정락(1857~1881)이며, 언니는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의 이상룡에게 출가한 김우락(1854~1933), 춘양의 강면에게 출가한 김순락(1860~1937)이다. 김락이 시집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도산면 하계의 시집에서는 여섯 식구가 있었다. 시어른 향산 공은 당시 39세로 양산군수를 마치고 돌아오셨을 때이다.


남편은 예안통문을 작성하고 

시어른은 의병장에 추대되다


1895년 8월에는 명성황후의 참변소식이 들려왔다. 일국의 국모가 왜적에 의해 참살당하는 것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 해 11월에는 그 작당들에 의해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지니 백성의 자존을 건드리는 것이다. 넘어지는 나라를 일으키려는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안동지방에서 가장 먼저 나온 통문은 바로 예안통문이었다. 상주 땅 함창은 일명 당다리로 신라 때 당나라 군사가 몰살했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에 주둔한 왜병을 치자는 것이다. 이 예안통문은 바로 김락 여사의 남편이 지은 것이다.


당시 예안은 진성이씨 동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이 통문에 223명이 서명하고 12월 9일 도산서원 건너 시사단에서 선성의진이 결성되었다. 선성은 바로 예안의 옛 이름으로, 시어른이 선성의진의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1896년) 3월에는 안동과 예안의병이 상주 함창의 왜병을 공격했다. 이때 예안의병이 그 선두가 되었다. 시어른은 우환이 있어 남편이 시어른을 대신해 중군장이 되고, 제자인 벽산 공이 선봉장이 되어 출발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죽음의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를 겪어 보지 않는 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김락은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도 일생 동안에 다른 여인처럼 장독대 위에 정화수 한 사발을 올려놓고 천지신명에게 두 손 모아 애타게 비는 일이 없었다고 하니 여장부와 같은 대범함과 대담함이 있었던 것이다.

태봉전투는 싸움이 되지 못할 정도로 열세였으며, 2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태봉전투의 앙갚음으로 일제는 4월 2일 밤, 안동 시가지를 불바다로 만들고 도산으로 들어와 바로 마을 앞을 지나 퇴계종택을 불살랐다. 그래도 속이 차지 않아, 온혜의 온계종택(삼백당)과 청량산의 오산당까지 불태워 버렸다.


종택이 불탈 때는 집에서 보아도 하늘이 붉게 타오름을 충분히 볼 수 있는 거리다. 어른이 의진 대장이요 남편이 중군장으로 참전했으니 생각에 따라서는 그 화가 고스란히 집으로 올 수도 있었던 것이다. 화는 그 범위가 좁을수록 좋은 것이다.


시어른은 의진이 적에 대결할 만한 조직이 되지 못한 오합지졸이니 나라나 개인이나 무익하다고 하여 얼마 뒤 의진을 해산하고 입산하였다. 입산은 주로 조상의 선영이 있는 곳인 영양 봉화 안동의 접경지역인 산중이었다.

 

안동 전체에 항일 바람 일으킨 

향산 이만도의 자정순국


  1905년이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1월에는 을사늑약으로 급기야 외교권을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시아버지 향산 이만도는 을사늑약을 파기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어른이 몸이 편찮으시자, 남편이 시어른의 솟장 「청참오적소」을 대신 가지고 상경한 것이다. 그런데 솟장을 올렸으나 왕의 비답을 받아내지는 못했다.


시어른은 이에 다시 전직관료로서 나라의 죄인을 자처하며 입산해 버리시니 받들어 뫼시지 못하는 미안함의 나날이었다. 몇 곳 선영마다 위토와 산지기 집이 있었다. 이곳 저곳 번갈아 다니지만, 불편함은 없었으니 어렵게 성장하였기에 술은 평소 딱 한잔이었으며, 음식은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 산중에 홀로 계시는 시어른이 대택에서 9월 17일부터 곡기를 끊기 시작했다는 기별이 왔다. 청천병력이었다. 이때 김락의 나이 48세였다. 자정순국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단식이다. 알면서도 이를 택한 것은 육신은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 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다. 


