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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1/10] 규암 김약연의 삶과 민족교육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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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암재에서 명동학교까지 이어진 조국독립의 일


민족교육 씨앗 뿌려 우뚝한 독립운동가 배출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899년 규암은 가족을 거느리고 중국 땅 간도로 이주하여 동지들과 힘을 모아 명동촌을 건설하고, 1901년 민족교육의 요람 규암재를 열어 청년교육을 실시했다. 이후 서전서숙의 숙장 이상설이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로 떠나자, 명동서숙을 설립하여 서전서숙의 교육정신을 이어갔다. 1909년에는 명동서숙을 명동학교로 개편하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 교장을 맡아 국권회복의 일념으로 교육에 전념하였다. 규암재로부터 시작된 민족교육은 서전서숙·명동서숙을 거쳐 명동학교·명동중학교로 이어지면서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한국 영화계의 기린아 나운규, 민족시인 윤동주가 그 앞자리에 있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 위한 삶


규암(圭巖) 김약연(金躍淵)의 일생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한 삶이었다. 그는 1868년(고종 5년) 10월 24일 함경북도 회령의 가난한 농가의 4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여덟 살 때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면서 세상에 눈떠갔다. 그런데 이 무렵에는 나라의 정세가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것이 1873년 고종이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이 전권을 내려놓고, 운현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때는 외세의 압력이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 앞자리에 일본이 있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조선을 넘보게 되었는데, 나날이 침략의 야욕을 키워갔다. 일본의 이러한 야욕은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침입하면서 조(朝)·일(日) 간에 군사충돌을 빚었는데, 이를 빌미로 이듬해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朝日修好條規)을 체결하고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부산항·인천항·원산항이 개항되고, 일본인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면서 우리의 먹을거리마저 하나둘 그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뒤이어 미국·영국·청국·러시아·프랑스 등 세계열강들의 손길이 밀려들었다. 1882년 조·미 수호조규(朝·美 修好條規)를 시작으로 하여 영국·청국·러시아·프랑스 등과 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통상이라는 이름으로 외세의 물결이 빠르게 밀려들어 왔다. 이러한 와중에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과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을 겪으면서 청(淸)·일(日) 두 나라가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쟁탈전이 가시화되었다. 이에 더하여 미국·영국·러시아·프랑스 등도 조선을 옥죄어왔다. 그러나 우리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이렇다 할 방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시간은 속절 없이 흘러갔다. 


1889년에는 전주를 시작으로 하여 길주·정선·광양·수원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 조정을 긴장시켰다. 1890년과 1891년에도 함창과 고성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1892년에는 함경도의 함흥과 덕원에 이어 회령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민심이 나날이 흉흉하였다. 이때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은 빈궁에 허덕이고 있는 농민들이 그 중심에 있었는데, 외관상으로는 소수의 토지소유자와 빈농층의 갈등으로 나타났지만, 그 원인은 삼정(三政)의 문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조차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져만 갔다. 


1894년 6월, 이러한 상황에서 친일 성향의 인사를 중심으로 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출범하면서 내정개혁이 숨가쁘게 몰아쳤다. 이것을 이른바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는 일본의 조선침략을 위한 길닦기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을 위한 비열함은 줄을 이었다. 1895년 10월, 우리나라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휘하 군인들을 지휘하여 명성황후를 참살하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외교사절이 주재국의 황후를 참살한 사건은 어느 나라의 외교사에도 찾아볼 수가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참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암담한 일을 지켜본 규암은 더 이상 침묵할 수가 없었다. 나날이 기울여져가는 조국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섰다. 규암은 뜻을 같이 하는 동지(同志)들과 함께 고난과 망명(亡命)의 길을 선택하였다. 

  

독립운동가 양성에 나서다 


1899년 규암은 김정규(金定奎)·김하규(金河奎)·문치정(文治政) 등과 함께 가족을 거느리고 중국 땅 간도로 이주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조국광복의 꿈을 키워갔다. 


그는 간도에 정착하여 동지들과 힘을 모아 명동촌(明東村)을 건설하고, 1901년에 민족교육의 요람 규암재(圭巖齋)라는 사숙(私塾)을 열고 청년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첫발을 떼었다. 이것이 항일독립운동가의 양성이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한편,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일본에 의해서 외교권이 박탈된 후 만주로 망명 온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 등이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간도의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림함으로써 간도가 항일운동의 교두보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1907년 4월 서전서숙의 숙장(塾長)을 맡고 있던 이상설이 고종황제의 특사로서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Hague)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간도를 떠나게 됨에 따라 서전서숙은 폐교를 맞고 말았다. 


그럼에도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교육을 중단할 수는 없는 터였으므로 애국지사들이 뜻을 모아 1908년 4월 화룡현(和龍縣) 명동촌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서전서숙의 교육정신을 이어갔다. 숙장은 박무림(朴茂林)이, 숙감은 규암이 맡았다. 1909년에는 명동서숙을 명동학교(明東學校)로 개편하고, 규암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또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병설하였는데, 규암이 교장을 맡으면서 국어에 장지영(張志暎)을, 국사는 황의돈(黃義敦)을, 윤리에 박태환(朴泰煥)을 교사로 초빙하였다. 이로써 교장과 교사 모두가 오로지 국권회복의 일념으로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처럼 1910년에 병설한 명동중학교는 우수한 교사 진용을 갖추고 민족교육을 펴나감으로써 교세가 나날이 확장되어 나갔으며, 1911년부터는 여성교육에도 눈을 돌렸다. 규암재로부터 시작된 민족교육은 서전서숙·명동서숙을 거쳐 명동학교·명동중학교로 이어지면서 우뚝한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한국 영화계의 기린아 나운규(羅雲奎), 민족시인 윤동주(尹東柱)가 그 앞자리에 있었다. 


1913년 5월에 규암은 한인들의 자치기구인 간민회(墾民會)를 창설하고 회장에 취임하여 한인들의 자치권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의 고취에 힘썼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이 제안한 ‘민족자결의 원칙’(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은 규암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남으로써 간도 용정에서도 3월 12일에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규암이 간도에 뿌려놓은 씨앗이 싹을 틔운 귀한 열매였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2년 10월 29일 간도에서 영면의 길에 들었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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