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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2/02] 2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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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 위한 소중한 희생, 

항상 기억하고 오늘에 되새겨야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같은 샘에서 발원한 기억의 물과 망각의 물은 합류하면서 시내가 되고, 시냇물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 하나로 어우러진다고 한다. 이는 기억과 망각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자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레테’는 ‘망각(잊음, 잊힘)의 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망각의 강을 건너야 한다. 이 강을 건너면 이승의 추억은 모조리 잊는다고 한다. 죽은 자에게는 기억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기억의 유무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결정적 차이인 것이다. 이 신화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기억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기억과 망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기억과 망각 여부에 따라 때로는 우리에게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사람노릇을 하면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아픈 역사, 순국선열의 삶과 자취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리며, 그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일이 참으로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미·영·소 3국 얄타회담 개최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막바지에 접어든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남부 흑해(黑海) 연안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지도자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그에 따른 관리 방안 등을 협의한 얄타회담이 열렸다.
이때 이탈리아가 이미 항복하였고 독일 역시 패전이 예상되자, 연합국 지도자들은 나치 독일을 패배시키고 그 뒤의 점령 방법을 의논하기 위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열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총리 겸임) 등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패전 후 독일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 밖에 다른 패전국이나 독립을 맞는 민족에 대해서는 별도의 방법을 찾기로 합의했다. 
 
얄타회담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과 만주지역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참전이 절실하다는 요구에서 체결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소련군이 진입하였다. 한 때 이승만 등에 의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분할을 밀약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김학준, 「한반도 분할은 얄타회담에서 밀약되지 않았다」,『신동아』2020년 8월호 참조). 그러나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이 사실상 한반도 분할의 원인(遠因)이 된 것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동경 유학생들,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일본 동경(東京, 도쿄)의 기독교청년(YMCA)회관에서 한국인(당시 조선인으로 불림) 유학생들이 ‘재일본 동경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2·8독립선언’은 1919년 전국 각지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되었던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이었고, 젊은 일본 유학생들이 세계정세를 기민하게 포착하여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으킨 획기적 독립운동이었다. 특히 3·1운동의 선구, 3·1운동을 가능케 한 전위적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재일 한인유학생들이 임시로 결성한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최팔용, 송계백, 김도연, 김상덕, 김철수 등 11명의 대표들이 서명하고, 재일 한인유학생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1919년 2월 8일 동경(도쿄) 한복판에서 조국의 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놀라운 독립운동이었다.

당시 발표된 선언서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가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면서 이른바 ‘한일 병합조약’ 폐지와 조선독립 선언, 민족대회 소집 요구, 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 파견 등을 천명하였다. 또 영원한 혈전(血戰)을 선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독일에 선전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에 이미 「대일선전(對日宣戰) 성명서」를 발표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45년 2월 9일, 임시정부는 적대국인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에 선전포고하여 당당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음을 널리 알렸다. 미·영·소 3국 수뇌의 얄타회담에 즈음하여 단행된 임시정부의 이 조치는 임시의정원에서 2월 28일 동의를 받아 합법적 효력과 권위를 인정받았다.   

  
조선총독부,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 공포

조선총독부는 일본보다 앞서 제령(制令) 제8호로 1941년 2월 12일 이 법령을 공포하여 한국인들에 대한 사상통제와 감시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 예방 구금령은 ‘치안유지법’ 집행유예자나 처벌받은 사람이 형의 집행을 끝내고 석방되더라도 다시 이 법률을 위반할 우려가 현저할 때는 재판 없이도 ‘예방구금(豫防拘禁)’할 수 있다는 가공할 법률이었다. 특히 1936년 12월에 공포된 ‘조선사상범 보호관찰령’을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鈴木敬夫, 『법을 통한 조선식민지 지배에 관한 연구』, 1989, 316~317쪽). 

이로써 한국인들은 일제의 각종 수탈과 전쟁동원에 저항하기가 더욱 어려워졌고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등 일제의 동화정책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려야 했다. 실제로 이후에 미전향 사상범과 위험시되는 인물들이 전국 주요 사상범 보호관찰소나 감옥에 강제 구금되기도 했다.

  
이홍광의 동북인민혁명군,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 진공 

한인 이홍광(李紅光)이 이끄는 동북인민혁명군 부대의 1935년 2월 13일 새벽 동흥읍 진입 전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에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 전후 시기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에 의해 수많은 국내 진입전투가 있었지만, 동흥 습격 사건은 1932년 3월 일제의 괴뢰인 ‘만주국’ 수립 이후 200여 명의 대규모 무장세력이 국내로 진공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이홍광의 본명은 이홍해(李弘海)였는데, 이홍규(李弘奎), 이의산(李義山) 등의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는 1910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후일 민족운동에 투신하면서 이홍광이란 이름을 썼다. 그는 1925년 중국 동북의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였다. 일본군·만주국군 연합부대와 싸우다가 1935년 5월 12일 전사했다.

