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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1/11] 울진 불영사 을사의병 거의(擧義)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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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의 집결지


일본의 어업침탈에 대한 반일감정 분출


글 | 전세중(시인, 나라사랑문인협회 부회장) 


울진은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을 거치면서 의병이 집결되는 거점이었다. 울진 죽변을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일본의 어업침탈이 일찍부터 일어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일반 농어민의 반일의식이 꽤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항에서 의병부대가 울진의 일본군 기지와 일본인 거주지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특히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국권회복이라는 명확한 목표 하에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울진지역은 울진 불영사를 근거지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의병의 습격으로 군청과 경무소 등의 건물이 파괴되고, 행정이 마비될 정도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울진 지역의 의병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 엿볼 수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에 강제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 장악을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에 우리 민족은 여러 형태의 저항으로 맞섰다. 장지연(張志淵)이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발표하여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을 공박하자, 국민들이 일제히 궐기하여 조약의 무효화를 주장하고 을사5적을 규탄하며 조약 반대투쟁에 나섰다. 의병들도 각지에서 일어나 일본 군대와 군사 시설을 공격했다. 민종식(閔宗植)은 충남 내포 지역에서, 최익현(崔益鉉)은 임병찬(林炳瓚) 등과 함께 전북 태인, 정읍, 순창 등지에서, 신돌석(申乭石)은 경북 영해에서 봉기했다.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부자는 경북 영천에서 포수와 농민들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편성했다.


울진에서도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조약을 반대하며 울진군 흥부시장에서 울진인사들이 독자적인 거병을 위한 논의가 있었다. 1906년 2월 김현규가 울진지역 인사들과 울진 불영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울진 불영사 을사의병 거의(擧義)의 성과는 무엇인가. 울진에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의 연관성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울진은 의병의 집결지가 되었으며 일군과 치열한 전투지가 되었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구한말 울진은 의병 활동의 거점이었다 


울진은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을 거치면서 의병이 집결되는 거점이었다. 울진 죽변을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일본의 어업침탈이 일찍부터 일어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일반 농어민의 반일의식이 꽤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자료에 의하면 울진군 죽변진에는 어선 140척, 상선 9척, 한국어민 864명, 일본어민 66명이 살고 있었다. 일본군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울진에 강원도 경무소 산하 울진분서를 설치하였다.


1889년 조일통상장정의 체결로 일본 어민의 조선연해 출어가 합법적인 보장을 받게 되었으며, 이후 일본 어민의 어로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어로 기술면에서나 시설면에서 조선 어민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일본 어민들은 기계화된 어로법을 도입하여 조선연해에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미 잠수기가 달린 어선을 동원하여 미역, 전복, 해삼 등을 채취하였다. 전복 채취 잠수기를 사용하는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비해 10배 이상의 수확을 올렸다. 때문에 한·일 어부들의 충돌은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을미·병'신의병기 울진지역에서는 울진유진소와 평해유진소가 의병항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유진소는 관동창의장 민용호(閔龍鎬)의 지휘하에 있었지만, 독자적인 조직과 활동을 벌였다. 울진유진소는 주병헌(朱秉憲), 전치일(田穉一), 막료 이성린(李聖麟) 안용철(安龍轍), 장병화(張秉夏), 최재린(崔在麟), 박춘근(朴春根) 등과 더불어 설치하였고, 유진장은 주병헌이었다. 평해유진소는 유진장 장필한(張弼漢)과 막료 황경희(黃景禧), 안위(安瑋), 정수(鄭洙) 등이 조직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6년 울진유진소 의병들이 1896년 3월 13일 장기현(長崎縣) 출신의 토교좌구마 등 23명이 탄 일본어선이 죽변항에 나타나자 일본인에게 총격을 가하여 일본어민 15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일본인 산촌삼태랑(山村三太郞)이 부산으로 도주하여 일본 군함에 보고하자, 3월 22일 군함 1척이 죽변 앞바다를 봉쇄하고 한 부대는 상륙하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피난을 가고 일본군은 후당동에서 전복기(田復基), 주계조(朱啓朝), 전정기(田井基), 강국한(姜國漢), 전연심(田淵心), 전영식(田永植) 등 6명을 잡아 사체를 탐색 발굴하여 군함에 싣고 퇴각하였다.


평해유진소는 설치 당시 향인과 아전 사이에 영도권 문제로 알력이 있어 향인만으로 조직되었다. 유진소는 1896년 후포항에 잠입한 일본 어부 8명을 사살하였다.


