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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2/01] 충남 홍성의 만세시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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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복사해 광천면내 각 집에 배포


광천시장 독립만세운동의 도화선 되다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홍성은 양반 유림세력의 세거지가 되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후학 이설(李楔), 김복한(金福漢) 등이 남당학파를 형성하는 등 척사사상(斥邪思想)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한용운, 김좌진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특히 1896년 제1차 홍주의병, 1906년 전국 의병투쟁 중 가장 강력했던 제2차 홍주의병이 일어났던 곳이다. 1919년 3·1만세시위에서도 홍성 출신 사람들은 맹활약했다. 독립선언서를 복사해 배포하고 경성 시내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홍성 광천리와 옹암리 일대에 배포했다. 그리하여 3월 21일에는 광천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홍성군은 충남 내포지역의 행정, 군사 및 경제적 중심이었다. 서울과 가깝고, 주변의 넓은 평야와 간석지가 발달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서해안 포구를 통하여 서울 경기권과 교통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홍성은 양반 유림세력의 세거지가 되어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후학 이설(李楔), 김복한(金福漢) 등이 남당학파를 형성하는 등 척사사상(斥邪思想)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한용운, 김좌진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특히 1896년 제1차 홍주의병, 1906년 전국 의병투쟁 중 가장 강력했던 제2차 홍주의병이 일어났던 곳이다.
 
경성 만세시위에 참여한 홍성 사람들 

강유형(姜有馨)은 광천 본적에 청양군 읍내면에서 출생하였다. 28세의 나이에 서울 중동학교 1학년에 재학하고 있던 중 1919년 3월 1일 경성 시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혔다. 그 후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흥순(吳興順, 19세)은 광천면 옹암리 사람으로 배재고등보통학교 1학년생이었다. 그는 2월 20일경 배재 2학년 임창준(林昌俊, 20세쯤)으로부터 독립운동 참여 권유를 받았다. 2월 28일에는 배재학교 한문교사 김진호(金鎭浩, 50세쯤)가 불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므로 그 시각에 이 봉서를 러시아 영사관에 전달하거라.”

오흥순은 지명받은 대로 그날 러시아 영사관에 봉투에 든 문서를 전달한 뒤에 종로통, 남대문 역전 등에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3월 3일에는 오전 6시경에 배재학교에서 지하 유인물인 「국민회보」 20매를, 3월 5일에는 허신(許信)이라는 사람에게서 「조선독립신문」 제2보 5매를 받았다. 후에 붙잡혀 소각했다고 하였으나 시내에 배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경찰이 그를 추적했다. 
“우리 고향 광천으로 가 숨자.”

오흥순은 3월 7일 같은 하숙생 배재 2학년 김동혁(金東赫), 연희전문 2학년 오봉순(吳鳳淳, 19세)과 함께 광천으로 피신을 떠났다. 세 사람 모두 본적지가 광천면이며, 김동혁과 오봉순은 처남매부지간이다. 세 사람은 서울 남대문 역에서 기차를 타고 천안역에 내렸다. 천안 역전 버스 차부(요즘의 터미널)에서 광천 가는 차표를 샀다. 그러나 버스가 만원이었다. 오흥순은 요행히 차를 탔으나, 김동혁과 오봉순은 대합실에서 다음 차를 기다렸다. 

“신문을 사 보자. 그 뒤 어떻게 되고 있는지.” 

서울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헌병이 이들을 수상하게 여겼다.

“따라와!”

그들은 헌병 주재소로 끌려 갔다.  
오후 7시 천안 헌병분대장은 천안경찰서장에게 전화했다.

“본대에서 김동혁·오봉순은 보안법에 의하여 상당한 처분을 할 것이므로 귀서에서도 오흥순을 잡아서 취조해 주기 바라와 이에 통보하므니다.”

천안 헌병분대장의 전화 통고를 받은 천안경찰서장은 즉시 광천주재소 시모무라(下村) 순사에게 전화했다. 

“오흥순을 수배하시오!”

홍성경찰서에서 순사보가 출동했다. 오후 9시 광천의 오흥순 집을 가택수색하고, 오흥순을 체포하여 홍성경찰서로 송치했다. 이와 함께 후지마루(藤丸) 순사와 이경영(李慶永)은 광천 자동차부를 조사하였고, 순사보 성빈(成彬)은 광천 읍내 각 숙박업소를 샅샅이 수배했다. 그러나 비밀문서를 발견하거나 하는 성과는 없었다. 