견디어야 하는 본인도 힘이 드는 것이지만, 여러 날 옆에서 이를 지켜보아야 하는 가족에게도 고통이었다. 어른이 굶고 있을 때 자손들이 밥을 먹는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별을 듣고 달려온 동생 교리 이만규 공이 “국록을 받은 것은 저도 형님과 같으니 저도 따라 가겠습니다” 하니 “남은 일이 있지 않느냐. 나중에도 죽을 기회는 있지 않느냐” 하고, 단검을 내어주며 “죽음이란 언제 죽어도 늦지 않다”함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집안 친척 친지 문도 등 내방자들이 밤낮으로 몰려 왔다. 산골 외딴집에서 이들의 식사제공을 해야 하는 며느리로서 그야말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얌전하고 좀체 말이 없는 김락의 며느리 최씨도 뒤주에 곡식을 가지러 갔는데 돌아오지 않아 가보니 쓰러져 그만 잠들어 버렸다고 하니 오죽했을까.


평소 시어른을 받들어 모시지 못함이 한이 되어 동서가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시어른은 둘을 불러 “내가 입산하고 너희들도 분주하여 안 받들어도 달게 여긴지 5, 6년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무슨 여한이 있겠느냐. 각기 우물에 가서 물 한 사발씩 떠 오너라” 하시자 공손히 받쳐 올렸다. 단숨에 들이켜고는 “너희들의 정성은 이것으로 족하다” 하며 가도를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향산 이만도는 금식 24일째인 10월 10일(음 9.8)에 순국하였다. 당시 그 24일간 단식하는 동안의 모습은 주손 강호가 적은 『청구일기』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그리고 각처에서 몰려오는 조문객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며, 탈상 때까지 만사나 제문을 지어 온 자가 9백 명이 넘었으며, 향산 공의 죽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친지와 문도들에 계승되고 아우, 아들, 며느리, 손자, 손서들에 이르기까지 독립 청원서, 독립 군자금 모금운동, 3·1만세운동, 유림단, 의열단 등 다방면으로 전개되어 해방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자정순국이 알려지면서 같은 마을 정언을 지낸 동은 이중언도 따라 단식에 들어갔으며, 같은 마을에 우거해 와서 살던 우헌 이현섭 또한 단식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봉화 풍정의 지평을 지낸 계은 이면주도 음독 순국을 하였으며, 안동 하회의 회은 류도발 또한 단식 자정의 길을 택하고, 뒤를 이어 아들 하은 류신영 또한 부친을 따라 자정순국하였다.


 영양 청기의 제자 김도현은 부친의 집상을 마치자 스스로 바다에 걸어 들어가 순국하였으며, 멀리 대전 유성에 우거해 있던 족손 이명우는 나라를 따라, 그 부인 권성은 남편을 따라 함께 자결하였다. 이는 그 뒤 창씨개명 때까지 이어져 족손 혜인 이현구 또한 단식 순국하였다. 


시숙부 유천공은 일제의 회유 목적으로 천황의 은사금이 내려지자 “나는 대한의 신하다. 이 돈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연행을 하는데, 형이 준 단검으로 스스로 목을 찔러 생명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일제 시 전국 자정순국자 60명 가운데 14명이 안동문화권이니 그 파급 영향은 결코 적지 않으며,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의리에 나아감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유교적인 가치관인 충(忠), 효(孝), 열(烈)에 입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만주로 떠나는 가족들과 생이별

걱정과 그리움에 사무쳐


1910년, 이 정신없는 한 해도 이제는 다 가는가 했는데 12월에 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친정 큰오라버니인 김대락이 이미 66세의 노인이었지만 엄동설한에 조상 신주를 땅에 파묻고, 가산을 처분하고는 나라를 되찾으러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온다는 여행 같은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기약없는 생이별인 것이다. 상중이기에 친정으로 달려가 떠나는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


  이듬해 봄에는 큰언니 김우락의 가족들까지 또 만주로 떠났다는 것이다. 언니 김우락은 임청각 이상룡의 부인이다. 어릴 때 큰언니 등에 업혀 자랐기에 누구보다 더 정이 들고 그만큼 따랐다. 이제 나라 잃고 친정 잃고 언니마저 잃었다. 모든 것을 잃은 느낌이다. 만주는 낯선 땅, 마음 한구석 걱정과 그리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들보다 더한 마음에 동리에도 몇 집이나 만주로 떠나갔다. 지긋지긋한 왜정(倭政)하에 국내보다 차라리 오라버니 따라 언니 따라 만주로 가고자 했으나, 며느리 최씨의 간곡한 만류가 있었다고 한다.