이홍광 부대의 동흥 습격전투는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며칠간 대서특필되었고, 중국동북에서 발간되는 『대동보(大同報)』 등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일제 당국은 물론 대중에게도 이 전투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경성고무공업소 여공 160여 명, 
임금인하 반대 동맹파업 단행

1933년 2월 13일 서울에 있는 경성고무공업소 공장의 여성 노동자들 160여 명이 회사의 임금인하를 반대하는 동맹파업을 단행하여 생존권 수호와 노동자 권익 향상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931년 9월 일본의 중국 동북지방(만주) 침략(만주사변, 혹은 9·18사변) 이후 더욱 가혹해진 노동조건으로 노동자,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은 어려워졌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단결된 노동운동도 거세졌다.     

  
신간회 창립

1927년 2월 15일 일제하 최대의 합법적 사회운동 단체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신간회라는 이름은 고목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온다는 뜻(新幹出古木)에서 유래하였다.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하였다. 초대 회장은 이상재(李商在)가 맡았으나, 3월에 사망하여 부회장 권동진(權東鎭)이 회장을 계승하였다. 

신간회는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했는데, 전국에 120~150여 개의 지회에 회원 수는 약 2만에서 4만 명에 달하는 방대한 조직이었다. 이 단체는 식민지 조선인(한국인)들의 정치적·사회적 훈련의 장소나 도량(道場), 혹은 일제 통치세력에 대한 일정한 압력수단이 될 수 있는 단계의 민족협동전선 조직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 민중의 절실한 민족적, 계급적 요구에 응하거나, 그러한 요구를 지도할 수 있는 단체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정치적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단체로 전환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 끝에 해소되고 말았다(이균영, 『신간회 연구』, 역사비평사, 1993).   

  
윤동주 시인,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순국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일본 서남부의 큐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민족시인 윤동주가 너무나 젊은 2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최근 밝혀진 사인은 큐슈제국대학 의학부의 생체실험 주사로 인한 사망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윤동주의 ‘서시(序詩)’는 아마도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많이 애송되는 시일 것이다.  
윤동주는 1942년 일본 릿교(立敎) 대학 영문과를 거쳐 그 해 10월 쿄토(京都)의 도지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편입했다. 그러나 이듬해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귀국을 며칠 앞두고 쿄토대학에 재학중이던 외사촌 송몽규와 함께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제측 자료를 보면 그는 송몽규와 ‘재쿄토(在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피체 혐의는 명백히 독립운동과 ‘민족문화 수호 모의’였다. 그는 송몽규, 고희욱(高熙旭)과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1944년 3월 31일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비록 치열한 무장투쟁이나 극단적 형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한 자기응시와 내면의 성찰, 일제에 대한 저항성을 바탕으로 내부의 격심한 정신적 고통과 아픔, 자기극복을 시로 표현하였다. 그래서 그는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 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며 자신을 질책했던 것이다. 

  
미국 윌로우스에 
한인비행사 양성소 설립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은 장차 일본과의 결전에 대비하여 한인 비행사를 양성코자 하였다. 1920년 2월 5일 노백린과 대한인국민회 간부들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레드우드 비행학교를 방문하고, 이 학교를 졸업한 한장호(韓章鎬)·이용근(李用根)·이초(李超)·이용선(李用善)·오림하(吳林河)·장병훈(張炳勳) 등 6인을 만나 비행학교 설립문제를 협의하였다. 이후 노백린은 이들을 2월 20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윌로우스(Willows)에 세운 한인비행학교의 교관으로 초빙하였다. ‘쌀의 왕(Rice King)’으로 불리던 재미교포 김종림의 재정적 후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윌로우스 비행학교에서 한인청년 30여 명이 군사교육과 함께 일본군과의 공중전을 위한 비행술을 배웠다. 학교 교사(校舍)는 1918년 폐교된 ‘퀸트학교’ 건물을 빌려서 사용했다. 아쉽게도 이 학교는 1924년 이후 운영난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노백린은 설립 당시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무력항쟁의 결의를 한층 북돋웠다. “비행기로 이름을 얻기까지 오랫동안 헤맸지만(戎馬多年浪得名) 오늘 조국을 지킬 간성을 길러낼 것을 각오하네(愧吾今日作干城) 삼만리 바다를 건너 적을 쳐부수고 싶어(慾破海洋三萬里) 이에 바람을 타고 먼저 항공비행을 시험하네(御風先試航空行)” 

  
신채호, 중국 여순감옥에서 순국

1936년 2월 21일 대표적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인 신채호(申采浩)가 중국 여순(旅順)감옥에서 오랜 옥고 끝에 뇌일혈로 사망, 순국하였다. 그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1931년),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30) 등 많은 민족주의 사학 논저를 남겼다.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조선상고사』 총론(1931년 조선일보 연재)에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는 유명한 말로 강렬한 민족주의사관을 밝혔다.  

