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순국스크랩 [2022/01] 1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페이지 정보

본문

겨레 위한 소중한 희생,

항상 기억하고 오늘에 되새겨야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같은 샘에서 발원한 기억의 물과 망각의 물은 합류하면서 시내가 되고, 시내물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 하나로 어우러진다고 한다. 이는 기억과 망각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자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레테’는 ‘망각(잊음, 잊힘)의 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망각의 강을 건너야 한다. 이 강을 건너면 이승의 추억은 모조리 잊는다고 한다. 죽은 자에게는 기억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기억의 유무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결정적 차이인 것이다. 이 신화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기억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기억과 망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기억과 망각 여부에 따라 때로는 우리에게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사람노릇을 하면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아픈 역사, 순국선열의 삶과 자취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리며, 그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일이 참으로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하 올해 1월 중요한 사건과 인물 관련 작은 역사, 기억해야 할 소중한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1월 1일   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개최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처음으로 중국 상하이(上海) 공공조계의 번화가에서 성대한 신년축하회를 개최하였다. 일종의 정부 시무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신년축하회는 새로운 해를 축하하는 한편, 임시정부와 의정원 요인 등의 애국심과 독립의지를 고취하고 대일항쟁을 새롭게 결의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었다.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의 모습은 1920년과 1921년 두 차례의 기념촬영 사진으로 보존되어 있다. 이 가운데 1921년 1월 1일 촬영한 아래의 사진을 소개한다.  


1월 4일   통한의 ‘1·4후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불의의 기습공격으로 ‘6·25전쟁(한국전쟁)’을 도발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공세를 계속하여 영남지역 상당 부분과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해 9월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대역전되어 1950년 10월 말 국군과 UN군은 반대로 북한까지 진격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 김일성·박헌영 등의 요청을 핑계로 중국(정식 명칭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소위 ‘인민지원군’이란 허울좋은 이름의 간섭군을 파견하였다. 이후 전세는 다시 역전, 중국군의 공세가 거세져 국군과 UN군은 공방전을 거듭하다가 결국 북위 38도선 이남은 물론, 서울까지 포기하고 물러서야 했던 것이다.    

     

1951년 1월 3일 북한군과 중국인민지원군(당시는 중공군으로 불렀음)의 공세로 서울이 함락 위기에 빠졌다. 이에 UN군은 1월 4일 다시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물러나야 했다. 많은 국민들은 공포에 휩싸여 다시 피난을 위해 이사짐을 꾸려야 했다.

주목되는 사실은 근래 발간되었던 중국 중고교의 주요 역사교과서가 세차례에 걸쳐 ‘조선’의 파병 요청으로 지원군을 파병했다고 서술했다는 점이다. 즉 1592년 임진왜란 때, 1894년 청일전쟁 때, 그리고 6·25전쟁 때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을 방어하기 위해 원군을 보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앞으로도 북한 정부의 요청이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1월 5일   김지섭 의사의 일본 궁궐 투탄의거


1924년 1월 5일 경북 안동 출신의 김지섭 의사가 일본 천황이 거주하는 궁성 앞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던졌지만, 아쉽게도 폭발하지 않았다.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한 김지섭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2~23년 서울 등지를 왕래하며 일제 통치기관 파괴 등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東京) 일대에서 발생한 관동대지진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이 해 12월 하순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초에는 일본의 제국의회에 폭탄을 투척할 계획이었으나, 휴회중이었다. 이에 목적지를 일본 왕궁으로 바꾸고, 1월 5일 왕궁 정문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경찰이 다가서자 폭탄을 던졌고, 급히 피하면서 왕궁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니주바시에 다시 폭탄을 던졌지만 역시 폭발하지 않았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1925년 5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1927년에 20년 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1928년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1월 8일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폭살 시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이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東京)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괴뢰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한국의 경찰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천황의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폭살에 실패하고 이봉창은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많은 경호 관계자가 문책당했다. 이 해 10월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순국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봉창이 ‘일본영감’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어에 능숙하고 일본인처럼 행세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장점을 잘 활용하여 엄청난 충격을 불러일으킨 거사를 실행할 수 있었다.  중국 칭타오(靑島)의 『민국일보(民國日報)』등 여러 신문에서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라는 기사를 실어 일본 당국은 크게 반발하였다.  이봉창 의거는 당시 침체한 임시정부와 중국 관내지역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1월 12일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상옥(金相玉)은 구한말 군관을 지낸 바 있는 김귀현(金貴鉉)의 차남으로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지금의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친을 여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어려서부터 온갖 험한 일을 다하면서 일제의 침략과 수탈상을 체험하였다. 


