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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1/08] 3월의 전설(72회) ┃ 평북 용천군의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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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들판’에서 펼쳐진 5천여 대군중의 외침 

“하늘 이치에 따랐는데 무슨 죄가 있으랴”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용천은 신의주 아래에 있는 국경지역 군이다. 압록강 하구의 토끼 모양 한국 지형의 입에 해당하는 위치이다. 서울-신의주 간 경의선 철도가 신의주에 종착하기 전에 용천군을 지난다.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 상류의 산림벌채권과 군사전략적 가치 때문에 용천군 용암포를 조차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일본이 이에 반발하여 이듬해 러일전쟁의 꼬투리가 되었다. 항일투쟁기에 이 지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이는 열정적인 평안도 기질과 압록강 건너 만주 독립군 근거지와 가까운 거리. 육해상 및 하상 교통의 발달 등과 관련이 깊다.


용천군은 낮은 구릉 평야와 삼각주, 압록강 중간 섬들이 있어 농업에 유리하고, 일찍이 기독교가 전파되어 용천 들판을 ‘기독교 들판’이라고 했다. 용천에는 1898년 동문외교회와 신창교회가 처음 설립되었다. 교회들은 사립학교를 병설해 외국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립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천도교도 동학농민운동 이후 삼남지역에서 큰 탄압의 피해를 입은 후 서북지역에서 급격히 교세를 확장했는데, 용천도 천도교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3월 1일 바로 북쪽에 인접한 의주, 남쪽의 선천에서 서울과 동시에 독립선언서 선포와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그 소식이 곧바로 용천으로 전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뒤인 3월 3일부터 3월 4일에 걸쳐 용천의 양하면 양시(楊市)를 비롯하여 의주 외곽의 비현면, 신의주에서 선언서가 전달되고 독립만세를 불러 만세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3월 3~4일 양하면 양시(楊市) 1, 2, 3차 시위 


용천군 양하면 양시에서는 3월 3일 저녁 9시경부터 사람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지를 행진했다. 용암포경찰서와 양시 경찰관 주재소 순사들이 출동했으나, 밤 늦은 시각이었고, 아직 상부로부터 어떤 지침도 받지 못해 사복을 입고 시위대에 끼여 사태의 추이를 살폈다. 


다음날인 3월 4일은 양시 장날이었다. 면 소재지인 시남동(市南洞) 김득영(金得永) 상점에서는 아침부터 시위 준비자금을 모금했다. 모아진 돈은 이익조(李益祚)에게 전달되었다. 정오 무렵 시남동 방면에서 5천여 명의 대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시동동(市東洞)에 있는 시장으로 물밀 듯이 밀려왔다. 이들은 태극기와 독립기를 시장 중앙에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최영선(崔永善)과 양서면 동평동 문삼언(文三彦, 40세, 농업) 등은 시장 중앙에 세운 연설대에 올라 연설을 했다. 문삼언은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독립을 승인하였다는 전보가 있어서 관령으로 반포되기 전에 민중은 솔선해서 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확신하였다”고 하며 감사의 연설을 했다. 그는 또한 “최영선 등 수명이 조선독립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 대에 올라 연설할 때에 용암포 경찰관리 십여 명은 방관하는 것을 보고 “파리 평화회의의 민족자결 문제에 응해서 조선의 독립이 승인되었다는 전보가 일본 정부로부터 총독부에 도달하였다”고 했다. 군중 속에 강(姜)경부 등 여러 명이 있었는데. 픽 웃기만 할 뿐 어떤 제지도 하지 않았다. 문삼언은 나중에야 일경들이 상부의 지침이 내려오지 않아 체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들어 알았다. 


