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1/08] 충남 홍주의진(洪州義陣)의 이근주 의병장
페이지 정보
본문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며 자정 순국
후학들에게 민족적 각성 촉구하고 항일투쟁 고취
글 | 편 집 부
이근주 선생의 자결은 평소 삶의 자세로 삼았던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 즉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한 것이다. 선생과 함께 의병을 규합했던 김복한은 의로움을 취했으며 인을 이루었다고 그의 공적을 기렸다. 이근주 선생의 죽음은 개인의 희생에 그치지 않고 후학들에게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정부는 이근주의 공적을 기리어 1991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1910년 의병장 이근주 자정 순국하다
이근주는 충남 홍성의 사족 출신이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청광(淸狂)이며, 본관은 전의. 어려서 부친한테 한문을 배운 뒤에는 주로 산사에 들어가 홀로 학문을 깨치고자 하였던 이다. 스물두 살 때(1881) 공주 마곡사의 부용암에서, 이듬해는 덕산사에서, 1884년에는 결성의 고산사에서 독학하였다.
그는 『맹자(孟子)』 가운데 「고자(告子) 상(上)」에 있는 ‘웅어장(熊魚章)’을 좋아했다. 웅어장은 맹자가 ‘사생취의(捨生取義 : 목숨을 버리고 의를 취함)’ 정신을 강조한 장이다. 이근주는 평소 “뜻을 세우고 몸소 행함에 마땅히 웅어 편으로 기준을 삼고 구차함을 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곤 했다.
“맹자 가라사대, 생선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바이며, 곰 발바닥도 내가 먹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이며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홍주성 안에 창의소(倡義所)가 설치되었으며, 김복한이 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김복한 등 주도자 23명을 붙잡아 가두었다. 이근주가 면천(沔川)에 있는 백형(伯兄)의 집에 모친을 뵈러 간 사이였다.
“의리는 의거(義擧)에 있는바, 이 대사는 하나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둘은 단발(斷髮)의 수치를 갚는 것입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의리상 홀로 도피할 수 없으니 자수를 하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근주는 홍주성에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노모와 형이 “네가 의(義)로서 더불어 나가 죽는 것은 마땅하나 다른 날 다시 도모함만 못하다”라고 만류하여 들어가지 못했다.
지도급 인사가 붙잡히는 바람에 제1차 홍주의진은 무너졌다. 김복한과 홍건(2009 건국포장)·안병찬(1990 애국장) 등은 서울로 압송되어 이듬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근주는 이후 1896년에 조의현 등이 청양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고 돌아와서 울분을 이기지 못하였다.
을사늑약 후 1906년에 결성된 제2차 홍주의진은 전 참판 민종식(1861~1917, 1962 대통령장)을 대장으로 옹립하여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각지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제2차 의진은 5월 31일 새벽 홍주성이 일본군의 총공격으로 점령될 때까지 활약하였다.

「절의가」에서는 매국의 무리로 더럽혀짐을 한탄하고 백이(伯夷)와 노중연(魯仲連) 같은 충의지사의 절의를 칭송하였다. 「화심주가」는 중국으로 망명함을 거부하고 고국에 남아 있는 자신의 심정을 읊은 노래다. 「신년탄사」(1910)는 그가 50세가 된 것을 기념하여 지은 것으로, ‘지천명(知天命)’의 나이가 되어 나라를 위함을 알지 못하고 단지 수심만을 하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태일자문답약초」는 그가 ‘태일자(泰一子)’란 가상의 벗과 대화한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나라가 망한 뒤 취할 길에 대하여 자문자답한 글이다. 그는 이때 자결의 뜻을 세운 것으로 보이는데, 포의(布衣)로서 의를 취하는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병마에 괴로워하다가 죽음을 취한 것이다”라고 할 것이니 이것이 원통하다고 하였다.
“위기(爲己)의 학문인가, 위인(爲人)의 학문인가. 배운 대로 행하라!”
