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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1/10] 경남 진주의 만세시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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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 사이에 두고 양안 군중들의 함성 산천 뒤흔들어


상하일치 대동단결의 일대 드라마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3월 19일 시위는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12시간이나 진행되었으며, 체포된 사람이 200명이 넘었다. 이렇게 진주에서 크고 강력한 시위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매일신보』는 “진주 소요범인에 재산가가 다수”라는 분석기사를 실었다. 진주의 대규모 시위는 가진 자들이 솔선수범한 결과 거지와 기생까지 호응하여 상하일치 대동단결의 일대 드라마를 보여 주었다.  


3월 18일 정촌면민들의 진주읍 시위 합세


진주군 정촌면은 남강 남쪽 약 20리(8.5km)에 있다. 정촌면 관봉리에 사는 강재순(姜在淳)은 고종 국장에 참여한 산청군 단성면 배양리 이병홍(李柄洪)으로부터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았다. 강재순은 독립을 쟁취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종언(李鍾彦)에게 부탁하여 ‘선언서’를 목판에 새겨 수백 매를 찍어 인근 동지들에게 비밀리에 돌리며 각지 유지들을 설득했다. 


그러던 중에 진주 동지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강재순은 진주 읍내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며 강한순(姜瀚淳)·허현(許炫)·이종락(李鍾洛)과 인근 면리 동지를 규합해 갔다. 


 3월 18일 진주 읍내 첫 만세시위가 있던 그날 정촌면에서 5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진주읍내 시위에 합세하려고 출발했다. 정촌면 5천 시위대가 촉석루 건너편 칠암리에 도달했을 때 과수원 일대에 매복하고 있던 일 군경이 돌입하여 격투가 벌어졌다. 서기봉(徐奇峰)과 이준이(李俊伊)가 선두에 섰다가 일 헌병대의 총검에 복부를 찔리어 쓰러졌다. 힘이 장사인 강한순(姜瀚淳)은 한 손에는 큰 태극기를 단 장대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일 헌병들의 장검을 빼앗아 강물에 던지며 군중들을 지휘하여 저지선을 돌파하려 전진해 갔다. 이 광경을 보고 남강 북쪽 진주읍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응원했다. 남강을 사이에 두고 양안(兩岸) 군중들의 함성이 산천을 뒤흔들었다. 


일 헌병이 강한순(姜瀚淳)의 큰 태극기를 탈취하고 시위대의 기세를 꺾으려 하였으나 감히 접근하지를 못하다가, 한 헌병이 포승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던져 잡히고 말았다. 강한순은 진주 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재판소로 송치되는 도중에 포승을 끊고 일경 2명을 발길로 차 거꾸러뜨린 후 진주 비봉산에 올라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행방을 감추었다. 

3월 18일 3만 명, 이튿날인 19일에도 1만 명의 대규모 시위에 걸인시위, 기생시위까지 일어난 진주의 상황에 일제는 당황했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는 3월 19일에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자 상황을 이렇게 보고했다.


•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1보)

경상남도 진주. 3월 19일 오전 11시 진주읍내에서 약 5천 명의 군중이 악대를 선두로 구한국기를 세워놓고 만세를 고창하며 운동을 개시했다. 점차 경상남도 도청 및 경무부로 몰려갈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경비대는 힘을 다해 해산, 진압하려고 노력했으나 쉽게 해산되지 않았다. 드디어 오후 3시에는 투석하는 등의 폭행으로 나와서 오후 4시 30분에는 고압적인 진압, 해산을 시켰으나 형세는 더욱 불온한 징조가 있었다. 밤이 되어 군중의 소집단이 각처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나 폭행에는 이르지 않았다. 오후 11시경 진정되었다. 19일 64명을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다수가 학생이었다. 전날과 이날 체포된 인원은 학생 50명, 기타인 156명으로 합계 206명에 이르렀다. 


3월 19일 시위는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12시간이나 진행되었으며, 체포된 사람이 200명이 넘었다. 이렇게 진주에서 크고 강력한 시위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 『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분석기사를 실었다.  


