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1/07]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 대일항쟁에 나선 의사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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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특권 버리고 열사가 된 의사들
대의(大意) 위해 대의(大醫)의 길로
글 | 편집부
1886년 9월에 시작된 제중원 의학당의 근대 의학교육은 제반 여건의 미숙으로 의사를 배출하지 못했고, 1899년 3월에 설립된 의학교 역시 발걸음을 막 뗀 실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몇몇 조선인들이 외국에서 의사가 되어 돌아왔다. 대표적인 인물이 서재필이다. 김정동(박에스더)과 오긍선도 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다. 김익남, 안상호, 박종환 등은 관립 일어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로 조선 정부가 일본으로 보내 의사가 되었다. 의사들의 독립운동은 의학교육이 결실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특히 1908년을 전후해서는 일제의 조선 침략이 노골화된 시점이었고, 비밀조직 신민회가 결성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었던 신민회 조직원 김필순은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졸업 직전, 군대 해산으로 부상당한 조선인 병사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현실을 실감하게 되었고,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최전선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의사로서 그의 활동이 1907년 시작되었으므로 의사들의 본격적인 독립운동도 그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3·1운동은 의학도의 삶을 바꿨다. 1919년 3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한국인 학생들이 독립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가 이후 독립운동가로 살아갔다. 그들 중 김형기, 한위건, 이의경(이미륵), 유상규 등이 있다. 3·1운동 선두에 섰던 경성의전 한국인 학생들 중 32명이 재판에 회부됐으며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경성의전 한국인 학생 208명에서 15%에 달한다. 의전 학생들이 앞장섰던 3·1운동을 분기점으로 의사들의 독립운동은 국내외, 수도와 지방 가릴 것 없이 본격화되었다. 3·1운동 이후에는 의사로서의 가담뿐 아니라 무력투쟁에 나선 이들도 적지 않았고, 언론인이나 비밀조직원으로 활약했다. 국내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뛰어든 의사도 있었고, 여성운동을 펼친 의료인들도 있었다. 상해 등 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군의관으로 활동한 인물, 미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이들, 일제의 본토에서 목숨을 걸고 저항하던 유학생 등 의사이거나 의학생이었던 이들의 활약은 다른 전문 분야의 독립운동 참가와 비할 바 없이 수적으로도 많고 광범위했다. 김필순, 독립운동가들의 주치의 제중원 의학도 시절, 당시 교장이었던 에비슨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한국 의학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키우려 했다. 1908년 6월 졸업 후 의학교 교수로 임명되었고 1910년에는 의학교를 책임지는 학감으로, 1911년에는 병원의 외래책임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김필순은 일찍이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있었다. 제중원의학교 재학 중에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상동교회에서 구국운동을 펼쳤고, 이후 세브란스 병원에 재직하면서는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제공하기도 했다. 안창호와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으며 1907년에 신민회를 조직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적극 동참했다. 김필순은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 마련에 적극 참여했다. 치치하얼에 병원을 열어 부상당한 독립군의 치료는 물론, 독립운동가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도록 했으며, 거의 모든 수입을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했다. 1919년 일본인 의사에 의해 독살 당했다.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태준, 한·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 이태준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일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도산 안창호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큰 영향을 받았다.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의 외곽단체였던 청년학우회에 가입, 국권회복운동에 나섰다. 이후 김필순과 함께 중국 남경으로 망명, 안창호와 서신을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도모했다. 1914년에는 비밀 군관학교를 설립해 무장독립운동의 역량을 확보하고자 했던 김규식의 제안에 따라 몽골 고륜(울란바토르)으로 옮겼다. 근대적 의술을 베풀면서 몽골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주요한 비밀 항일활동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장가구와 고륜 사이를 오가는 애국지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의를 제공했으며,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 2천 원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태준은 한인사회당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면서 소비에트정부로부터 확보한 자금 운송에 참여했다.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후 북경에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했다. 당시 단원들이 사용하던 폭탄이 질이 좋지 않아 손실이 컸기 때문에 의열단은 우수한 폭탄제조자를 찾고 있었다. 이태준은 기술자를 소개하기로 하고 고륜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본군 장교와 손잡은 러시아 백위파부 대원에 의해 피살됐다. 정부는 1980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나창헌, 의열투쟁에 앞장선 독립투사 1919년 5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하고 특수임무를 맡았다. 나창헌은 고종의 아들 이강과 김가진의 국외 탈출 계획을 추진해 김가진을 그해 10월 상하이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강을 변장시켜 중국 안동까지 동행했으나 일경에 적발되면서 망명은 실패하고 만다. 이후 3·1만세시위 같은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무력으로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의열투쟁을 시작했다. 1920년 봄 그는 동지들과 뜻을 모아 ‘철혈단’을 결성했다. 철혈단은 꾸준히 암살 파괴활동을 벌였고, 1925년 정위단을 조직했다. 독립운동가를 사칭해 동포들의 금품을 강탈하는 자들을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정위단을 기반으로 병인의용대를 결성해 실추된 임시정부의 권위회복 및 의열투쟁에 매진했다. 나창헌은 병인의용대원들을 지휘해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 세 차례에 걸친 폭탄투척의거를 전개했다. 비록 폭파 계획은 실패했지만 건물 유리창이 깨지고 부속 창고와 건물들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36년 위암으로 상하이에서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참고자료: 『열사가 된 의사들』 (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