일제의 군사적 도발을 등에 업은 민간인들의 침탈도 한층 거세졌다. 1905년 5월 15일 일본인 10여 명이 울진군 근남, 근북면 등 연해 수십 곳에 출몰하여, 바닷가 높은 바위에 횟가루를 칠하고 깃발을 세웠다. 그리고는 “이를 뽑으면 일본 형벌로 다스린다”고 크게 써놓았다. 그 이유를 물으니 ‘이곳은 우리 땅이니 너희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5년 12월 23일에는 근북면 죽변에 설치한 망루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해군이 철수하자 고가라는 일본상인이 울진관아에 와서 “죽변에 있는 망루의 땅을 망루와 함께 자신이 샀으니 그 사실을 공문을 발급하라”고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반일의식은 바로 의병항쟁으로 연결되었다. 


울진 지역은 일본인이 이주 정착 과정에서 보여준 노골적인 침탈행위로 반일감정이 더욱 커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항에서 의병부대가 울진의 일본군 기지와 일본인 거주지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을사늑약 반대, 

울진 불영사에 의병이 집결하다


전국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었던 의병항쟁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폭발하였다. 특히 1905년 보호조약 이후에는 국권회복이라는 명확한 목표 하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을사늑약 시 울진에서도 울진 불영사를 근거지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다. 


1905년 12월 7일 울진 인사들, 전배근(田培根)·장진수(張鎭洙)·최경호(崔慶鎬)·전세호(田世浩)·김용욱(金容旭)·전매정(全梅亭)·주낙조(朱洛朝)·박병률(朴炳律) 등은 흥부시장에 모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의논하였다.


1906년 2월 19일 경상도 영양에서 창의한 이현규(李鉉圭, 자 李夏玄) 부대가 울진으로 들어와 불영사에 주둔하였다. 이때 김현규(金顯奎)가 강원도 남부의 각 군을 돌며 의병의 필요성을 유세하는 도중 1906년 2월 울진에 도착하여 병정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강원도 삼척군에서 활약하던 김하규(金河奎, 48세)와 강릉에서 활약하던 황청일(黃淸一, 58세)이 김현규의 의병에 호응하여 20여 명의 포군을 거느리고 합세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의병을 결의하였던 울진사람과 그 외 공주사람 윤용택(尹龍澤), 봉화사람 권용하(權龍夏) 등이 참가하여 의병진을 편성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서면 삼근리 창고에 쌓여있던 봉화 토호 강재산(姜才山)의 소작미 100석을 희사 받아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의병대장 김현규는 부대를 편성하고 먼저 불영사에 임시사령부를 두고 군대를 훈련하였으며 울진·평해의 관포 군사와 무기를 모집하였다. 인근의 영양, 봉화의 의병과 포군도 합세하여 그 규모가 500여 명이나 되었다.


의병이 결성된다는 소식을 들은 울진군수 윤우영(尹宇榮)은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울진군수의 요청에 따라 원주진위대에서는 정교 정달수와 함께 진위대 병졸 4명과 단양병참부대 병졸 10명을 파견하고 있었다.


의병대장 김현규의 피살


울진 불영사에 유진하고 있을 때 의병진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으로 주낙조가 김현규를 살해하였다. 김현규는 아장 주락조가 군량미를 임의로 부당 유출하여 지방물의를 일으키고 창의 명분을 추락시킨다 하여 수차에 걸쳐 경고를 하였으나 도리어 막내에 지방적 파벌을 조성하였다. 조사결과 군량미가 부당 유출되었음이 드러나자 주낙조를 감금하고, 군법에 회부하여 처형하기로 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주낙조가 옥문지기 최인석(崔仁錫)을 매수하여 큰방 윗목에 담뱃대를 물고 졸고 있는 김장군을 문틈으로 총을 쫘 넘어뜨림으로써 김현규는 죽고 말았다. 김현규는 용력이 비상하고 충의의 정신이 유난하였으며, 군사를 통솔하는 데 규율이 남달리 엄정하여 군법을 범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김현규는 국가보훈처 공훈록에 김해출신이라 기록되고 생몰(生沒)이 미상이다. 김현규가 김해 출신이라기보다는 영양 혹은 영해 출신일 수도 있다. 큰 뜻 있어 나라를 구하려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불의의 죽음이 애석하다. 김현규 묘소는 울진군 금강송면 하원리(重島마을)에 소재한다. 경상북도울진교육지원청에서 관리해 오다가 울진군에서 묘소를 새로 단장하고, 금강송면사무소에서 매년 10월 말에서 11월초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김현규가 사망할 당시의 나이는 35세로전해진다.