김동혁(金東赫)은 오흥순과 동갑에 낙원동 69번지에서 같이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오흥순과 마찬가지로 3월 1일 정오경 배재학교 한문교사 김진호(金鎭浩)의 부름을 받았다. 

“남대문 안의 민가에 배포하거라.” 

김동혁은 선생이 주는 독립선언서를 받아 배포하고, 파고다 공원에서 나오는 만세시위 군중과 함께 시내를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했다. 3월 3일 오후에서 허신(許信)으로부터 「조선독립신문」 제2호를, 3월 5일에도 「조선독립신문」 제3호를 받아 낙원동 민가에 배포했다. 그는 예심계 판사가 학생 신분으로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이유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조선사람으로서 하여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가담했던 것으로, 당연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천안 대합실에 있다가 헌병에게 붙잡혀간 김동혁의 몸에서 부치지 못한 편지 하나가 발견되었다. 김동혁의 편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작은 아버님께 올립니다. 죄송하오나 1필로 말씀드립니다. 천지를 진동하는 만세소리는 귓전에 쟁쟁하고 총을 잡고 칼을 든 양반은 시위를 하는 이때에 힘을 다하여 활동하며, 국가의 활동가는 힘을 다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오리까. 숙부께서 알고 계시다시피 사방에서 형사는 활동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오리까. 전일 저의 비밀행위는 알고 계시다시피 선언서 배달과 독립신문 1·2호의 배달과 기타 호의 배달의 책임으로써 지금까지 사방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동안 주목을 받은 일이 많이 있어서 여관에는 혼자만 숙박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므로 자연히 주목을 받은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작은 일로 그들에게 체포되어 수 일간 구류를 당하는 것은 실로 유감으로 생각되지만 어떻게 하오리까. 미안하지만 저는 서울을 떠나오니 양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후일 독립기가 휘날리고 전승고, 독립고가 울릴 때는 서울을 떠난 일이 면목 없는 일로 생각됩니다. 숙부님 몸조심하시고 만사가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제가 서울을 떠나면서 씀.

위의 편지를 통해 당시 학생들의 독립만세 시위운동과 일제 관헌의 감시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선언서, 조선독립신문 등을 전파하고자 했던 학생들의 노력,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고자 지방으로 피신하는 학생들의 상황과 이런 학생들에 대해 일제 관헌들의 감시와 경계, 압수 수색 및 체포 등의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홍성 광천면의 만세시위  

홍성군 광천면 광천리의 이명종(李鳴鍾)은 해외 유학을 한 인텔리였다. 그는 경주 이씨 상서공파(尙書公派) 37세손으로 조부와 부친이 관리였기 때문에 1894년 서울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그는 조부 기영(起榮)과 인천 감리주사였던 부친 규재(圭宰)로부터 한학과 신학문을 배웠다. 그 후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24세 때 귀국하여 총독부 토지관리국에서 근무했다. 그는 토지관리국 근무 중 비밀 독립운동을 하다 발각되었다. 홍성 군수였던 둘째 매부가 권유하여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을 이끌고 보령군 청소면 죽림리에 정착하였다. 이때 지역의 다양한 인사들과 교유하는 가운데 광천지역의 명망가 서승태와 박원식 등을 알게 되었다.

1919년 3월 6일 이명종은 박원식의 집에서 총독부에 근무할 때 안면이 있었던 그의 동생 박세화(朴世和)로부터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운동 상황을 듣고 독립선언서도 보았다. 

“우리도 합시다!”

이들은 광천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의논했다. 3월 8일 선언서의 문구를 크게 써서 광천시장과 옹암리의 2개소에 붙였다. 순사가 이를 발견하고 유인물을 떼어 냈다. 

“그럼 더 많이 등사하여 각 집에다 배포합시다.”

이에 이명종과 박원식은 3월 18일 양화점을 하는 옹암리 오인섭 집에서 먹지(炭酸紙)를 사용하여 선언서 약 50매를 복사하고, 밤을 이용하여 이명종, 성배호가 광천면내 각 집에 배포했다. 또한 3월 16일 박원식은 광천의 유림 서승태(徐承台)에게 독립선언서를 축약해 주도록 부탁했다. 3월 18일 서승태는 독립선언서를 축약하고, 독립선언서 약 500매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날 밤 광천리와 옹암리 일대에 배포했다. 그리하여 3월 21일에는 광천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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