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순국스크랩 [2022/01] 해사 김정호와 파리장서(巴里長書)

페이지 정보

본문

대한독립청원의 선봉에 선 유림들 


한국독립 호소…국제적 반향 일으키다


글 | 편집부 자료제공 | 김병환(해사 김정호의 증손)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한 뒤 상경한 김정호는 독립선언서 대표 명단에 유림(儒林)에서 한 명도 없음은 오유(吾儒)의 수치라 통탄하였다. 그는 족친 김창숙과 상의하여 지금 열국의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우리 유림의 연명으로 독립 승인의 요청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발의하였다. 신규식, 신채호, 이동녕 등 여러 동지들과 의견 교환한 결과 파리행은 여건이 미비하다는 권고를 받아들여 이미 파리에 주재하고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독립청원서를 직접 평화회의에 제출키로 결정, 청원서 원문을 영·독·불·중 등 4개 국어로 번역하여 세계 각 기관 언론계에 원문 그대로 직접 우송하였다. 이로써 국제적으로 한국 유림단의 거사가 대대적으로 발표되었다. 


김정호(1872∼1919)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회원(晦元), 호는 해사(海史), 서계(담수)의 10대손, 재선(在璿)의 아들, 1872년 1월 13일 경북 성주군 수륜면 수륜리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그는 을사보호조약의 소식을 듣고 성태영, 유안무, 김노규 등과 같이 우리의 광복운동은 고구려·발해의 구토(舊土)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하며 뜻을 모았다.


그는 유안무, 김노규 등과 함께 간도·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돌아보고 성태영의 만석거재를 털어서 만주에 개척사업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고자 하였다. 


그 후 김노규, 유안무 등이 세상을 떠나니 그와 성태영은 크게 낙심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고 재만 동지들과 연락하여 독립운동의 발판을 구축하는 데 계속 힘을 기울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한 뒤 상경한 그는 독립선언서 대표 명단에 유림(儒林)에서 한 명도 참여하지 못하였음은 “우리 유림의 수치”라 하며 통탄하였다. 


그는 족친 김창숙과 상의하여 지금 열국의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니 우리 유림의 연명으로 독립 승인의 요청을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발의하였다.


이에 유림계의 영남(嶺南)의 곽종석과 호서(湖西)의 전우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대표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이에 곽종석은 쾌히 응하였으나 전우는 말하기를 “유자(儒者)는 道를 닦을 뿐이지 국가 흥망에는 관계없다” 하므로, 그는 분개하여 전우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울분을 토하였다.


한편, 유만식에게 함께하기를 요청하니 그가 복제소(服制蔬) 문제를 주장하므로, 대의는 모르고 세절에만 구애한다고 힐책하고 돌아왔다. 그 후 김창숙과 같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될 초대 대표에 피선되어 여장을 꾸리기 위해 귀가하던 중 성주 가천에서 갑자기 서거했다. 그날이 1919년 3월 18일이며, 향년 48세였다.

 

파리장서의 동기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을 만방에 선언하고 온 민족이 거족적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면서 유구한 역사 민족 혈관에서 약동하는 자연발생운동이라 뉘라서 감히 이 정의의 대열을 막을 수 있었으랴? 오직 강도적 일본의 강권주의자 침략주의자들만이 이 운동을 탄압하라고 상투적인 만행을 자행할 따름이었다.


이 운동을 지도한 33인의 대표 구성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3대 종교단체의 소속으로 되어 있었으나 유독 유림단의 이름만이 빠져 있다는 것은 많은 의문을 남겨 놓았다.


조선 500년의 터전을 마련한 정치 사상적 뒷바라지는 물론 일상생활에까지 깊숙이 침투한 유교와 유림단이 제외되고 다른 종교단체만이 이 나라의 구국충정에 타오른 인상을 주게 되었다는 사실은 유림의 입장으로 부끄럽고 원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33인 중 불교대표 한용운(韓龍雲)의 말을 인용하면, 3·1운동을 추진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최 측에서는 곽종석을 유림대표로 내정하고 한용운으로 하여금 곽종석(郭鍾錫)을 거창으로 방문한 결과, 곽종석은 즉석에서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그러나 연락의 지연으로 마침내 서명에 불참되었다 하고, 또 한용운의 법정 조서에는 곽종석을 거창으로 찾아갔다가 24일에 상경하여 본 즉, 일본 정부에 제출할 서류 이외 곽종석은 즉석 쾌락하면서 몸이 자유롭지 못하여 자기를 대표할 청년을 서울에 파견하여 상의하게 하겠다고 윤충하를 돌려보냈다. 그날 저녁에 서울에 있다는 김창규(金昌圭)가 찾아와서 곽종석의 면회를 청하였는데 윤충하와 꼭 같은 의견이었다. 곽종석은 자기의 조카 곽윤(郭奫)으로 하여금 자기의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고 격려하여 돌려보냈다.


