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1/11]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 7┃조지 케난의 눈에 비친 조선의 망국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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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바른 필법에서 벗어난 망국 군주에 대한 연민
국가는 ‘패망’ 아닌 스스로 ‘멸망’하는 것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대한제국의 멸망으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에는 두 사람의 조지 케난(George Kennan, Elder)이 살았다. 먼저 태어난 케난(1845~1924)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막료로서, 전쟁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에 유리하도록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끈 러시아 전문가였다. 또 다른 케난(1904~2005, Younger)은 미국의 플랭클린 루즈벨트(Flanklin D. Roosevelt)와 트루만(Harry S. Truman) 행정부에서 소련 문제를 전담하면서, 한국전쟁 휴전의 막후 교섭을 맡은 인물이었다. T. 루즈벨트의 임무를 띠고 전황을 살피러 온 케난은 ‘서울방문기’ 등 네 편의 글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거론하기조차 민망한 내용이었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이야기뿐이겠는가?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필요할 때는 동맹이니, 수호(修好)니, 혈맹이니 하지만, 자기 나라에 득책이 아닐 때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돌아선다. 이때의 매정한 모습은 아예 모르던 관계보다 더 매몰차다. 1882년에 맺은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온갖 수사(修辭)로 가득 찼지만, 을사조약의 체결을 축하하는 주한 일본공사관의 파티에서 축배를 제안한 사람은 조선 주차 미국 공사 모건(E. V. Morgan)이었다.
일본에 유리하도록 미국 외교정책 이끈
두 명의 조지 케난
무슨 기연인지 20세기 초엽, 곧 대한제국의 멸망으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국에는 두 사람의 조지 케난(George Kennan, Elder)이 살았다. 먼저 태어난 케난(1845~1924)은 러일전쟁을 전후하여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막료로서, 전쟁의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에 유리하도록 미국의 외교정책을 이끈 러시아 전문가였다.

케난(E)은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장조카와 나이도 비슷하여 형제처럼 지냈다. 장조카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장조카는 자기 아들도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삼촌의 이름을 따서 조지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자기가 존경하는 선조나 친구의 이름을 따 아들의 이름을 짓는 풍습이 있다. 그러니까 나중에 태어난 케난(Y)은 케난(E)의 손자인 셈인데,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내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가 커서 미국사에 알만한 사람들도 조손(祖孫) 사이인 두 케난이 숙질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케난(Y)의 어머니는 케난을 낳자마자 복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케난은 어머니가 자기를 낳다가 산후병으로 죽은 줄 알고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면서, 고독하고 우울하고 부끄럼을 많이 타며 말이 없는 소년으로 누나의 손에 컸다. 그는 작은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정치와 외교와 러시아/소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크면서, 성인이 되자 위스콘신 주 육군사관학교를 마친 뒤 곧 독일의 베르린대학으로 유학하여 외교학을 공부하면서 러시아어에 특별히 정성을 쏟아 소련 정책의 일인자가 되었다.
케난(E)의 젊은 시절에 대하여는 흔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일찍이 AP통신에 들어가 주로 러시아/소련/시베리아 문제를 다루면서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루었다. 그 덕분에 그는 러시아/시베리아개발회사(Russia and Siberia for Century Co.)에 들어가 사업가로 성공하자 미국의 저명한 주간지인 .아웃룩.(The Outlook)의 기자로 발탁되어 극동특파원으로 도쿄(東京)에 정착하여 활동했다.
이 시기가 곧 조선의 망국의 봉합(seal) 과정이었던 러일전쟁 전후였다. 암흑기의 러시아 문제에 대하여 남보다 먼저 눈을 떴던 케난(E)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기에 독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논객이자 로비스트였으며, T. 루즈벨트의 영향력 있는 조언자였다. 케난은 1904년에 러일전쟁 전야의 상황을 살피고자 한국에 왔으며, 1905년에 전황을 취재하고자 다시 왔다. 이때 그는 특파원의 자격이었지만 사실은 T. 루즈벨트의 임무를 띠고 전황을 살피러 온 것으로 보인다.