그렇다면 김현규는 언제 죽음을 맞이했을까. 그는 1906년 3월 5일 이후인 중순경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1907년 10월 27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 “주낙조가 작년 3월경에 의병진에게 피착되어 무한고초를 격고 간신히 도피” 하였는데, 작년 3월경은 1906년 3월이기 때문이다. 후일 주낙조는 의병관련 혐의로 강릉 순검에게 체포되어 춘천을 거쳐, 서울의 평리원으로 압송 구속 되었는데, 부인 사조이의 구명활동으로 석방되었다.


한편, 1906년 5월 전배근 장진수 최경호가 합류한 창의군이 삼척으로 진군하면서 능촌에서 유진 중 일병과 교전이 있었으나 아군 측의 피해는 없었다. 여기서 중군장 최경호는 삼척 군아에서 러시아식 오연발 단총 1정을 인수하였다. 이 무기는 1904년 러일해전 시 러시아 군함이 고포(姑浦) 앞바다에서 파손되어 구명 상륙한 노병으로부터 입수한 것이라 한다. 일군은 삼척 오십천 능촌에서 의병을 포위 공격하자 최경호가 생포되어 춘천감영에 구금되었으나 얼마 지난 후에 무죄로 풀려났다. 


울진 불영사 을사의병이 

정미의병으로 이어지다


일제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및 경찰권을 일본이 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해산군인들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의병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먼저 울진군에서는 징세부정을 응징하려는 의병들이 투쟁에 나서고 있었다. 주동자는 장석태·전배근·장진수·최경호이다. 주동자들은 1907년 4월 30일 통문을 7개면, 각 동에 발하여 농민 수백 명을 울진읍에 모아 집회를 열었다. 장석태 전배근 장진수는 5월 들어 더 걷어간 결세 1만 9천여 냥을 반환하라는 청원서를 탁지부대신에게 제출하였다. 7월 9일에서 11일에 걸쳐 세무분서를 파괴하고 주사를 살해한다고 위협하면서 결세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이들 활동으로 울진군수 윤영태(尹榮兌)가 1907년 7월 16일자로 사임한 후 7개월간이나 군수 자리가 공석이었다. 군수 발령을 내려도 울진지방 소요를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군대가 해산되자 1907년 8월 14일 장석태(張錫泰), 전배근(田培根), 장진수(張鎭守) 등은 20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울진에 돌입하여 민호를 방화하고, 징세부정을 일삼는 세무주사 원경상(元敬常)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목숨이 위태로워진 세무주사는 평해로 출장을 가서 우편취급소장과 더불어 배를 타고 영해로 도주하였다. 


군대해산 이후 울진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성익현(成益賢)과 정경태(鄭敬泰)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춘천 출신이다. 성익현과 정경태는 울진 토착민 장석태, 전배근, 장진수, 최경호와 긴밀히 연대하였다. 성익현은 춘천부 관군의 초장(哨長)이었으나 1896년 1월에 의거 한 이소응의 춘천의병에 합류하면서 핵심인물이 되었다. 춘천의병이 무너지자 성익현은 잔여 부하 500명을 거느리고 강릉의 민용호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성익현은 1907년 음력 7월 23일(양력8.31) 울진 서면 하원리에서 창의하여 정경태(鄭敬泰)를 도총장(都總將), 변학기(邊學基)를 도총독(都總督), 이상렬(李相烈)을 부장(部將)으로 삼고 울진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에서 ‘관동창의대장’을 칭하면서 항쟁을 지속했다. 


성익현 부대는 10월 18일(음력 9월 12일) 오전 5시 해산군인을 포함한 500명을 거느리고 울진읍내의 경무분견소를 습격하여 쿠메(久米) 경부이하 9명 및 순검 2명과 8시간에 걸쳐 교전 끝에 적들을 패주시키고 분견소와 군청, 우체소를 불태우고 군기와 재물을 노획했다. 의병들은 일본인 마을을 방화하여 민가 36동을 소각하였고, 분견소에 침입하여 소원의 사재 전부를 빼앗아 군수품으로 징발하였다. 10월 22일 오전 9시 성익현 의병부대는 재차 울진 읍내를 공격하여 군아 청정 1동과 부속가옥 3동을 소각시켰다. 


울진을 중심으로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삼척에 주둔한 일본군을 울진으로 내려 보냈다. 1907년 12월 7일 삼척분파소 주둔 제49분대 제1중대 중위 니시무라는 하사졸 41명을 인솔하여 울진에 도착했다. 삼척에 있던 울진분서 순사부장을 비롯한 순사 4명도 울진에 왔다.


