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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0/08] 순국스크랩 -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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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우리가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양심

나는 죽을 때까지 한국 위해 싸울 것이다


글  |  김동진 (사단법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 


23살에 조선 땅을 밞아 생을 마감할 때까지 63년을 한민족과 영욕을 함께한 헐버트(Homer B. Hulbert).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조선땅을 밟은 헐버트는 조선 최초의 교사요 고종의 대미특사이자 헤이그특사인 독립운동가이며, 한글 운동가요 어문학자요 역사학자요 언론인이요 선교사이다. 그는 특히 근대 최초로 한민족의 말글, 문학, 예술, 역사를 깊이 있게 탐구한 한국학의 개척자이며, 정의, 인간애, 실용의 가치관으로 조선의 지식층에게 근대사상을 고취시켜 신학문과 근대화 에 큰 울림을 준 문명화의 선구자이다. 



금번 8월은 우리 민족이 일제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은 지 75년째 되는 달이다. 우리의 광복은 독립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런데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들 중에는 외국인도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서훈한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70명이다. 이 외국인 중 33명은 중국인이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정치인이나 혁명가로서 일본이 우리와 공동의 적이었기에 국가 간 연대의 성격에서 한국의 독립을 도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인을 제외한 외국인 37명은 순수하게 정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한국을 도운 사람들이다. 


외국인 독립유공자 중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한민족에게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건국훈장(1950, 태극장: 현 독립장)과 금관문화훈장(2014) 두 훈장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헐버트는 또 민족의 혼인 아리랑에 기여한 공로로 제1회 서울아리랑상(2015)도 받았다. 어떻게 외국인이 대한민국으로부터 이렇게 다방면에 걸쳐서 영예를 안을 수 있었을까?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한 뒤 뤼순(旅順)감옥에서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일본 경찰에 공술하였다. 안중근이 왜 그리 헐버트에게 최상의 경의를 표했을까? 헐버트의 공적은 이를 답하고도 남는다.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저술한 근대 교육의 아버지 

헐버트는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Vermont)주에서 기독교정신의 피가 흐르는 교육자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목사이자 대학 총장이었던 아버지와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다트머스(Dartmouth))대학 설립자의 후손인 어머니 밑에서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Character is more fundamental than victory)’라는 가훈 아래 성장했다. 

헐버트는 1884년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신학대학(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재학 중,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7월 5일 미지의 세계 조선 땅을 밟았다. 육영공원은 조선이 미국과 수교 후 장차 나라의 동량을 양성하기 위해 1886년 9월 학생 35명으로 개교하였다. 학생 중에는 역적 이완용도 있었다. 

헐버트는 육영공원에서 “교육만이 조선의 살길이다.”라고 외치며 심지어 고종에게 상소까지 올리면서 근대 교육의 틀을 세웠다. 이어서 배재학당, 한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전신),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서 1905년까지 20여 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며 주시경, 이승만, 윤병구, 심계택, 이한응, 이세영 등 개화기 선각자를 배출했다. 또한, ‘헐버트 교과서 시리즈(Hulbert Series)’라는 교과서 체계를 정착시키는 등 가히 근대 교육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헐버트는 내한하자마자 한글에 매료되어 잠자고 있던 훈민정음을 부활시켜 이 땅에 한글 범용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후일 “한글을 배운 지 4일 만에 읽고 썼으며,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고 회고했다. 조선 사대부가 한자에만 매몰되어 있을 때 헐버트는 한글의 문자적 우수성을 발견하고 한글로 교육하여 문명 진화와 평등사회를 이뤄야 한다는 교육 철학을 세웠다. 코페르니쿠스적 통찰이 아닐 수 없다. 

헐버트는 1889년 미국의 《뉴욕트리뷴(New York Tribune)》에 <조선어(The Korean Language)>를 기고하여 조선 말글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한글 자모를 역사상 최초로 국제사회에 알렸다. 이어서 서양에서 가르치는 보편적 지식을 조선인들도 알아야 조선이 국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며, 1891년 천체, 세계 지리, 각 나라의 제도 등을 망라한 170쪽의 《사민필지(원명: ᄉᆞ민필지》를 저술하여 출간하였다. 근대 최초의 교과서이자 그것도 한글 교과서가 탄생한 것이다. ‘사민필지(士民必知)’는 ‘선비와 백성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서양의 근대사상을 전하고, 어문일치의 전형을 보여 주는 사실상 최초의 근대 서적이다. 헐버트는 이 책 머리말에서, “조선 언문은 본국 글자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해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라며 한글 사용을 강력히 호소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대마도를 조선 땅이라고 기록하였다. 헐버트의 배재학당 제자인 주시경과 이승만도 이 책으로 공부하였다. 이승만이 후일 대통령이 된 후 대마도를 한국 땅이라고 주장한 배경에는 헐버트로부터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헐버트는 《사민필지》 저술 후에도 한글을 세계 200개 문자와 비교하면서 한글의 우수성과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학술적으로 파헤쳐,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고 한글을 정의하였다. 헐버트는 이 외에도 한글 맞춤법, 한글의 로마자 표기, 띄어쓰기 정착 등에 공헌하고 한국어가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결론지은 근대 최초의 언어학자이자 한글 사랑의 표상이다. 