오라버니는 당시의 고국을 떠나는 마음을 적은 거국가 가사를 지어 보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 극비여야 하기에 숨겨야 했다. 지금 고려대학교에 소장한 것은 친정의 것이다. 집에서 보관하던 것은 당시 기왓장 밑에 숨겨 왔는데 뒤에 계명대학교에 기증했다. 고대본에 비해 원문 옆에 첨삭이 많은 편이다.


좀 조용한가 싶더니 1917년 정월에 학봉 종부로 출가한 맏딸 이호가 딸을 낳은 뒤 출산후유증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야말로 또 충격이었다. 얼마 뒤에는 사위가 재취를 들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어린 외손녀는 외가에 맡겨지게 되었다. 외가에 왔을 때, 눈이 먼 외할머니가 반가와 어쩔 줄을 모르며 얼굴을 더듬는데, 실명한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것을 보고 무서워서 그만 울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외조모가 그렇게도 좋았다고 한다. 


친일부호 죽인 광복회 사령관 박상진

한 달 가까이 집 안에 숨겨줘


이 해 봄, 울적한 나날인데 긴장할 일이 생겼다. 광복회 사령관 박상진이 친일부호 장승원을 죽이고 도피의 길에 들어 한 달 가까이 집에 숨겨주었다.물론 남편의 인정 하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낯선 사람, 그것도 피신하는 사람을 집에 숨겨둔다는 것은 매우 편치 못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한 사람이 아닌 전 가족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손님이 많은 집으로 철저한 비밀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박상진은 친분이 있는 집도 아니며 교분이 있는 사이도 아니다. 그가 과거 만주 일대를 다녔기에 오라버니와 형부를 만나서 서로 아는 사이였다. 이 은닉 사실은 박상진이 말하지 않는 이상 당시의 경찰도 그 은닉한 곳을 몰랐다. 


해방 이후 학계에서도 그가 안동으로 피신한 것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누구 집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피신은 아무 집에나 하는 것이 아니요, 피신을 받는 자 또한 아무나 집에 숨겨주지 않는다. 만약의 경우에 말할 수 없는 재앙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1918년 4월에 아들 동흠이 광복회의 이름으로 봉화 부호 이정필에게 군자금 모금 협박 편지를 발송한 사건이 일어나 조사 결과 봉투의 고무인이 도산면사무소의 것임이 밝혀지자 면장 이명호와 함께 구속되어 징역 5월의 옥고를 겪었다. 당시 아들은 나이 20세였다.


독립만세 시위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끝내 실명되다


이듬해는 기미년(1919년)이다. 당시 김락의 나이 57세였다. 연초부터 고종황제의 독살설이 돌고 급기야 만세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어 독립만세운동의 물결이 몰아쳤다. 3월 17일과 22일, 예안에서도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김락이 체포된 것은 그 시위현장이 아닌 집이었다. 안동헌병수비대에 끌려가 고문에 의해 끝내 실명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고등계 형사들의 지침서인 『고등경찰요사』, 그 책의 서두의 총론에 실린 것이다. 그 내용은 “안동의 양반 고 이중업의 처는 1919년 소요 당시 수비대에 끌려가 취조받은 결과 실명했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소화 4년(1929년) 2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밤낮 적개심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아들 이동흠이 스스로 고백했다”고 했다.


이 일을 끝낸 기암 공은 일제의 감시 속에 있기에 아내 김락이 고문으로 실명한 소식을 듣고도 발길이 집으로 향하질 못했다. 그것은 제2의 거사를 계획하고 추진하기 위함이며, 만약 귀가를 한다면 기다리는 헌병들에게만 좋은 일일 뿐이다. 그러나 안심하고 오래도록 피할 수 있는 집 또한 흔치 않다.