마침 겨울의 추운 날씨와 겹치면서 성익현 부대는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12월 말경 그는 부하 약 300명을 양총 8정과 화승총 200정으로 무장시키고, 울진의 산간에 둔취(屯聚)하였다. 이후 간헐적으로 울진과 평해 지역에 출몰하면서 일본군과 헌병,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 강력한 일본군의 토벌로 인 해 의병들은 귀순하는 일들이 늘어났다. 

 

겨울을 난 성익현은 활동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봉화 내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1908년 5월 중순 병력 500명을 거느리고 이강년 부대와 연합하여 봉화의 서벽과 내성, 재산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봉화 내성함락에 실패한 성익현은 다른 활로의 모색이 필요했다. 1908년 6월 7일 오전 11시 성익현은 부하 10명과 함께 평해군 원서면 상조금동에 출현하여 면의 사동(使童) 박수(朴秀)를 총살한 이후 국내에서 자취를 감추고 도만(渡滿)하였다. 성익현은 의병진을 떠나 북간도로 건너갔다. 

이후 정경태가 의병진을 이끌었다. 대규모 의병부대가 사라지고 일본군의 의병진압도 더욱 강력해진 상황 속에서 지속적인 의병활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정경태는 밀정이나 친일적인 동장을 응징하면서 회문(回文)과 전령을 경찰서장이나 각 동장에게 발송하여 창의의 명분을 역설하고, 나아가 의병에 참여하거나 군비를 납부하도록 호소하였다. 정경태는 1911년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서 일본 헌병보조원 장(張)모에게 체포되었다. 이로써 울진에서 의병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의병전쟁 치열했던 울진 지역 

지역민과 의병부대 긴밀한 협력체계


의병대장 김현규가 울진 불영사에서 불의의 죽음으로 의병 전투력이 많이 약화되긴 하였으나, 울진 불영사에서 을사의병을 거의(擧義)한 성과도 있었다. 참모 이현규는 1906년 2월 울진 근북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고하(古賀)로부터 총 한 자루와 한화 60냥을 탈취하는 등 울진에서 군사와 무기를 모집하였고, 3월 5일 의병 50명을 거느리고 매화리를 출발하여 죽변에 있는 해안 망루를 기습하여 격파하고 수비병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로부터 울진 불영사에서 김현규와 함께 거의한 전배근·최경호·장진수를 비롯한 울진 사람들의 의병 활동은 일제의 징세부정을 응징하는 활동을 거쳐 정미의병까지 이어짐으로써 불영사 을사의병의 영향이 있었다 할 것이다.


  1906년 이후 울진출신 사람들은 주로 신돌석(申乭石), 성익현(成益賢), 정경태(鄭敬泰), 변학기(邊學基) 부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울진·평해 인사로 신돌석 부대에 참여한 사람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전배근·전세호·김용욱·한영육(韓英育)·최경호·장진수 등이며, 이들은 각 전투에서 공적이 탁월했다. 


 울진 지역은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의병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행정의 마비와 관아와 가옥의 파괴가 이어지면서 혼란을 겪었고, 부호들은 피난을 떠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울진 지역민들은 의병부대와 긴밀한 협력체계를 이루면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가 치열해지고, 특히 토벌을 빌미로 일본군의 만행이 저질러지면서 삶의 터전이 황폐화되었다. 의병의 습격으로 군청과 경무소 등의 건물이 파괴되고, 행정이 마비될 정도였다는 점에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울진 지역의 의병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가를 보여준다. 당시 울진군수 유한용이 기록하기를 본군이 소요사태 이후로 불에 탄 가옥이 74호로 조사되었고, 또 죽임을 당한 자는 78인이라 하였다. 평해군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이다.


울진 불영사에서 을사의병은 김현규 피살로 혼란을 초래했으나, 울진 인사들은 을사의병을 근원으로 하여 정미의병까지 의병전쟁이 치열하게 이어졌다는 점에서, 을사의병 거의(擧義)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이 논고의 미약한 부분은 추가 보완토록 하겠다. 


필자 전세중

울진 출생, 한양대학교 행정대학원(석사).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역사연구가, 사진작가. 200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열린시학 시 등단 이후 시의 향기 회장, 나라사랑문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울진아리랑(박범훈 작곡) 등 동요·가곡 120여 곡을 작사했으며, 『한말 울진결세항쟁과 정미의병』 등 저서 30여 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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