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10] 나라말 지킨 한글학자, 언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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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일제 총칼 이겨낸 민족정신 수호자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
글 | 편집부
10월 9일 한글날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하지만 한글날을 처음 제정한 때가 일제강점기였다는 사실은 잘 떠올리지 않는다.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26년,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는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을 ‘가갸날’이라 정하고 서울 식도원(食道園)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한글날의 시초였다. 영화 <말모이>에 나온 대사처럼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이라 믿었기에 한글학자들은 민족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한글날을 만들고, 나라말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언어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나라도 나라말도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으리라.
주시경, 한글 대중화·근대화의 개척자
그는 한글 연구를 결심하고 1893년 6월 배재학당 교사인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가 야학으로 신학문을 지도받기 시작했다. 이들로부터 문명 강대국은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그는 자국어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에게 발탁되어 독립신문사 회계사무 겸 교보원(校補員)이 되었다. 국문담당 조필(助筆)로 서재필의 국민계몽운동을 지원하면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해갔다. 그해 5월에는 ‘국문동식회’를 독립신문사 내에 조직해 한글 연구와 보급의 단초를 제공했다. 국문동식회는 훗날 국문연구회, 조선어연구회,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계승되었다.

1907년부터는 상동 청년학원에 국어강습소를 설립해 한글을 가르쳤다. 이 밖에도 공옥, 이화, 숙명, 진명, 보성, 배재, 중앙 등 20여 학교에서 국어는 물론 역사와 지리 등을 강의하며 민족 정체성을 확인시키고 자주독립 정신을 일깨웠다. ‘앉을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을 만큼’ 분주하게 강의할 책을 큰 보자기에 싸서 이 학교 저 학교로 다녔기 때문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나라를 잃었는데 언어까지 잃게 되면 민족 정체성을 상실함은 물론, 영원히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게 된다고 자각한 주시경은 더욱더 한글의 연구와 교육에 매진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어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했고, 1914년 『말의 소리』를 간행해 국어음운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했다. 하지만 몸도 돌보지 않는 채 연구와 강의를 강행하다 1914년 7월 27일 38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고 말았다.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이윤재, 사전편찬·민족사학에 앞장선 실천가

늦은 나이에 김해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1908년 졸업 후 합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계몽운동에 동참했다. 당시 한글의 권위자였던 주시경을 사숙하면서 연구의 기초를 닦는 한편, 1913년부터 마산 창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조선사 교육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몰래 우리 역사를 교육해 청년 학생들의 민족 정체성과 독립정신을 함양했다.
이윤재는 3·1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 지역 만세시위운동을 앞장서 계획하고 주도했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두루 만나 민족운동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 발표했고, 1936년 10월에는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해 발표했다. 이와 같은 작업을 진행하던 중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어 1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갖은 고초를 당했다. 출옥 후 곧바로 민족의 염원인 사전 편찬 사업에 매진해 이희승, 정인승 등과 함께 1940년 4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를 적용받아 또다시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당했다. 1943년 12월 8일 함흥감옥 독방에서 55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이극로, 조선어말살정책에 맞서 국어독립투쟁

이극로(1893~1978)는 우리말글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다. 언어와 민족은 일체여서 고유한 언어를 잃어버리면 민족은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제강점이 시작된 1910년 마산 창신학교에 들어가 안확에게 역사와 우리말을 배우며 민족의식의 싹을 틔우고, 중국과 유럽에서 유학하는 동안 민족어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그는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에 저항하며 우리말글을 지키는 일을 일생의 소명으로 삼았다.
일제에 대한 그의 투쟁은 국어독립투쟁이었다. 1924년 독일 유학 당시 저술한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침략정책』에서 그는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동화정책을 서방사회에 폭로하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베를린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따고 5~6개 국어에 유창했던 이극로는 1920년대 말 당시 손꼽히는 인재였다. 하지만 귀국 후 보성전문대 총장 등 좋은 자리를 모두 거절한 채 1929년 우리말글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조선어학회를 다시 일으키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주도했다. 또 동료학자들과 함께 민족어 3대 규범집인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감옥에서 복역하다 광복이 되어 풀려났다. 광복 후에도 한글전용운동을 펼치며 『조선말 큰 사전』 1권의 발간을 주도했다. 1948년 월북해 북한에서도 우리말글 연구에 헌신했다. 남긴 책으로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 『고투 40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