1919년 10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1년 7월 국내로 들어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였다. 이후 의열단에서 폭탄과 무기를 지원받아 12월 1일 다시 서울로 잠입하였다. 1923년 1월 조선총독 처단을 계획하였으나, 동지 한우석(한훈)이 체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달 12일 밤 과감하게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서 건물 일부를 파괴하고 행인 7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일본 경찰은 전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삼판동(현재 후암동)에 있는 자형 고봉근(高鳳根) 집에 은신했는데, 폭탄 투척 후 5일만에 경찰이 은신처를 추적해왔다. 1월 17일 새벽 3시, 20여명의 무장 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田村振七)를 사살하고, 경찰 몇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그는 포위망을 뚫고 남산을 거쳐 왕십리쪽으로 도피하여 안장사(安藏寺)로 들어간 다음, 승복으로 변장하고 유유히 산을 내려왔다. 18일에 당시 경기도 고양군 무내미(현재 수유리) 이모집에서 잠을 자고 19일 새벽 혁신단 동지인 효제동 이혜수(李惠受) 집으로 은신하여 다음 계획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1월 22일 새벽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馬野)의 지휘아래 시내 4개 경찰서의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백명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방안 벽장에 숨어있다가 구리다(栗田) 경부를 총살한 후 순식간에 옆집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집 담장에 몸을 의지한 채 일경과 3시간 반에 걸친 총격전을 벌인 끝에 10여 명의 일경을 살상하고 자신은 오른쪽 넙적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때 이미 탄환이 떨어지고 말았다. 최후의 순간까지 항복을 거부한 의사는 결국 남은 한발로 자결하여 34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당시 의거 현장 부근 경신학교 학생으로서 김상옥의 혈전 광경을 목격했던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은 1930년에 그때를 회상한 스케치와 함께 다음과 같은 감동어린 시를 남겼다.

 

아침 7시, 찬 바람/ 섣달이 다 가도 볼 수 없던 눈이 정월들자 내리니/ 눈바람 차갑던 중학시절 생각난다./ 아침 7시, 찬 바람, 눈쌓인 들판./ 새로 지은 외딴 집 세채를 에워싸고 두겹 세겹 늘어선 왜적의 경관들./ 우리의 의열 김상옥 의사를 노리네/ 슬프다, 우리의 김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꽉 잡은 채 그만/ 아침 7시/ 제비(김의사의 별명을 날쌔다하여 그렇게 불렀음) 길을 떠났더이다/ 새 봄이 되오니 제비시여/ 넋이라도 오소서.  - 구본웅 유화집(遺畵集) 『처둔기(處屯記)』, 1930.


1월 21일   채응언 의병부대 일본 헌병과 격전


1910년 1월 10일 대한제국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蔡應彦)이 이끄는 의병부대 31명이 강원도 평강에서 일본군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채응언(1879~1915)은 1908년부터 300~400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황해도와 강원도 북부, 경기도 북부, 함경도 일대 산악지대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결국 1915년 7월 평남 성천에서 체포되고 말았디. 이 해 11월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월 24일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에 한국 대표들 참가


꼭 100년전인 1922년 1월 24일 신생 사회주의국가로 탄생한 소비에트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극동민족대회(일명 극동 근로자대회, 혹은 제1회 극동 공산주의 및 혁명단체 대회)’가  열렸다. 이날 오후 6시에 열린‘극동민족대회’본회 석상에서 「조선(한국)의 혁명운동」이라는 제목의 보고가 있었다. 보고자는 1919년 3·1운동 당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했던 김규식(1881~1950)이었다. 그는 모두 56명에 달하는 극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 단장이었다.

코민테른(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가 주관한 이 대회 초기에 한국 대표가 52명이나 참석했다. 중국 대표 42명, 일본 대표 16명, 몽골 대표 14명, 인도 대표 2명 등 총 144명이 참석했는데, 한국인 대표단 참가자가 전체 대의원의 36%나 될만큼 비중이 컸다. 이는 이 대회에 대한 한국독립운동가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를 잘 보여준다. 또한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1921년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열렸던 워싱턴회의에 대한 반감과 실망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김규식은 이 보고에서 1920년 10월 말의 봉오동·청산리전투 당시 독립군의 활약상과 승전내용도 비교적 상세히 밝혔다. 만주 독립군의 자랑스러운 전과나 승전소식이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보고된 것이다.


1월 31일   중국 상하이에서 ‘순국제현 추도회’개최 


1923년 1월 31일(수요일) 오후 2시 중국 상하이(上海) 삼일당에서 국내외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 대표자들이 모인 국민대표회의 개최 ‘순국제현(殉國諸賢) 추도회’가 열렸다. 이날 독립신문은 1면 톱기사로 ‘추도 순국제현’제목을 뽑고 관련 내용을 게재하는 한편, 2면에도“전 민족적 제1회의 순국제현 추도제 광경”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1923년 1월 서울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끝에 순국한 김상옥 의사 기사를 크게 보도하였다.   


이날 열린 추도회에는 약 90명의 국민대표회의 참가자들과 상하이 체류 일반 한인 등이 참석하여 행사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의 식사와 김순애·정학수(鄭鶴壽) 여사의 추도가 제창, 남형우·손정도 등의 추도사 낭독 등을 진행하고 오후 3시 30분에 폐회하였다고 한다. 추도회를 참관한 독립신문 기자는 “우리가 여러 선열의 유지를 이어받아 공을 이루는 것이 순국하신 이의 영(靈)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임을 알게 하더라”라고 보고하였다.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 등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등 다수가 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