  
강기동 의병부대 
경기도 북부에서 일본군과 격전  

1910년 2월 26일 구한국군 기병 출신 의병장 강기동(姜基東)이 거느리는 의병부대 17명이 경기도 포천군(외소면 수내리)에서 양주·의정부 헌병 연합 수색대와 전투를 벌였다. 강기동(1884~1911)은 서울 명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대한제국군 기병부위(騎兵副尉)로 있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군인을 규합하여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경기도 북부와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중국동북의 북간도(연변)로 이주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1911년 2월 원산에서 체포되었다. 2윌 17일에 서울로 이송되어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는데, 팔다리에 태극기와 ‘극기(克己)’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옥중 항쟁을 벌이다가 이 해 4월 7일 서울 용산의 일본군 영내에서 총살, 순국하였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1, 1986).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보생 300여 명, 
동맹휴학 단행 

1931년 2월 16일 교직원 총사직, 동맹휴교생 복교 요구 등을 내세우며 평북 정주의 사립학교인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 학생 300여 명이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산고보는 실업가·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 활약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이 1907년에 설립한 오산학교가 발전한 기독교계 민족사학으로 유명했다. 독립운동가 김홍일, 함석헌, 시인 김소월·백석, 화가 이중섭 등이 이 학교를 졸업했다.     

  
일본과 강화도조약
(조일수호조규) 체결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 대표 신헌(申櫶)·윤자승(尹滋承)과 일본 대표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사이에 12개 항목의 ‘조일수호조규’(흔히 강화도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으로 알려짐)를 체결하였다. 무관세 무역과 일본의 치외법권 인정 등 불평등조약으로 알려진 이 조약은 추후 부산·인천·원산항의 개항과 일본과의 통상 무역, 나아가 근대 세계자본주의 체제 편입과 일본 침략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와 시사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조약 전 해인 1875년 9월 일본은 강화도 일대에서 군함 운양호(雲揚號)를 동원한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함포를 동원한 무력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국 허울좋은 ‘수호통상’을 명분으로 이듬해 2월 일본이 1858년 영국과 체결한 영일(英日)조약을 거의 그대로 모방하여 강요한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참의부 특공대원 이수흥·동지 유택수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1929년 2월 27일 참의부 특공대원 이수흥(李壽興)과 그의 동지 유택수(柳澤秀) 두 지사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이수흥은 1905년 경기도 이천군에서 태어났다. 18세 때인 1923년 3월경 남만주로 건너가 통합 독립운동 조직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였다. 이어 대한통의부를 계승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결성되자 이 조직에 가입하였다. 그는 1924년경 참의부 제2중대의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었다. 비록 5척 단구의 몸이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1925년 7월 10일 서울을 지나다가 동소문파출소가 눈에 띄자 대담하게도 혼자서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날 밤 열한시 쯤 파출소 앞에서 보초근무 중이던 일본인 순사 도쿠나가(德永勝次)에게 분노의 총격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다. 이 거사 이후 이수흥은 경계망을 뚫고 이천으로 향하여 평소 알고 지내던 유택수(柳澤秀)와 동생 유남수(柳南秀)를 만나 자신이 독립운동 단체인 참의부 특파대원으로 온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기꺼이 동의하였다.  

이수흥은 10월 20일 안성의 파출소를 기습공격하였다. 총독부 당국은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러나 그는 경계망을 뚫고 이천군 백사면의 현방주재소를 급습하여 일본인 순사부장 모리마쓰(森松)을 쏘아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백사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宋天義)를 사살하였다. 

그러나 이수흥은 믿었던 6촌형의 밀고로 이천경찰서장 와가키(河岐) 등이 결국 그를 사로잡고 말았다. 11월 6일 동지 유택수와 함께 잡힌 이수흥은 3년여의 예심 끝에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29년 2월 마침내 동지 유택수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이수흥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나는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 내가 기필코 대한독립을 성취하려 했더니 원수들의 손에 잡혀 일의 열매를 못 맺고 감이 원통할 따름이다. 우리 동포 여러분들은 끝까지 싸워 우리나라의 독립을 성취하여 주시기 바란다.”라고 비장하게 말하여 방청객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대구 2·28 민주운동기념일

1960년 2월 28일 대구시 교육 당국이 야당의 선거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에 등교조치를 시행한 데 반발하여, 대구시내 고등학생들이 일대 시위를 벌여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마산의 3·15의거와 고려대학의 4·18의거, 전국 각급 학생들의 4·19혁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정부는 2018년 ‘2·28 민주운동기념일’을 제정하여 대구의 2·28학생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미국 CIA, 미군 철수 관련 보고서에서 
북한 남침 우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49년 2월 28일 트루만 대통령에게 「1949년 봄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결과들(Consequences of US troop withdrawal from Korea in Spring, 1949)」이란 제목의 극비문서를 보고했다. 보고서는 첫 문장부터 주한미군 철수 후 북한군의 침략위험을 명백하고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 대해 미국 육군성 정보국은 북한의 침략은 가능성에 그칠 뿐, 그럴 개연성은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미국 당국은 북한의 남침 위협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았다(김택곤, 『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현대사 1945-1950』, 맥스미디어, 2021, 604~610쪽).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도발로 커다란 민족의 비극 6·25전쟁(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은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현재 한 국제전문기관의 평가에 따르면 한국군은 세계 6위, 북한군은 28위의 저조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유비무환의 자세로 미래의 전쟁 위협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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