용천 양시 만세시위는 최영선(崔永善)과 선천중학교 교사 공수(孔洙) 등 10여 명이 주도했다.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약 5천 명의 군중이 깃발을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최영선, 공수(孔洙) 등 10여 명이 나팔을 불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양하면 시동동(市東洞) 김영옥(金英玉, 24세, 학교 교사)은 “3월 4일 12시경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약 1시간이 지나서 다시 등교를 한 즉 교실에는 한 사람도 없이 거리로 나갔었고, 이미 양시(楊市)에는 수천 군중이 모여서 만세를 부르고 나팔을 불며 시가를 행진하므로 피고도 여기 따라 참관하였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양하면 시남동 조영화(趙永華, 23세, 음식점업)는 “3월 3일 오후 7시경 김득영(金得泳)의 상점을 지날 무렵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말하기를 ‘조선독립은 확실하다. 평양·선천·의주 각 지방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읍내에는 오후 9시경부터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시가지를 돌고 있는 것을 보고 독립은 확실하다고 믿었다. 또한 용암포경찰서 및 주재소의 각 관리는 전부 사복을 입고 찬성하는 것처럼 하고 만세부르는 군중에 수행하므로 심중에 확실히 독립하였다고 믿었다”고 했다. 


순사들은 전날 밤 시위 때와 마찬가지로 시위대를 막거나 주도자를 잡지 않았다. 용암포경찰서에서 나온 10여 명은 종일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동향을 살폈다. 일단 시위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그날 저녁 9시경 약 600명이 다시 모여 제3차 시위에 들어갔다. 이때에는 초파일처럼 제등을 들고 만세 행진을 재개하였다. 이때서야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하고 주도자 20명을 붙잡아 갔다. 3월 3일, 4일의 3차 시위에 참여했던 27명이 검거되었다. 


3월 6일 외상면 남시(南市) 시위


외상면 남시동(南市洞)에서는 3월 6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경찰이 이를 탐지하여 주도면밀한 경계에 나섰다. 그럼에도 3월 6일 오후 2시경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약 200명이 남시 장터에 집결했다. 시위대는 현행묵(玄行默), 전달현(全達賢), 정이정(鄭利貞), 이국영(李國永) 등이 앞장서서 이끄는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행진을 시작하였다. 경계하던 경찰이 해산을 명했다. 군중은 해산명령에 불응했다. 차령관(車輦館)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에서 보병이 응원 출동했다. 경찰과 철도원호대 병력이 시위 군중을 저지하여 결국 해산시켰다. 주모자 6명이 체포되었다. 만세시위는 오후 3시경 끝났다. 


3월 25일 용천면 시위


3월초 일어났던 만세시위가 두어 주 소강상태를 거친 후 3월 하순 들어 다시 불타올랐다. 3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 군청소재지인 용천면 용암포(龍岩浦)에서 기독교인, 천도교인, 일반민 등이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25일은 용천면 용암포 장날이었다. 정오가 되자 용암포 시장에 약 1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시위대는 독립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일대를 행진하였다. 용천면 덕봉동 서정량(徐廷亮, 32세 농업)은 군중 속에서 누군가가 독립기를 주며 “독립만세를 부르시오!” 하는 권유를 받고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기를 흔들면서 시가를 왕래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시위로 28명이 검거되었다. 


후지카와 리자부로(藤川利三郎) 평안북도장관은 3월 27일 “3월 25일 정오경 약 1천 명의 한 무리가 용천군 관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개시하고 보통학교, 군청 및 경찰서에 쇄도하였으나 주모자로 인정되는 자 20명을 검거하고 무사히 진정하였음”하고 보고한 것을 보면 용천면 만세시위가 자못 공세적인 양상을 띠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월 31일 부라면 송현동, 4월 1일 양광면 시위


3월 31일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府羅面) 송현동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등 100명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날 시위로 13명이 검거되었다.


4월 1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광면에서 500명의 군중이 양광면사무소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고 면장을 협박하였다.


양하면 시남동 김천홍(金天鴻, 30세)은 양하면 양시(楊市) 유죄판결을 받았는데(형량이 확인되지 않음) 만세시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고등법원까지 법정투쟁을 벌였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본인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무죄라고 믿었다. 이유는 13도 방방곡곡에서 인민이 모두 만세를 부른 것은 이것은 인력에서 된 것이 아니고 하늘의 마음이라, 본인은 하늘 이치에 따라 만세를 불렀는데 무슨 죄가 있으랴, 본인은 하늘 이치에 따랐으므로 무죄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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