차마 거론조차 민망한 취재기사
“한국 민도와 문화는 아이티 수준”
케난(E)은 이때의 취재를 기초로 .아웃룩.에 「서울방문기」(“The Capital of Korea,” October 22, 1904), 「멸망해 가는 나라 조선」(“Korea : A Degenerate State,” October 7, 1905), 「토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평전」(“Admiral Togo,” August 12, 1905), 「일본은 도덕적인가?」(“Are the Japanese Moral?” September 14, 1912) 등 네 편의 글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한국에 대하여 차마 거론하기도 민망한 기사였다.
케난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민도와 문화는 당시 남미의 최빈국이자 저개발 국가였던 아이티(Hayti)와 산도밍고(San Domingo) 수준이며, 일본과 비교하면 네덜란드와 베네수엘라의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비누를 쓰지 않고 이를 닦지 않아 하이에나의 냄새가 나 인터뷰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케난이 한국을 방문하여, 국왕이 일본에 대하여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가를 주변 선교사들에게 물었더니, 왕실에서 무당을 불러 물이 끓는 솥에 일본 지도를 집어넣고 삶아 일본을 “뱅이”했다는 사실을 들려주었다.(George Kennan, “The Capital of Korea,” The Outlook, October 22, 1904, p. 470.) “뱅이”라 함은 “방어”(防禦)의 취음(取音)이다. 전근대사회에서 적군이나 원수의 허수아비나 초상화 등을 만들어 걸어놓고 무당이나 저주의 당사자가 그를 겨냥하여 활을 쏘거나 가슴에 못을 박거나 바늘로 찌르기도 하며, 때로는 그 화상(畫像)을 끓는 물에 삶아 저주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던 주술의 방법이다. 그들은 그와 같은 행동이 상대에게 죽음이나 불구 또는 악질(惡疾)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다른 말로는 이를 “액(厄)맥이” 또는 “액땜/액막이”라고도 한다. 정황으로 볼 때 이 기록이 케난의 러일전쟁 취재라고는 하지만 왕비는 민비(閔妃)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때는 민비가 시해된 이후이므로 청일전쟁 당시의 이야기로 보인다. 일본은 이미 그때 기관포를 사용하고 군함을 건조하던 시대인데, 왕실에서는 진령군(眞靈君)이라는 무당을 앞세워 푸닥거리를 하고 있었으니 이러고도 나라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케난이 얼마나 망연자실했을까 하는 점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개인과 국가에 대한 평가는
준열(峻烈)함에서 달라야
절대적 군주국가에서 망국은 궁극적으로 군주의 책임이다. 이런 체제에서 용장(勇將)이나 현신(賢臣)은 의미가 없다. 충신 열 명이 간신 하나를 이기기 어렵다. 국제 사회는 비정하고 힘의 세계라 하지만, 주군이 영명(英明)하고, 국민의 정신이 건강하여 국가 또는 군왕에 대한 충성이 굳으며, 국방을 소홀히 하지 않았더라면 국가는 멸망하지 않는다. 역사에 아무리 침략 전쟁이 빈번했다 해도 멀쩡하던 나라가 멸망한 사례는 없다. 그러므로 국가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지 패망(敗亡)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고종을 계몽 군주로 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남이야 인정하든 말든, 조선 왕실로 자칭하는 모임도 있다. 역사에 나타난 망국의 군주는 구차히 살아남기를 바라지 않고 그 나라와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는 망국의 군주에 대한 연민이 짙다. 이제 와서 경순왕(敬順王)과 의자왕(義慈王)과 보장왕(寶藏王)과 공민왕(恭愍王)과 같은 망국의 군주를 춘추(春秋)의 시각에서 보지 않고,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전설처럼 묻어버리는 것은 역사의 바른 필법이 아니다. 개인에 대한 연민과 국가의 흥망에 대한 평가는 그 준열(峻烈)함에서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와 대한민국 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그리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부장, 중앙도서관장,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분단사연구』, 『한국사 새로 보기』, 『한국정치사상사』, 『해방정국의 풍경』, 『전봉준평전』, 역서 『한말 외국인기록』(전 23권)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