고심 끝에 멀리 울산의 손후익 공의 집을 피신처로 하였으니, 병으로 귀가할 때까지 그 기간은 3년이었다. 이 집은 숙부 유천 공의 처가이다. 여기서 추진한 2차 계획은 기암 공의 주장에 따라 일본을 후원하는 서양인보다, 우리를 잘 알고 또 일본을 경계하고 있는 중국에 독립 청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여 회당 장석영, 성재 권상익, 중재 김황, 문암 손후익과 의논한 끝에 손문과 군벌 오패부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회당과 성재가 각각 작성하고 이를 기암공이 가지고 상해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출발 직전에 갑자기 우환이 들었다. 


이 기별을 듣고 아들 동흠, 종흠 형제가 달려가 모셔 왔으나 독립의 한을 안고 곧 별세하고 말았다.


기암 공의 일생은 가사보다는 선친의 유업을 계승하는 데 진력하였으니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 아들과 사위들이 뒤를 이었으며 남긴 문집으로 기암집을 전한다.


설상가상 또 몇 해 가지 않아 1926년 5월에는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둘째아들 종흠이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한 일로 형제가 한꺼번에 잡혀간 것이다. 가택수색을 당해 집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일제하에서 독립 체념하는 분위기

군자금 모금 실적마저 저조


1919년 파리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갔던 김창숙이 1925년 초 중국 내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장소로 내몽고 지역을 물색한 후 군벌 풍옥상과 협의한 뒤,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


김창숙으로 보아서는 반산은 향산 공의 손자요 파리장서에 같이 수고하던 기암 공의 아들이니 동지로는 더할 수 없는 적격자였다. 감시받는 집이기에 집에서 접촉할 수 없었다. 마침 반산 공이 조카의 결혼 때 상객으로 봉화 해저리에 갔다. 이에 연락책 정수기를 보내어 협조요청을 했다.


형제가 의논하여 결심을 하고는 그해 음력 12월 대구에 내려가 김창숙을 만났다. 이때 11명이 모였다. 모금할 때 상대가 믿지 않을 것을 염려해 권총을 청해 받았다.


김창숙으로부터 권총을 지급받아 영양 석보의 부호인 외숙부 이현병을 찾아가 군자금 2만 원을 요구한 바 있다. 외숙부는 이후 몇 차례 증인으로 출두했다. 그 진술에 1926년 정월에 외가에 왔을 때 이현병은 “가지고 있다는 그 권총은 어디에 두었느냐” 하고 물었으니 기름종이 포장을 꺼내 보였다. 주재소 권총 같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만약 외숙부님이 돈을 내지 않을 때는 그들이 권총을 가지고 와서 무슨일을 저지를 것이니, 미리 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외가뿐이 아닌 다른 여러 곳으로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고발이 없으면 요구한 인물이 누구인지, 요구했던 액수가 얼마인지는 알기 어렵다. 법원의 ‘이종흠 3회 예심조서’에 의하면 “봉화군 권상경으로부터 1천 원을 출급받은 것은 있으나, 소액이기에 되돌려준 것은 아닌가” 했을 때 “그런 일은 모른다”고 한 것을 보면, 인정사정없이 각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부산 범어사에서 그동안 활동하던 요인인 김창숙, 정수기, 손후익, 이종흠, 김창백, 이재락 6명이 회합을 가졌다. 그 결과 더 진전이 없음을 알게 되자, 김창숙은 모금한 얼마 되지 않는 자금을 가지고 상해로 출발하게 되었다.


당시 군자금 모금은 그 대상이 이미 일반인이 아닌 부호들일 수밖에 없고, 부호라면 양반계층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대개 친인척 내지 잘 알고 지내는 친지들일 것이니, 모금은 사실 협박이라기보다는 협조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를 위해 차마 고발하기 어려운 집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건이 탄로되어도 서로가 사실을 밝히기를 꺼리는 것이니만치 정확한 요구 대상이나 개인별 모금 현황 등은 공개된 바 없다. 미루어 짐작되는 것은 당시는 이미 일제하에서 국민의식이 독립을 체념한 풍조였기에 실적 또한 저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범 김창숙이 해외로 떠났기 때문에 전모를 밝히기 어렵고 기록도 2만 매가 넘어 공판을 몇 번이나 연기하여 이듬해인 1927년 3월 말경까지 끌었다. 형제는 석방 때까지 조금도 태도를 굽히지 않았으며, 형은 혈서로 ‘말할 때는 후환을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후회를 생각하라’고 쓰며 속으로 다짐했다. 트집을 잡지 못하자 할 수 없이 형은 석방하게 되었다. 공판과정은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기사화되었다. 선고결과 동생 종흠은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법 무기소지죄로 징역1년 집행유예 4년이었다. 