언론 독립운동가이자, 한국학의 개척자   

헐버트는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발행한 최초의 한글 전용 신문인 <독립신문> 창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독립신문> 창간을 위해 각종 설비뿐만 아니라 주시경 등 인력을 제공하고, 영문판 편집을 맡았다. 헐버트는 한편으로 국내외 언론을 통해 열강들의 한국에 대한 간섭을 비난하고, 특히 자신이 1901년 직접 창간한 <한국평론(The Korea Review)>을 통해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하였다. 헐버트는 개화기 출판, 언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봉으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언론 독립운동가였다. 더 나아가 선교사로서도 조선에 기독교가 정착하는 데에 기여하고, 1903년에는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서 한국 YMCA를 탄생시켰다. 


헐버트는 일생을 통해 무려 23편의 단행본과, 304편의 논문(기고문 포함)을 남긴 저술가로 한민족의 언어, 역사, 문화, 문학, 예술, 풍속 등을 탐구한 한국학의 개척자였다. 그는 한국 역사를 15년에 걸쳐 연구한 끝에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하였다. 당시 서양인들이 조선을 ‘작은 중국’이라고 인식하는데 반해 헐버트는 한민족은 독창성과 자주성을 가진 민족이라고 주장하며 자주적 역사 기술의 장을 열었다. 그는 책 말미에서 한국은 언젠가 세계 속에 우뚝 설 것이라며 한민족의 잠재력과 저력을 확신하였다. 그는 또 1906년 한민족의 특성, 문화를 집대성하고 을사늑약의 진상을 알린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을 저술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일본의 침략주의와 자신의 모국인 미국의 친일정책을 맹비난하였다. 


한편, 헐버트는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 음계로 채보하여 이 땅에 양악보시대의 지평을 열었다. 헐버트는 “아리랑은 조선인들에게 쌀과 같은 존재이다. 조선인들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워즈워스(William Wordworth) 같은 시인이 되며,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다.”라고 한민족의 음악적 재능을 평가하여 오늘날 우리 청년들이 케이팝(k-pop)으로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을 예견했다. 


헐버트의 한국 독립운동 50년 대장정  

헐버트의 한민족을 위한 헌신 중 가장 무겁게 평가받는 업적이 바로 한국 독립운동이다. 헐버트는 오직 양심이라는 순수성을 바탕으로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장장 50년간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는 회고록에서 “무엇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것이 편견이라면 나는 정의, 국제 예의, 인간애, 올바른 애국심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다(I am prejudiced in favor of justice, international comity, humanity and right patriotism).”라며 그가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헐버트는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왕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 침전에서 불침번을 서며 친일파들로부터 고종을 보호하였다. 헐버트는 또 민권운동가였다. 1904년 러일전쟁 후 일본인들이 몰려와 땅을 몰수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헐버트는 한국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 국내외 언론을 통해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통감부에 대적하며 한국인들을 도왔다. 


헐버트는 1905년 10월 을사늑약(乙巳勒約) 저지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는 고종 황제의 특사로 임명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의 일방이 위험에 처하면 타방이 도와야 한다는 ‘선위조처(善爲調處)’ 조항에 따라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을 설득하여 일본의 보호조약 시도를 막아야 한다는 밀명이었다. 11월 중순 워싱턴에 도착한 헐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백악관은 만나주지 않았다. 미국은 ‘태프트-가쓰라밀약(Taft-Katsura Treaty)’에 따라 이미 한국을 일본에 넘기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헐버트는 11월 25일에야 국무장관을 만나 친서를 전달하며 한국을 도와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국무장관은 헐버트에게 “우리 미국이 일본과 문제가 있기를 바라오.”라며 헐버트를 질책하였다. 헐버트는 이는 정의의 문제라고 항변하였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분노에 찬 헐버트는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 등을 통해 미국의 친일정책을 미국 조야에 고발했다. 헐버트는 이 문제로 자신의 나라 대통령인 루스벨트와 10년을 넘게 공개적으로 일전을 벌였다. 그는 <뉴욕타임스> 1915년 12월 12일 자에 <루스벨트와 한국(Roosevelt and Korea)>을 기고하여 “루스벨트는 1905년 일본이 한국을 강박하여 조약을 체결할 당시 미국의 국제적 의무를 저버리고 친구의 나라인 한국을 배신한 사람이다.”라고 질타했다. 