이에 대하여 태일자는 “그대의 평일에 배운 학문이 위기(爲己)의 학문인가! 위인(爲人)의 학문인가! 이는 어찌 평일에 바라던 바가 그대의 말과 같겠는가!”라고 하며 세인의 말에 구애받지 말고 평일에 배운 대로 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가 남긴 글로는 1905년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자결한 민영환의 방에서 혈죽(血竹)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만사(輓詞)가 있다. 그는 여기에서 “나라가 없는데 공이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라면서 그의 죽음을 기리고 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國恥)의 비보를 접하고 이근주는 “나의 의는 적도(賊徒)와는 함께 살 수 없다”라 하고, 대궐에 나아가 적신(賊臣)의 죄를 성토하려 했으나, 병이 심하여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자결로 항거하고자 하였다.
“삼천리 강토가 원수 오랑캐의 땅이 되고 5백 년 예의의 나라가 변하여 오랑캐 나라가 되었으며, 한 나라의 임금이 갑자기 이적의 신민이 되었습니다. 절조가 있는 선비로서 어찌 편안히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겠습니까. 이는 개와 돼지와 같은 것이고, 또한 매국한 무리들과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삶을 훔치겠습니까.”
1910년 9월에 백형 이근하(李根夏)의 환갑잔치가 끝난 뒤 이근주는 중형(仲兄)에게 자결의 뜻을 밝히고 부모님의 유택 앞에 나아갔다. 준비한 주과로 제사를 지낸 뒤, 소나무에 기댄 채 목과 옆구리, 가슴 등을 찔러 마침내 목숨이 끊어졌다.
“의로움을 취해 인을 이루다”

한편, 이근주와 홍주 의병을 함께하고 홍주의진의 활약상을 담은 「홍양기사(洪陽記事)」를 지은 임한주(1990 애국장)는 「이근주전(李根周傳)」과 「대한의사청광이공근주묘갈명(大韓義士淸狂李公根周墓碣銘)」을 썼다.
굳고 굳음은 쇠와 돌 같은 마음이고,
밝고 밝음은 해와 별 같은 절개로다.
오직 그 판단이 명철한지라.
이 때문에 행실 또한 그렇게 열렬했도다.
대저 그 생명을 버리고 순국한 일은,
다만 나라가 망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참으로 중화문물의 이어짐을 위해
하루아침에 놈들과 끊은 것이로다.
천년이 앞에 있고 만세는 뒤에 있으니
춘추대의를 아는 사람 있으면
아마도 이 말의 참뜻을 알리라.
- 「대한의사청광이공근주묘갈명
(大韓義士淸狂李公根周墓碣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친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여러 형태로 진행되었다. 충의를 최고 덕목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의병투쟁에 참여하거나 독립투쟁을 위해 망명의 길을 떠나기도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일제의 침략에 저항했다. 그것은 일견 매우 소극적인 저항이었지만, 자신을 파괴하여 죽음에 이르는 비장하고 처절한 저항이었기에 가장 적극적인 투쟁으로 간주할 수도 있었다.
을사늑약(1905) 전후부터 군대해산(1907)에 이르기까지 민영환과 박승환 등 적지 않은 이들이 죽음으로 일제의 침략에 항거했다. 경술국치(1910) 이후에도 이 자정(自靖) 순국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자정 순국, 소극적이되 적극적 투쟁
전국에서 자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북 안동에선 이명우(1872~1920)·권성(權姓, 1868~1920) 부부가 함께 자결 순국했다. 부부가 순국한 사례도 유일할뿐더러 권성 부인은 일제강점기에 자결 순국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충청도에선 국치일 저녁에 목숨을 끊은 홍범식(벽초 홍명희의 부친)을 비롯하여 2013년까지 모두 10명이 순국했다. 대전의 송병순(1839~1912)은 을사늑약 후 순국한 형 송병선(1836~1905)의 뒤를 따랐다. 이강년의 을미의병(1896)에 함께한 의병장 김상태(1864~1912)는 옥중에서 곡기를 끊어 순국했다.
이근주는 충남의 내포 지역(충남 북서부) 출신으로는 유일한 순국 지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