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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1/07] 갑오변란, 조선침략을 위한 길닦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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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변란·을미사변에 맞선 전국 유생들의 항일운동 


민족 생존권 회복 위한 투쟁의 불꽃 일어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894년 농민봉기가 확대됨에 따라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동학농민봉기가 진압되었지만,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철수를 거부하면서 조선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으로 번졌다. 일본은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1894년 7월 23일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그 후 친일 성향의 김홍집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출범시키고, 갑오개혁을 단행하며 조선침략의 길닦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갑오개혁의 배후에 일본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갑오변란에 대한 민중들의 반일감정이 겹쳐지면서 항일의병으로 표출되었다. 설상가상 을미사변과 이어진 단발령 선포로 항일의병은 불같이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년) 2월,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가 일어나면서 조정을 긴장케 하였다. 그 출발은 전라도 고부군수(高阜郡守) 조병갑이 만석보(萬石洑)를 설치하여 온갖 부당한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 농민들이 이에 항거하여 일어난 농민항쟁이었는데, 점차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는 대규모의 세력으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처럼 동학농민봉기가 확대됨에 따라 조정(朝廷)에서는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임명하여 조사토록 하였지만, 봉기한 농민들을 동학폭도로 몰아 처벌함으로써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동학농민봉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그로 하여금 군사 800명을 지휘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래도 농민봉기를 진압하지 못하므로 하는 수 없이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새로운 불씨를 가져왔다. 이에 일본이  거류민(居留民)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서울에 입성시키더니, 그다음 수순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병력을 증파하였다.  


이로써 청·일 두 나라의 군대가 출병하였는데, 이것이 결국 두 나라의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으로 진전되었다. 이때 동학농민봉기가 진압되었지만, 청·일 두 나라의 군대는 철수를 거부하였다. 우리 조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갑오변란 일으켜 친일내각 출범

조선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다 


  그리고 일본은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해가면서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계획을 차근차근 실천해나갔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에 일어난 갑오변란(甲午變亂)은 이러한 계획에서 출발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 주재 오오토리 케이스케(大烏圭介) 일본공사가 7월 23일 0시 30분 각 부대에 작전을 하달함으로써 일본군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과정에 조·일 두 나라의 군대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지만, 일본군 주력부대가 영추문(迎秋門)을 공격하여 새벽 5시경 경복궁을 점령하고, 건청궁(乾淸宮)에 머물고 있는 고종을 협박하여 전투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을 입궐하게 하고, 그에게 정무(政務)와 군무(軍務)를 결재하도록 하는 왕명이 내렸다. 일본의 계획은 그들의 뜻대로 하나하나 진척되어갔다. 


일본은 갑오변란을 일으킨 후, 우리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친일 성향의 김홍집(金弘集)을 총리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출범시키고, 내정개혁(內政改革)을 추진하였다. 이것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 하는데, 조선침략을 위한 길닦기였다.  


김홍집 내각은 임시합의기관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고, 김홍집이 총재관을 맡으면서 김가진(金嘉鎭)·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이윤용(李允用)·안경수(安駉壽)·박정양(朴定陽)·유길준(兪吉濬) 등 17명의 위원을 임명하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때 중앙정부조직을 의정부(議政府)와 궁내부(宮內府)로 나누고, 권력의 중심을 의정부로 옮기면서 국왕의 전제권(專制權)을 제약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밖의 주요내용은 청나라와의 주종관계의 청산, 각종 법제의 개편, 화폐제도의 개혁, 도량형(度量衡)의 개정, 반상신분(班常身分)의 철폐, 과거제도(科擧制度)의 폐지, 공사노비(公私奴婢)의 혁파, 과부재가(寡婦再嫁)의 허용 등이었다. 


제국주의 세력에 빛바랜 개혁

항일의병의 단초가 되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은 낡은 옛 질서를 버리고 근대화를 촉진하기 위한 자유평등사상에 터 잡은 것이지만,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에 의한 것으로서 빛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이 개혁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위한 길닦기에 다름 아니었다. 

이처럼 갑오개혁의 배후에 일본세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갑오변란에 대한 민중들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겹쳐지면서 항일의병(抗日義兵)으로 표출되었다. 그 앞자리에 공주(公州)의 유생 서상철(徐相轍)이 있었는데, 그는 1894년 7월 25일(음력 6월 23일) 경상도 안동에서 창의하였다. 이것이 갑오의병(甲午義兵)의 시작이었다.


이날 서상철은 경상도 전역에 호서충의서상철포고문(湖西忠義徐相轍布告文)을 배포하고,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우리 주상(主上)을 위협하고 백관(百官)을 핍팍한 것과 호위병을 몰아내고 무기고를 약탈한 것은 신민(臣民)으로서 너무나 슬퍼 차마 말할 수조차 없다.… 이 삼천리(三千里) 강토에 관을 쓰고 허리띠를 두르고 사는 마을에 혈기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김상기 『한말의병연구』 중에서)  


서상철이 지휘하는 안동의진(安東義陣)은 일본군 병참대(兵站隊)가 있는 경상도 상주(尙州)의 함창(咸昌)을 공격하였는데,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때 안동의진에는 한인석(韓麟錫)·이경재(李罄載)·한수동(韓守東) 등도 함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을미사변으로 반일감정 격화

이어진 단발령 선포가 기름 부어 


그러나 항일의병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갑오변란이 있은 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러시아를 끌여들였다고 판단한 일본이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 공사로 하여금 황후의 제거에 나섰다.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검객과 낭인(浪人)들이 궁궐에 난입하여 황후를 참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였다. 이것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다시 반일감정이 격화되었다. 더욱이 을미사변에 뒤이어 단발령을 선포하자 항일의병들의 투쟁에 불을 당겼다.  


이 의병을 을미의병(乙未義兵)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갑오의병의 연장이었다. 그리고 을미의병의 중심에 춘천(春川)·지평(砥平)·홍주(洪州)·제천(堤川)·안동·문경(聞慶)이었는데, 1896년(高宗 33년)에 접어들면서 그 세(勢)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춘천의 이소응(李昭應), 지평의 이춘영(李春永)·안승우(安承禹), 홍주의 김복한(金福漢)·이설(李偰)·안병찬(安炳瓚), 제천의 류인석(柳麟錫)·서상렬(徐相烈)·이필희(李弼熙), 안동의 김도화(金道和)·김흥락(金興洛)·권세연(權世淵), 문경의 이강년(李康秊) 등이었다. 이 밖에도 진주(晋州)의 노응규(盧應奎), 나주(羅州)의 기우만(奇宇萬), 순창(淳昌)의 최익현(崔益鉉), 갑산(甲山)의 홍범도(洪範圖)의 활약이 돋보인다. 


1894년의 갑오변란과 1895년의 을미사변에 따른 갑오·을미의병은 전국 유생들의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항일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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