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0/06] 순국스크랩 - 우산 윤현진 일가(一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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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윤현진 일가(一家), 민족운동에 나서다
임시정부의 남다른 살림꾼, 윤현진
일가 열정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에너지원
글 | 김형목(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21세기를 맞은 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일제 식민지배 잔재는 곳곳에 생채기로 남아있다. 그런데 ‘불꽃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았던 항일투사들에 대한 역사적인 위상은 제대로 정립되지 현실이 안타깝다. 이는 감정만으로 결코 치유될 수 있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다. 성숙한 시민의식과 심화된 역사 인식이 동반될 때에 가능하다. 이 글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에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남다른 지혜를 발휘한 ‘아름다운 청년 윤현진’과 일가의 민족운동 참여 등에 주목하였다.
근대교육 수혜로 민족문제에 다가서다
윤현진은 중국 외유와 일본 유학으로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배 모순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동경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 등에서 활동은 당시 유학생 대부분이 고민한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평등과 자유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임을 자각하는 동시에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파생하였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나아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도 스스로 모색하게 되었다. 일가는 민족자본 육성을 통한 자립경제 수립에 매진하였다. 국채보상운동 참여나 경제활동은 자주적인 독립국가건설론으로 이어졌다. 안희제(安熙濟)·김홍조(金弘祚) 등과 백산상회 운영이나 구포은행이나 경남은행 설립은 이러한 인식을 실행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김기중(金祺中)·김성수(金性洙) 등과 경성방적주식회사 설립도 마찬가지 목적이었다. 생각과 달리 소기의 성과를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폭압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윤현진이 중국 상하이로 망명길에 오른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진다. 이는 ‘조국광복’을 위한 힘찬 진군의 출발점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살림꾼’으로 나서는 직접적인 배경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살림살이를 도맡다 1919년 4월 11일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내에서 확산되는 3·1운동 열기로 국내외 한국인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초대 재무부 차장으로 취임한 윤현진은 운영비 조달에 분골쇄신하는 등 그야말로 온몸을 내던졌다. 그는 국내에 있던 가족들 자산을 운영비로 충당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애국공채를 신속하게 발행하기 위한 애국공채발행조사위원회도 가동했다. 공채 발행은 재정이 부족한 임시정부의 운영을 활발하게 만드는 ‘윤활유’와 같았다. 재정 확충을 위한 다양한 방안은 그의 ‘창의적인’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더불어 한중 국제적인 연대를 위한 한중호조사 조직에도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서병호(徐丙浩) 등과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목적은 “한국의 절대 독립, 일제의 불법적인 조약과 강제병합 철회, 일제의 한국에서 정치·경제·군사상 시설 철거” 등을 실현하려는 의도였다. 외곽단체인 대한적십자사 단원으로 참여하는 등 한인사회 대동단결에도 앞장섰다. 임시정부의 개혁을 위한 대통령불신임운동에 이동휘(李東輝)·남형우(南亨祐)·김철(金澈) 등과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임시의정원회의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등 여권 신장에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애석하게도 윤현진은 1921년 9월 16일 오후 2시 상하이 바오창루 바오캉리(寶昌路 寶康里) 54번지에서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으나 인생역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일가의 민족운동 참여는 윤현진의 버팀목이 되다 아버지 윤필은은 동래부사 겸 동래감리와 경상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의 송덕비는 동래부 동헌에 세울 만큼 선정으로 주민들로부터 자자한 명성을 얻었다. 삼촌들도 실업과 교육·결사 등을 통하여 민족역량 배양에 앞장섰다. 윤명은은 경상도관찰부 주사로 임명된 이래 고성군수와 울산군수를 지내다가 1912년 군수직을 사임했다. 윤명은과 윤은영은 1908년 대한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근대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구포은행과 구명학교를 설립한 윤상은, 구명학교 교장과 구포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지낸 윤영은 등은 윤현진이 평소에도 존경한 숙부들이다. 특히 윤상은은 경제 분야에서 조카 윤현태와 윤현진과 함께 활동한 동반자였다. 3·1운동 이후 기미육영회를 통하여 인재양성에 남다른 관심과 활동을 보였다. 안희제 등과 한국인의 일본으로 도항을 제한하는 자유도항제한조치 철회를 조선총독에게 요구했다. 그는 박기종(朴淇宗)과 이내옥(李乃玉) 등이 설립한 개성학교(전 부산상업고등학교 전신, 현 개성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부산 근대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박기종은 장인이었다. 동아일보와 경성방직주식회사 등 발기인 참여는 외부 세계와 폭넓게 교류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었다. 특히 1920년 게이오(慶應)대학 청강생으로 입학하면서 넓은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백남훈·김도연·유억겸·최승만·김준연 등과 인연은 해방 이후까지 이어졌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 전매국장 취임은 초대 재무장관 김도연 천거로 비롯되었다. 윤영은은 일본 동경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후 사립구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어 교장을 맡아 근대교육 보급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3·1운동 열기 속에서 청년운동이 확산되자 1922년 구포청년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공립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학령아동(學齡兒童)을 구제하기 위한 야학교를 운영했다. 해마다 주민들 유대감을 결속시키기 위한 활동도 병행하였다. 구명학교는 1906년 11월 윤상은․박형전(朴馨銓)․장우석(張禹錫) 등 발기인 26명의 기부금으로 설립되었다. 설립취지는 “구자(龜者)는 신명지족이(神明之族而) 사령지일야(四靈之一也)”라는 의미에서 학교명을 구명이라고 했다. 시세 변화에 부응하여 국권 회복을 도모하는 한편 올바른 국가관과 민족의식을 일깨우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학교 이름에서 엿볼 수 있다. 형 윤현태는 안희제와 함께 윤현진에게 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윤현태)는 1919년 백산상회를 주식회사로 바꾸고 전무취체역이 되었다가 1925년 사임함. 1919년 3월 중 안희제와 함께 동생인 경남은행 마산지점장 윤현진에게 수만 엔을 주어 조선독립운동비로 상해 임시정부에 제공하게 한 혐의가 있음.” 1주기 추모식에 즈음하여 윤현태는 동생 원혼을 달래려고 상하이에 도착했다. 형은 순한글 자필로 비석을 세우는 등 원혼의 슬픔을 달랬다. 윤현진 일가, 대한민국 자리매김하는 든든한 밑거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