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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1/11] 일진회, 매국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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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년 역사 일본에 통째로 팔아넘긴 ‘매국의 앞잡이’


“외교권 위임함으로써 복을 누릴 수 있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09년 12월 4일, 일본의 꼭두각시 일진회는 한·일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황제와 총리대신, 조선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 합방론을 합리화하려고 유령단체까지 만들었다. 더 꼴사나운 행태는 군부의 비호를 받던 일진회와 통감부의 지원을 받던 이완용 내각이 한·일 합방을 두고 서로가 이를 선점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 팔아넘기기에 경쟁을 벌였다니, 정신 나간 일이 아닌가. 


8월 29일은 일본에 의하여 강제로 나라가 병탄된 국치일(國恥日)이다. 1910년 8월 29일, 이날은 하늘이 울고 땅도 울었다. 그날로부터 111년이 흘러갔지만, 그래도 그날의 슬픔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다. 


나라 팔아넘기기에 경쟁을 벌이다


일본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제국을 한 뼘 한 뼘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보호라는 구실’ 아래 통감에 의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였으며, 외교권마저 박탈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고,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 입법주체가 대한제국과 통감부로 이원화되어 통신사무·재판권 등 일본이 장악한 분야에서는 통감부가 입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칙령(日本勅令) 또는 그 위임에 의하여 통감부령으로 제정하고 대한제국이 이를 고시하여 시행하였다. 그 밖의 분야에서는 대한제국이 입법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고문이 입법을 지도하고 기초하는 지경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1907년 7월 24일에는 정미칠조약을 체결하여 통감의 지휘·감독권을 한층 강화하였으며,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관리로 고용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서 사살 당한 것을 계기로 해서 한·일 합방을 서두르며,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 회장 李容九)를 앞세워 대한제국을 일본에 병탄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합방을 희망하는 것은 한국인들이지 결코 일본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꼼수였다. 1909년 12월 4일, 일본의 꼭두각시 일진회는 한·일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황제와 총리대신, 조선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런데 일진회는 이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합방론을 합리화하려고 일진회정합방성명서찬성동지회(一進會政合聲明書贊成同志會)라는 유령단체를 만들어 떠들어대기도 하였다. 더 꼴사나운 행태는 군부의 비호를 받던 일진회와 통감부의 지원을 받던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한·일 합방을 두고 서로가 이를 선점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라 팔아넘기기에 경쟁을 벌였다니, 정신 나간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일진회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앞둔 때에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함으로써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복을 누릴 수 있다”는 내용의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한 바 있었다. 이들의 행태는 일본 정부가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래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宋秉畯)과 독립협회에 관계하였던 윤시병(尹始炳)·유학주(兪學柱) 등이 유신회를 조직하였는데, 얼마 후 회(會)의 명칭을 일진회로 개칭하였다. 그 무렵, 이용구의 진보회를 흡수하여 전국적인 기반으로 확대하고, 이용구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1905년 12월 22일이었는데, 이때부터 적극적인 친일단체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본은 1910년 5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한·일 합병을 추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의 반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한국 정부로부터 경찰권을 박탈하는 한편, 한국주차헌병대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8월 16일 통감 데라우치가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면서, 한·일 합병의 화두를 던졌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한·일 합병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최후의 날을 맞았다. 이날 창덕궁에서 순종황제가 대신들과 어전회의를 마치고,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린다.  “짐은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되는 것이 만세(萬世)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이로 생각하고, 이에 한국의 통치를 모두 짐이 가장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였다”가 그것이었다. 참으로 비통한 일이었다.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 다들 어느 나라 대신들이었던가. 이때 어느 한 사람도 불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전회의를 마친 이완용은 곧 데라우치를 찾아가서 “오늘 각 대신들이 어전에 모였는데, 폐하는 ‘시국의 대세로 보아 한·일 합병은 실로 부득이한 것이므로 … 합병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한다’ 하시고 이 조칙을 내리셨다”고 어전회의의 결과를 털어놓았다. 


한·일 합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를 위하여 일본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한국은 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각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이 둘은 꺼릴 것이 없었다. 8월 22일, 이들에 의하여 체결된 「한·일 합방조약」은 1주일간 비밀에 붙여져 있다가 29일에 가서야 세상에 민낯을 드러냈다. 


조약의 전문은 이러하다.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게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려 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이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양국 간에 병합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 … 이에 위의 전권위원이 회동 협의하여 다음 각조를 협정한다”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1조에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라고 적고 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 2천만 생령들은 35년간 일제의 질곡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단군 이래 반만 년 세월을 이어온 긴 역사에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비극을 맞았다. 


이리하여 일본은 통감부를 폐지하고 한국에 총독부를 설치하면서 데라우치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총독으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이러한 수순에 따라서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을 제정·공포하여, 일제하에 한국에 시행할 법률은 조선총독부령의 형식으로 제정할 수 있다는 것과 일본의 법률 중에서 한국에 시행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칙령으로 이를 지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오호 통재라! ‘매국의 앞잡이, 일진회’가 반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를 일본에 통째로 팔아넘겼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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