• 진주 소요범인에 재산가가 다수, 

     - 만 원 이상 가진자가 여섯 명

진주에 대한 소요공판은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개정하고 김재화 외 23명에 대하여 판결 언도를 한 것은 작보에 게재하였거니와 이번의 피고 등은 모두 상당한 재산을 가진 자가 많고 무항산한 사람은 거의 없는데 일만 원 이상을 가진 자가 6명이요 기타 팔천 원 오천 원 가진 자가 많으며 또 이왕 순사보 다닌 자가 3명, 학교 교사가 2명, 회사인도 있고 또 동경 모 대학을 졸업한 자도 있으며 소요한 때에 음악대를 선두로 하고 시중을 돌아다니던 악대도 그 가진자까지 각 여섯 달 징역에 처하였다더라.(매일신보, 1919. 4. 26)


진주의 대규모 시위는 가진 자들이 솔선수범의 결과 거지와 기생까지 호응하여 상하일치 대동단결의 일대 드라마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진주 만세시위는 3월 18, 19일 이틀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3월 20일 제3차 읍내 만세시위 


3월 18일, 19일에 이어 3월 20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날 아침부터 수천 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다시 악대를 선두로 대열을 지어 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르며 진주경찰서로 나아갔다.

일본군 헌병대는 기마병을 출동시켜 시위대열에 뛰어들어 말발굽으로 시위대를 짓밟으며 시위를 탄압했고, 소방대도 동원했다. 이들은 총검과 소방 갈고리를 휘둘러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시위대는 폭력적 탄압 앞에 일단 물러섰다.


일제 당국은 마산으로부터 일군 헌병과 보병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읍내에 경계와 진압 병력이 대폭 증강되었다. 이러한 삼엄한 상황 속에서도 대규모의 시위가 계획되어 갔다.


3월 22일 13도 연합 독립운동 시도 


김영재(金榮在, 40세)는 진주군 금곡면 서기였다. 그는 금산면 가방리의 이교륜(李敎倫, 23세)과 3월 22일 밤 진주면 문안동 여관 이치선(李致善) 집에서 「조선독립의 글」이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작성했다. “조선총대장(大將) 박모가 조선 13도를 조직하려 하니 만민은 여기 기쁘게 복종하여 충절을 격렬하고 외국에게 멸시될 수 없다”는 내용으로 7매, 「조선독립 의뢰」라는 제목으로 “각리의 구장은 각자 민중을 집결 인솔하고 진주 읍내로 도착하여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내용으로 약 10매를 작성했다. 이교륜은 「조선독립의 글」 4매를 그날 밤부터 다음 23일 밤에 걸쳐 읍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앞 전봇대·기타 각 요소에 붙이고, 김영재는 23일 낮까지 위 「조선독립 의뢰」라는 문서를 정촌면·평거면·집현면·대평면의 각 면장에게 부탁하여  면민들에게 반포하게 하려다 체포되었다.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김영재는 징역 8월, 이교륜은 징역 6월을 선고했으나, 대구복심법원 2심 판결에서는 “과형(科刑)이 너무 가벼운 부당성이 있다”며 김영재를 징역 1년, 이교륜을 징역 10월에 처하여 1심보다 더 중형을 선고하였다. 


4월 18일 제4차 읍내 만세시위


첫 시위가 있은 지 한 달이 되는 4월 18일 오후 5시경 법원 진주지청에서 시위 주도자들을 진주감옥으로 호송하는데, 약 3천 명의 군중이 애국 인사들을 구출하려 일어났다. 호송하던 일군 보병이 군중들에게 총기를 난사하여 대구 사람 이육식(李陸植)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강목순 등은 중상을 입었다. 이처럼 진주읍내에서는 대규모 시위와 시위 기도가 계속되다 검거와 탄압으로 일시 주춤했다. 


경남유림대회(慶南儒林大會) 추진


3·1독립만세의 함성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나동면 삼계리 사는 박재룡(朴在龍)은 4월 2일 함양군 지곡면 정치리 한문교사 권도용(權道溶)을 만나 유림도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 후 박재수(朴在秀), 사천군 추동면 길평리 강대익(姜大翼)과 사천면 중선리 김형권(金亨權) 및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권도용(權道溶)과 함께 ‘경남유림대회(慶南儒林大會)’를 조직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려 했다. 


권도용은 서울의 선언서와 다른 독자적인 「조선독립선언서」, 「조선독립충고문」·「조선독립가」·「조선독립경포서(朝鮮獨立警布書)」·「조선독립책선문(朝鮮獨立責善文)」을 만들었다.


박재룡은 이를 가지고 음력 4월말 강대익을 찾아 상의하고, 위의 인사들과 각계각층 애국 군중들이 총 궐기하여 투쟁을 전개하려다 탄로나 박재룡은 징역 2년, 강대익(姜大翼)·김형권(金亨權)·권도용(權道溶)은 징역 1년을 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와 같이 경남 진주는 부유층과 거지, 기생이 하나가 되어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시위를 연속으로 이루어 내는 지역사회의 놀라운 저력을 보여 주었다.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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