그 뒤 곽윤과 김황(金愰)을 서울에 보내서 다방면으로 정세를 알아보고 윤충하와 상의하여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장서운동의 출발 동기는 ➀ 민족자결주의의 신조류 ➁ 일제의 사주를 받은 유림대표의 ‘독립불원서’에 대한 반박의 표시 ➂ 고종황제 급서에 대한 국민의 충격 등인데 그 과정이 3·1운동과 다른 점은 3·1운동은 국민봉기로서 대내 투쟁을 제1차적인 목적으로 하는 반면, 장서운동은 유림의 총의를 비밀리에 망라하고 그것으로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투쟁하려는 데 그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유림 측이 설명하는 논리이고 실제로는 3·1운동에 소외되었던 반발의식도 없지 않았다.


파리장서의 착수


처음 이 운동을 일으켰을 때는 장서란 말은 없었다. 유림 간에 서로 연락하는 용어는 ‘독립청원서’였다. 그 뒤 이 거사가 발각되어 일제 측에서 취조할 때 본 사건의 이름을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이라 붙였고 해방 후에는 ‘파리장서’라 호칭하였으니 즉 ‘파리에 보낸 긴 편지’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이 운동은 이미 서술된 바 윤충하, 곽윤, 김황 등이 곽종석의 지시에 따라 활동이 시작되었고 그와는 별도로 성태영, 김정호는 김창숙과의 서면 연락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파리장서 계획을 세우고 활동을 준비하던 중 김황, 곽윤 등을 만나 합류하게 됨으로써 본 운동의 완성을 보게 되었던 것인데 김창숙과 성태영, 김정호와의 관계 동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월 19일 성주(星州)에 있는 김창숙에게 서울로부터 김정호와 성태영의 편지가 전해 왔다. 그 내용은 고종황제 국장일을 기하여 대사건이 책동되고 있으니 빨리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편지를 받아 본 김창숙은 모친의 병환으로 즉시 상경하지 못하고 25일에야 서울에 올라와서 즉시 김정호와 성태영을 만나니 각 종교 대표들은 3월 1일 국장일을 기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유림대표 김창숙을 독립선언서에 연서할 것을 고대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선언서의 인쇄가 완료되어 서명의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3월 1일은 닥쳐왔다. 김창숙은 성태영, 김정호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을 듣고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렇게도 우렁차던 만세소리는 눈물과 울음으로 변하고 말았다.


성태영, 김정호, 김창숙은 밤을 세워가며 실천방법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즉 독립청원서의 기초, 대표의 추대, 모금의 방법, 전국 유림의 동원 등 치밀한 계획이 마련되었다. 김정호, 김창숙도 곽종석의 문인인 만큼 곽윤을 통하여 서울에 온 김황, 윤충하 등과 만나 합류하기로 결론 짓고 일을 추진하였다.


서명 활동과 장서의 문안


이때부터 각자는 손이 닿는 대로 동지 규합에 전력한 결과 3월 4일에는 유림계의 유망한 인사들이 다수 포섭되었다. 


이날 성태영 집에서 그동안 동조자들이 자리를 같이 하면서 지방 유림들에 대한 동원 대책을 논의한 결과 파리회의에 참석할 대표에 해사(海史) 김정호를 선출하고, 또 다음과 같이 서명지역을 분담하기로 하고 3월 15일경에 다시 서울에서 모임을 갖도록 약속하였다. 


이중업(李中業)은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김정호는 충청남도를, 성태영은 경기도와 황해도를, 유준근(柳濬根)은 전라남북도를, 윤중수(尹中洙)는 함경남북도를, 김창숙은 경상남북도를, 각각 담당케 하고 즉시 행동을 개시하기로 하였다.


