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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1/12] 경기도 양주의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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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물길 따라 독립만세 절규가 모여들다


한강이 지류 모아 더 큰물 이루듯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일제 헌병 나리타는 “3월 14일 양주로 200m가량 내려간 곳에서 한창 대한국 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있었으므로 해산을 명하였더니, ‘2천만 동포가 조선독립을 기뻐하여 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으냐’고 저항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3월 14일 양주군 주내면에서 100~300명의 군중이, 양주군 중북부 진접면 장현리에서도 주민 7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장현리 주재소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키고 12명을 체포하였다. 3월 15일 이른 아침에는 송촌리와 인근 동리민 1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른 후 북한강 물길을 따라 15리 길을 독립만세를 부르며 두물머리 조안리에 도달했으며, 송촌리와 조안리 주민들이 합류하자 시위대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 시기 양주군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치는 두물머리에서부터 한강을 따라 구리시와 의정부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었다. 서쪽은 오늘날 동대문구, 성북구, 강북구 등의 서울 외곽 고양군, 동쪽으로 가평군, 북쪽으로 연천군과 접했다.    


3월 13~14일 미금면, 주내면, 진접면 시위 


양주군 미금면 평내리 구장 이승익(李昇翼, 45세)은 서울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을 듣고, 1919년 3월 13일 밤 “3·1운동에 대한 총독의 고유문을 전달한다”며 미금면 평내리 이민을 마을 주막 앞에 불러 모아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 안을 돌았다. 또한 평내리에서 금곡리(金谷里)를 향해 고개를 두 개나 넘어 진격했다. 

일제 헌병 나리타(飛田林吉)는, “3월 14일 양주로 200m가량 내려간 곳에서 한창 대한국 독립만세를 절규하고 있었으므로 자기들은 그 이민들에게 대하여 해산을 명하였더니, ‘2천만 동포가 조선독립을 기뻐하여 만세를 부름은 당연하지 않으냐’고 저항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3월 14일 양주군 주내면에서 100~300명의 군중이, 양주군 중북부 진접면 장현리에서도 주민 7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장현리 주재소 헌병이 출동하여 해산시키고 12명을 체포하였다. 


3월 15일 와부면민들 40리 물길 따라 노상시위 


와부면 송촌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두물어리에서 15리(약 6km) 북쪽 북한강변에 있다. 송촌리의 기독교인 이정성(李正成, 41세), 김춘경(金春經, 26세), 김현모(金顯模, 41세) 등은 김덕여(金德汝, 45세), 정일성(鄭一成, 18세), 오성준(吳成俊, 35세), 이정운(李正雲, 36세), 김윤경(金允京, 52세), 박수만(朴壽萬, 23세) 등과 3월 14일 와부면 일대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3월 15일 이른 아침 이정성, 김춘경, 김현모 등 주도자들은 송촌리와 인근 동리민 100여 명과 독립만세를 부른 후 송촌리를 출발하여 북한강 물길을 따라 남쪽으로 15리 길을 독립만세를 부르며 두물머리 조안리에 도달했다. 

송촌리와 조안리 주민들이 합류하자 시위대는 5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조안리를 출발하여 다시 한강 물길을 따라 하류 쪽으로 25리(약 10km)길을 노상시위를 하며 저녁 7시경에 덕소리까지 진격하여 시위운동을 벌였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에서는 이날의 시위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17보) 


경기도 양주군 덕소. 3월 15일 오후 7시경 양주군 와부면 능내로부터 약 5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덕소리로 침입하므로 덕소의 헌병이 시위대에 해산을 명했으나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모자(首謀者) 3명을 체포했다. 여전히 해산하지 않고 덕소리헌병주재소로 쇄도해 돌과 곤봉으로 저항함에 따라 공포(空砲)를 발사해 해산시키고 폭행자 37명을 체포했는데 대부분 야소교도다.


이날의 와부면 시위는 이른 아침 일찍 송산리에서부터 밤늦게 덕소리까지 40리(16km) 길을 한강이 지류를 모아 더 큰물을 이루듯이 이루어진 시위였다.  


