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1/09] 우양 허정의 삶과 자유민주주의의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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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정부 이끌며 자유민주주의 실현에 앞장선 정치인
일초라도 아껴 내 땅 위에 내 나라를 세우리라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우양은 열다섯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탄된 것은 지도자들이 국제정세에 어둡고, 파벌싸움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면 공부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양은 1915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3·1독립운동이 있은 직후 해외(海外)로 나가서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중국 상해, 프랑스 파리를 거쳐 미국 워싱턴에 도착,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독립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순간, 우양은 해외생활을 통해 몸에 익힌 선진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리라 마음을 굳혔다.
1988년 9월 18일, 우양(友洋) 허정(許政)이 세상을 떠났다. 올해가 그의 33주기가 되는 해이다.
이 회고록 첫머리의 「송풍정(松楓亭)에 앉아서」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나는 이 정자에서 소일하기를 좋아한다. 송풍정에 앉아 소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리고 있노라면, 문득 역사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인생 팔십을 살고 보니 가장 두려운 것이 역사임을 절감하게 된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비록 어릴 때이지만, 나는 한 제국이 멸망하는 처참한 역사적 사건을 겪었고 망국민(亡國民)의 한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때 내 마음에는 애국의 일념이 굳게 자리잡았다”로 이어진다. 이것이 우양의 험난한 삶의 시작이었다.

우양은 비록 열다섯 살 어린 나이였지만, 나라 잃은 망국민으로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했다. 이때, 그는 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병탄된 것이은 지도자들이 국제정세에 너무 어둡고, 파벌싸움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면 공부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그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서 교장 윤익선(尹益善), 학감 남형우(南亨祐)의 지도를 받으면서 사제간의 인격을 교류하고, ‘민족의 중요성’을 깨달아갔다. 그리고 여기서 보고 배운 것을 내 조국을 위해서 실천에 옮겨가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우양은 1915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3·1독립운동이 있은 직후 해외(海外)로 나가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특히, 3·1독립운동을 몸소 겪으며 또 한 번 ‘민족의 의미’를 떠올리게 되면서, 나라의 장래를 고민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결의였던가.
우양은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중국 상해(上海), 프랑스 파리(Paris)를 거쳐 미국 워싱턴(Washinton D.C.)에 도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와의 만남을 통해서 독립운동에 관여하게 되었다. 구미위원부는 구미지역에 있는 임시정부의 재외공간(在外公館)이었는데, 우양은 이곳에서 교포들로부터 인두세(人頭稅)를 거두어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인두세를 걷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독립운동에 일조하는 일이었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한편, 이때 이승만(李承晩) 박사와의 만남은 뒷날 정치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4년 만에 돌아온 조국
정치인으로의 새 출발
그런데 14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그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서 일제의 감시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부딪친 문제만 하더라도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 넘어야 할 고비가 많았거니와 일제의 독아(毒牙) 앞에서 하루하루 위축되어가는 민족의 기백을 눈으로 보면서 참을 수 밖에 없었던 처참한 심정, 그리고 여기서 오는 좌절감을 억제하고 달래는 것은 쉽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했던가. 미국·영국 등의 연합국(聯合國)은 일본의 오만한 태도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최후의 발악을 멈추었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우양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젊은 시절, 망국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우양의 마음에 자리잡은 ‘애국’이 광복 후에 그를 정치의 길에 뛰어들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해방 후, 본격적으로 정치에 관여하면서, 나는 정치를 한다는 생각보다는 애국을 한다는 생각을 앞세웠다. …… 다만 나는 숱한 애국의 길 중에서 정치라는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또 우양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일초라도 아껴, 일초라도 빨리 일제가 폐허로 만든 아름다운 내 땅 위에 우리 겨레가 진정 사랑할 수 있는 「내 나라」를 세워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모스크바삼상회의가 던진 ‘신탁통치안(信託統治案)’은 광복의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아가고 말았다. 이로써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의 소용돌이가 한반도(韓半島)를 끝간 데 없이 휘몰아쳤다. 그렇지만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국제연합(UN)의 감시하에 총선거(이른바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우양은 부산에서 제헌의원(制憲議員)에 당선됨으로써 이제 정치인으로서 새 나라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1948년 8월 15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탄생하는 순간 그는 얼마나 환희했는지 모른다. 이로써 우양은 해외생활을 통해서 몸에 익힌 선진한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리라 마음을 굳혔다.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것은 거기서 보고 배운 것을 내 나라에 실현하리라는 소명(召命)으로 여겼다. 나에게 주어진 이 사명을 얼마나 성실하게 수행하는가에 나의 삶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각오로 나는 정치 일선에 나섰다. 따라서 해방 후, 나의 정치활동의 초점은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었다.”
우양은 1960년 4·19 학생혁명 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생긴 행정부의 공백을 메꾸어야 하는 과도정부(過渡政府)의 수반으로서, 국민의 뜻을 받들고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이로써 내각책임제 개헌을 통한 제2공화국을 출범케 하였다. 그의 삶에 존경을 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