한편 김정호, 김창숙은 곽윤과 김황을 찾아가 곽종석에게 독립청원서의 문안 작성을 요청하는 일과 그동안의 경과보고가 시급하니 그대들이 거창으로 내려가면 자신도 성주를 다녀서 곧 뒤쫓아 가겠다고 약속하고 곽윤과 김황은 거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때는 3·1운동 직후로서 전국 각 지방에서는 만세소리가 그칠 날이 없고 곳곳에서 학살, 투옥, 도피 등 수라장이 되는 한편 일본 헌병들은 개미떼처럼 쏟아져 나와 경계가 삼엄하였다.


김창숙은 3월 8일 서울을 떠나 성주 본가에 이르니 모친의 병환은 여전하였다. 그 다음날 곽종석을 찾아갔다. 곽종석은 반갑게 맞으면서 “이제 전국 유림을 일으켜 우리의 대의를 세계 만방에 천명케 되었으니 곧 이 몸이 죽을 곳을 얻은 것(死得其所)이라 하고 독립청원서 문안을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에게 이미 작성을 부탁하였으니 거기에 가서 찾으라”하였다.


김창숙은 그 길로 장석영을 찾아가지 않고 김천을 거쳐 영주에 도착하여 이교인(李敎仁), 김교림(金敎林) 등을 만났다. 김창숙의 돌연한 여정의 변경은 자기가 담당한 유림들의 서명도 중하지만 자금 조달이 시급한 문제였다. 이 거사 관계로 해외에 갖고 간 자금의 대부분이 이 지역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김창숙은 부친의 생가 동네인 해저(海底), 유곡(酉谷) 등지를 역방하고 안동 방면의 용무는 봉화 유림들에게 부탁한 뒤 장석영을 만나기 위해 다시 성주로 향하였다.


장석영은 영남에서 손꼽히는 큰 선비였다. 장석영은 문안 원문은 이미 곽종석에게 참고로 보냈다 하면서 사본 1통을 내어 준다. 김창숙은 그 문안을 읽어 보니 약간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앞으로 곽종석과 상의할 것을 생각하고 다시 거창으로 향하였다.


김창숙을 만난 곽종석은 “일전에 장석영으로부터 보내 온 문안을 보고 그대가 다시 찾아올 것을 생각하며 내가 별도로 집필한 것이 있다” 하면서 내어준다. 이를 받아 보니 그 내용이 심히 해괄간명(該括癇明)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거쳐 작성된 것이 현재의 파리장서이다.


곽종석은 사랑하는 제자에게 막중한 국사를 맡겨 왜적의 삼엄한 경계에서 기약도 없이 만리 이역으로 떠나보내는 작별의 순간인지라 만일을 염려하여 심중 주도하였다. 김정호와 김창숙으로 하여금 독립청원서를 외우게 하고 곽윤을 불러서 청원서를 별도로 붓으로 쓰게 하여 그것으로써 신총(新總)을 만들어 미투리 한 켤레를 준비하도록 분부하고 또 부탁하기를 “중국에 가서 우리나라 혁명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겠지만 중국 정부와도 손을 잡아야 하는데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재 중국 학계의 석학이며 참의원 의원인 이문치(李文治)를 만나 보라. 그분은 중화민국 초대 대통령이었던 손일선(孫逸仙)을 움직여 줄 것이다. 이문치는 몇 해 전에 나를 찾아와서 나와 기거를 같이 하면서 여러 달 동안 정치, 사회, 문학 등 흉금을 털어 놓고 사귄 친구이다” 하였다. 김창숙은 그 후 이문치를 통하여 중국 정부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또 끝으로 “이번 거사는 모험을 각오한 일대 장거인 만큼 단신보다는 그대의 협조자가 필요하니 이현덕(李鉉德)을 동반하는 것이 그대의 의향에 어떠한가?” 김창숙은 쾌히 승낙하는 한편 이현덕(李鉉德)과 불일간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날 밤 10시경에 청년 한 사람이 황급히 들어와서 “일본 헌병들이 김창숙을 찾고 있으니 속히 피하라” 한다.


김창숙은 즉시 그 사람의 안내로 이웃집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이튿날 아침 일찍이 서울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 일본 헌병의 수사망에 쫓겨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서울에 도착하니 김정호는 김창숙을 기다리다 못해 성주로 찾아 내려갔다는 것이다.


김창숙은 그 다음날 15일 각 지방으로부터 돌아온 윤중수, 성태영, 유준근, 이중업, 유진태 등과 함께 성태영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각 지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앞으로 추진할 대책을 협의한 바 있었다. 