그때까지 그들의 악랄한 취조에 숱한 고생이 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후일 당시에 같은 방에 수감되어 있던 경남 산청의 중재 김황의 회고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해에 도착한 김창숙은 본래의 계획에 너무 미치지 못하는 금액인지라 고민 끝에 국내 침체된 인심을 격동시킬 필요에서 결사대를 파견하기로 하고, 김구 김원봉 등과 협의한 끝에 나석주 의사를 파견했다. 나석주는 1926년 12월 28일 을지로입구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에 폭탄을 투척하고 추격하는 경찰을 권총으로 쏘고 남은 한 발로 자결했다.


간절히 기다리던 광복 보지 못한 채 

67세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치다


김락은 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29년 음력 정월 초하루 아침, 67세의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동리에서는 준비한 설 차사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맏사위 학봉 종손 김용환(1887년)은 이호(1884년)의 남편으로 의병에 투신하여 경북지방의 의병 전장을 누볐으며, 만주로 출국하려다가 압록강에서 잡혀 되돌아왔으며, 수천 석 되는 종가 재산을 독립 군자금으로 보내다가 마침내 서로군정서 군자금 조직인 의용단사건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자기 재산은 물론 지인들에게도 돈을 빌려가며 기생방 노름판 등에 유흥경비로 탕진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사실은 모두 숨겨지다가 해방 후에야 그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거짓 파락호 행세를 한 것임이 밝혀졌다.


  


둘째 사위인 안동 무실의 류동저(1892년)는 이하계(1892년)의 남편으로 진사 류연박의 아들인데 서파공의 아들 류인식 등과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였다. 안동예수교회(현 안동교회)에서 30여 명이 발족하였는 바, 총간사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는데 그 시기는 3·1운동 이후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막내사위인 봉화 유곡의 권은(1896년)은 이낭(1895년)의 남편으로 만주로 이주하여 처외숙인 김대락, 처이모부인 이상룡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만주독립활동은 상해임시정부활동처럼 활동자료가 흔치 않다.


주손인 이강호(1863년)는 자기 집에서 기거하며 절의를 마무리하는 향산공의 임종까지 모든 것을 제공하고 당시의 상황을 대화 내용까지 비교적 상세히 기록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 기간의 유일한 기록인 『청구일기』이다.


주손 강호의 아들 원일(1886년) 또한 어릴 때 이를 지켜보았기에 독립을 위해 사돈 간인 안동 내앞의 일송 김긍식(뒤에 東三으로 개명)과 만주로 가서 삼원보에서 경학사를 조직하고 함께 옥고를 치렀다.


집안에서도 재종질인 백저 비호(1895년)는 예안시위 때 일제가 세운 예안 뒷산 선성산의 어대전기념비를 쓰러뜨리고 순사 주재소에 진입하여 구금자 석방 시위를 하고, 이어 안동시위에까지 참여하였다. 결국 대국법원 복심판결에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간신히 대를 이어가는 자손이 귀한 집이다. 자손이 귀한 집에 유공자 명단에 오른 분은 모두 8명이다. 만약 일제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몰락을 넘어 어쩌면 멸문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하늘이 이를 모르겠는가.


고생하신 분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이 있었다.자손이 귀한 집으로 간신히 대를 이어가면서도 시아버지 향산 공에 이어 남편 기암 공과 본인 및 아들 이고 공, 반산 공이 대를 이어 3대가 그 유지를 받들어 계승하였으며, 또 김락의 친정과 사위들까지 독립의 의지를 몸으로 실천한 그 가운데 우뚝 섰기에 전국에 보기 드문 3대 독립운동 명문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여사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리어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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