 3월 18일 화도면 야간시위


화도면은 외부면 북쪽, 양주의 동쪽끝 북한강 줄기에 면해 있다. 화도면에서는 1919년 3월 18일 밤 10시경 이달용(李達鎔)의 권유로 구영식(具永植), 김필규(金弼圭), 권은(權慇) 등이 앞장서서 2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송산리 북쪽 화도면 마석우리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3명이 검거되고 강제해산 당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1천 명으로 불어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구금자 석방을 요구했다. 일제 자료는 “1천 명의 군중이 피고인의 탈환을 요구하며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전에 체포된 피고인을 탈취하려고 헌병에게 폭행을 가해 간곡히 설득하여 해산을 명했으나 이에 불응하고 더욱 폭행을 감행하므로 어쩔 수 없이 발포하고” “폭민(暴民) 4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당하였다”고 과장 또는 왜곡하였으나, 외국 선교사의 보고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어떠한 폭력도 시도하지 않았지만 6명이 사망했다”고 했다.(Leo  Bergholz to Morris, Letter, 1919. 4. 17)


3월 하순 양주 중서부 만세시위  

3월 27일 노해면, 27, 28일 백석면 연곡리


3월 27일 노해면 창동에서 약 49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양주군 북서부 백석면 연곡리에서는 3월 27일 동리에서 주민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안종태(安鍾台, 37세, 농업)는 군중 앞에서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연설을 했다. 시위 이튿날인 28일에는 구장 안종규(安鍾奎, 31세)와 그의 형 안종태 등이 중심이 되어 약 600명의 군중이 오산리 대들벌 및 백석면 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열띤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28일, 29일 

구리면, 별내면, 시둔면, 장흥면, 회천면 


구리면 아천리 이강덕(李康德, 28세)은 면서기였다. 그는 같은 마을 심점봉(沈點奉, 27세, 농업)과 함께 3월 28일 오후 5시경 구리면 아천리 자기 동리 이민 수십 명과 독립만세를 부른 후 태극기를 떠받들고 이웃 토평리와 교내리로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이튿날인 3월 29일에는 아천리 아차산 꼭대기에 올라 태극기를 떠받들고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구리면 망우리에서도 약 100명의 군중이, 별내면 퇴계원리에서 약 20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시둔면 자일리에서 조염호(趙念鎬, 29세, 목수)가 이민 30여 명과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29일 아침에 장흥면 교현리 주민 50여 명은 음식점 박소사 집 앞에 모여 이회명이 선두에서 이끌며 태극기를 흔들며 장흥면사무소로 향했다. 같은 시각 장흥면 울대리에서 정윤삼과 김순갑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마을 주민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향했다. 이리하여 장흥면 부곡리의 장흥면사무소 앞에 교현리, 울대리, 부곡리 주민 300~400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회천면에서도 약 3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덕정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5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3월 31일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 


이순재(李淳載, 29세)·김성암(金星岩, 22세), 강완수(姜完洙, 24세)은 진접면(榛接面) 부평리 봉선사(奉先寺) 승려들로서 서울 창성동의 김석로(金錫魯, 30세, 약종상)와 더불어 조선민족의 독립을 희망해 왔다. 이들은 손병희 등 민족대표의 독립선언과 서울 시위운동 소식을 듣고 3월 29일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奉先寺)에서 부평리 부근 주민을 모아 시위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들은 이를 위하여 격문을 만들어 널리 반포하기로 하고 절 서기실에서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의 명의로 “지금 파리강화회의에서는 12개국을 독립국으로 만들 것을 결정하고 있는 모양이니, 조선도 이 기회에 극력 독립만세 시위를 계속하여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의 문서를 만들어 등사판으로 약 200매를 인쇄했다. 이순재·김석로, 강완수 등은 그날 밤부터 이튿날 5시경까지 면내 진벌리·중촌리·부평리·팔현리 4개 마을 민가에 격문을 배포했다. 


3월 29일 밤 진접면 부평리 이재일(李載日, 44세 농업)은 조선 독립을 위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격문을 받고 격문을 주민들에게 회람시킨 후 협의하여 시위운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3월 31일 이재일은 전순만(全順萬)과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200여 명의 주민들을 소집하여 광릉천 모래밭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하순 

별내면 유해정 투서사건 


1919년 3월 하순경 별내면 고산리 자택에서 유해정(柳海正)은 19세 청년 유생으로, 조선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찬동하여 붓을 들어 일본 천왕을 꾸짖는 편지를 써서 일본 궁내성으로 보냈다. 

4월 8일에는 와부면 덕소리에서 약 50명의 군중이 덕소헌병주재소를 공격했으며 군경이 발포하여 해산시켰다.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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