이때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파리로 출발하려던 김정호가 길 위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일본 헌병의 경계가 심각하여 일보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공통된 체험론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시일을 천연한다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가 위험을 기다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니 국내 활동은 여기서 중단하고 파리행 출발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유림(儒林)의 통합 과정


김창숙은 유진태의 소개로 이득녕의 집에서 우연히 임경호(林敬鎬)를 만나게 되었는데 임경호는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의 문인이다. 김복한은 을미사변 후의병을 일으킨 바도 있었고 이완용 등 매국적을 규탄하는 글을 상소하였다가 옥고를 겪은 바 있는 기호(畿湖) 유림의 영수였다.


영남 유림들의 경우와 같은 동기 및 목적에서 김덕진(金德鎭), 안병찬, 김봉제, 임한주, 전양진, 최중식 등 17명의 연서로 된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그 발송을 임경호에게 부탁하였고 임경호는 같은 문인인 황일성, 이영규, 전용학 등과 함께 발송을 예의 준비 중에 있었다.


유진태는 김창숙에게 임경호를 소개하면서 “서로가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같은 취지와 같은 목적으로 된 독립청원서를 휴대한 양 대표가 우연히 자리를 같이하게 된 것은 기연이라” 강조하였다. 두 대표는 서로 손을 잡고 공동 행동에 합의한 후 우선 양측 문면부터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기호의 문면도 그 내용은 대체로 영남본과 비슷한 것이었지만 영남본이 보다 간명하여 영남본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서명자의 명단은 양쪽의 구별 없이 혼합하여 열기로 하였는데 서명자는 모두 137인이었다. 그리고 파리에 파견할 대표 지명에 있어서는 죽은 김정호를 대신해서 김창숙이 혼자 맡기로 하였다.


이로써 3백여 년간 서로 반목하던 파벌과 당파색을 초월하여 국가의 독립이란 대의 앞에서 전국 유림의 대동단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떠나는 과정과 장서 발송


다른 준비는 거진 되었으나 조속한 출발을 위하여 구체적인 준비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파견 대표로는 김정호가 죽은 후 김창숙을 수석으로 하고 이덕현을 차석으로 하였으나 활동무대가 중국인만큼 중국어에 능통하면서도 독립정신이 투철한 자의 통역이 필요하였다. 


물색한 결과 박돈서를 동반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에 가면 우리나라 혁명지도자로 현재 상해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동녕, 이동휘, 이시영, 조성환, 김규식, 신채호, 박은식, 조완구 등 인사들에게 먼저 김창숙에 대한 소개장을 발송하도록 유진태, 이득년, 조중헌, 이정수, 윤중수 등이 그 책임을 맡기로 하였다.


그 다음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문헌과 그동안 모금한 다액의 현찰을 자신이 휴대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이것을 비밀리에 중국대사관에 연락하여 서울에 있는 중국인 명의로 봉천까지 철도편으로 탁송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도라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모았다. 그동안 각 방면으로 물색한 결과 중국대사관의 직원인 장관군의 주선으로 서울에 있는 중국 상인 동순태 본점을 통하여 봉천에 있는 그의 본점에 택송하기로 결정하고 장관군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하물과 함께 보내겠다는 약속을 얻었다. 


이로써 일체의 여장은 장관군을 통하여 택송하였다. 약속한 대로 이덕현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서 김창숙은 박돈서만을 대동하고 먼저 출발하기로 하고 시일은 3월 23일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3월 23일 봉천행 기차에 올라 다음날 안동현에 도착하여 옛 친우 박광을 만나 국내외의 긴밀한 연락을 부탁하고 다시 차창에 의지하여 봉천에 도착, 중국인에게 부탁한 하물을 무사히 찾아 가지고 봉천 서탐에 들려 이호연을 만나 내외의 근황을 듣고 3월 28일 상해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마침내 이동녕, 조성환, 이시영, 신규식, 조완구, 신채호, 손진형 등을 만나 활동 상황과 국제 정세를 듣고 국내 실정을 말한 뒤에 파리로 갈 계획을 의논하였다. 


신규식, 신채호, 이동녕 등 여러 동지들과 의견 교환한 결과 파리행은 여건이 미비(여비 15만 원이 필요하고 프랑스 통역도 필요)하다는 동지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미 파리에 주재하고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독립청원서를 직접 평화회의에 제출키로 결정하고 청원서 원문을 영·독·불·중 등 4개 국어로 번역하여 수천부를 인쇄하였다. 김규식에게 부탁한 외에 세계 각 기관 언론계 그리고 국내에는 전국 향교에 원문 그대로 직접 우송하였다. 