헐버트와 이 문제에 대해 진실공방을 벌이던 루스벨트는 1919년 사망하기 전 “나는 1905년 9월 포츠머스(Portsmouth)회담에서 일본의 한국 강점에 동의하였다.”라는 메모를 남김으로써 미국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에 동의했음을 시인했다. 헐버트가 대통령을 상대로 벌인 끈질긴 도전의 승리였다. 을사늑약과 관련하여 미국의 책임론을 추궁한 인물은 헐버트가 유일하다. 더구나 상대가 현재 미국 사우스다코타(South Dakota)주에 얼굴상이 있는 ‘4인 영웅 대통령’의 한 사람인 루스벨트가 아닌가. 헐버트의 용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1907년 헐버트는 고종 황제의 제2차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임명되어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와 함께 헤이그에서 활약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헐버트 등 헤이그 특사들의 활약은 세계만방에 일본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한민족의 기백을 보여 주었으며, 이후 3.1혁명을 비롯한 국내외에서 펼쳐진 한국 독립운동의 기폭제로 작용하였다는 사실이다. 1907년 여름 미국에 정착한 헐버트는 강연, 기고, 집회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위해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38년을 투쟁하였다. 

헐버트는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뉴욕타임스》 등 언론과 회견하며 일본을 규탄했다. 1909년 포틀랜드(Portland) 강연에서는 “나는 언제나 한국인들을 지지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권리와 재산을 빼앗겼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들을 대변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헐버트는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 대표로 참석 중인 김규식을 도왔다. 이어서 3.1혁명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돌아와 1919년 8월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한국을 어찌할 것인가(What about Korea?)>라는 ‘한국 독립 호소문’을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 호소문은 지금 미국 ‘의회기록(Congressional Records)’에 남겨졌다. 


헐버트는 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 열기가 식어가자 1924년 1월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계속해야 한다며, 미국 전역을 돌며 220곳에서 순회강연을 하였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조차도 한국은 가망이 없다며 친일 대열에 나서는 판에 헐버트가 남의 나라를 위해 침체된 독립운동 열기를 되살리자고 나선 것이다. 헐버트는 1942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만약 세계 2차 대전 종료와 함께 한국이 독립을 얻지 못한다면 인류는 오늘날 겪고 있는 재앙보다 훨씬 더 큰 재앙을 만날 것이다.”라며 미국이 어떻게든 한국 독립을 이끌어내기를 호소했다. 헐버트는 자신의 가치관을 한민족을 위해 온몸으로 실천한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역사의 양심이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자 헐버트는 ‘이는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이자 역사의 필연’이라고 기뻐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8월 15일 광복절에 헐버트를 국빈으로 초청하였다.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는 감회를 묻는 AP통신 기자에게 헐버트는 “나는 웨스트민스터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Westminster Abbey).”라고 소회를 밝히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한국으로 향했다. 한 달여의 여정 끝에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86세의 헐버트는 고령과 여독으로 도착 일주일 만인 1949년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세상을 떴다. 헐버트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마포 한강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영면하였다. 


헐버트는 한국에 귀환하기 직전인 1949년 7월 미국의 <스프링필드유니언(Springfield Union)>과 회견하며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증언하였다. 그는 그러한 평가의 근거로 한글, 거북선, 한국의 역사 기록 문화, 한민족의 이민족 흡수문화, 그리고 3.1혁명을 통해 보여 준 국가에 대한 충성심 등 다섯 가지 이유를 들었다. 특히 3.1혁명을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 하였다. 누구도 한민족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던 시절 헐버트는 한민족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남기고 세상을 뜬 것이다. 

헐버트는 1886년 한민족을 만나 63년 동안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황제의 밀사, 독립운동가로서 펜과 총을 넘나들며 어느 한국인도 체험하지 못한 광폭의 흔적을 남겼다. 특히 헐버트는 한국인들이 언젠가 세계 속에 우뚝 설 것이라며 이 땅의 청년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고 애국심을 심어주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헐버트처럼 한국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들을 기억해 줘야 한다.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자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양심에 따라 일제와 싸웠다. 우리는 이제라도 한국을 위해 헌신한 외국인들을 우리 역사에 올바로 자리매김하여 은혜를 아는 선진 문화민족이 되어야 한다. 2020년은 을사늑약 115주년이며, 8월 5일은 헐버트 71주기이다. 아마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남북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고 있을 헐버트 박사님, 부디 평안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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