이로써 국내의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적으로도 한국 유림단의 거사가 대대적으로 발표되었다.


파리장서의 수난


 파리장서 문제로 인하여 전국 유림의 검거된 경위를 보면 최초의 검거는 4월 2일 경북 성주 장날에 일어났던 만세로 인하여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장석영, 송준필, 성대식이 구속되었다.


 여기서 장서 문제의 발각으로 4월 18일 곽종석이 구속되어 21일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고 5월 15일 공판에서 곽종석·장석영은 2년, 송준필은 1년 반, 성대식은 1년으로 각각 언도되었다. 이 자리에서 재판관은 피고들에게 “공소할 의사가 없느냐?”는 물음에 대하여 곽종석은 다음과 같이 공소를 거부하였다.


 “나는 우리나라 법에 의한 범죄자가 아니고 너희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나는 공소할 곳이 없다. 한갓 일신상의 사정으로써 원수에게 용서를 바라고 싶지는 않다. 만일 호소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이 있을 뿐이다.”


이상은 모두 상해에서 우편이 배달되기 전에 있었던 사실들이며 또 그 뒤 많은 유림들이 검거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으나 일제가 이른바 유화정책에 의하여 곽종석을 제외한 기타 인사들은 모두 집행유예 정도로 석방하였다.


그 뒤 6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상해에서 발송한 장서가 우편으로 각 향교에 배달되기 시작하였다. 지방에서는 배달되는 즉시 왜경에게 압수되는 한편 전국 유림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인사들은 어느 지방에서나 명망이 높은 인사이었던 것이므로 그 영향은 컸다. 


특히 검거 인원이 많았던 성주와 봉화 등지에서는 외부로부터 많은 기마헌병대가 출동하고 있었다. 기호 방면도 같은 실정이었다. 이렇게 하여 영호남에서 검거된 인사들은 모두 대구 감옥에 수감하였다. 8월초 대구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당시 일제는 3·1운동에서 느낀 한민족의 억센 투지와 자유주의 사상으로 팽배한 세계 조류에 못 이겨 종래의 무단정책에서 소위 문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곽종석은 2년간의 실형을 언도 받았으나 병보석 중에 그해 10월 17일 7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김복한은 6월초 검거 당시는 중병으로 구속을 면하게 되었으나 일제는 그의 건강 회복을 기다려 그 후 사건이 일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8월 9일에 기어이 구속하여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 감옥에 이송하여 12월 12일까지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일반 서명 인사들은 미결 3개월간의 옥고를 겪은 뒤 2,3년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고 서명 이외의 인사들 중에서도 다수가 여러 차례 취조를 받은 바 있다. 이상은 세칭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이라고 한다. 그 뒤 김창숙은 계속 상해에 머무르면서 한국 유림을 대표하여 구국운동에 가진 심혈을 기울여 오다가 1925년에는 비밀리에 국내에 들어와서 8개월 동안이나 각지를 순방하면서 제2차 유림단 거사를 일으켰고, 1926년에는 유림의 모금으로써 나석주, 이화익(승춘)을 국내에 파견하여 동양척식회사 투탄 거사를 일으키는 등 독립운동에 허다한 빛나는 역사를 장식하였다.


서명자(署名者) 이외의 인물들


파리장서운동을 시작할 때의 계획은 서명한 인사들이 모두 체포된다 하더라도 국내 활동과 국외 연락을 계속하기 위해서 함께 활동하던 인사들 중에서도 각인의 역량과 환경 등을 고려하여 서명에 넣지 않고 제2진으로 대비하여 두었던 것이므로 이 사건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던 137인에 들지 않았고 활동의 중심지였던 서울 유림들도 전원 제2진으로 짜여졌으니 즉 2중 조직이었던 것이다. 그 뒤 1925년에 있었던 제2차 유림단사건도 이러한 기성 조직을 토대로 하여 일어났던 것이니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후일을 위해 누락시킨 명단 (22명)

김창숙, 성태영, 유진태, 김정호, 임경호, 이중업, 곽 윤, 김 황, 윤충하, 윤중수, 조중헌, 이득연, 김창택, 이교인, 이필호, 배석하, 안종목, 이 윤, 최해윤, 황일성, 이영규, 전용학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