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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2/03] 3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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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스티븐스 처단, 김익상 의사 거사 등

한민족 최고 최대의 독립운동…3·1운동 폭발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그리스신화에 따르면 같은 샘에서 발원한 기억의 물과 망각의 물은 합류하면서 시내가 되고, 시냇물은 강으로 바다로 흘러가 하나로 어우러진다고 한다. 이는 기억과 망각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자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레테’는 ‘망각(잊음, 잊힘)의 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이 죽어서 저승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망각의 강을 건너야 한다. 이 강을 건너면 이승의 추억은 모조리 잊는다고 한다. 죽은 자에게는 기억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기억의 유무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결정적 차이인 것이다. 이 신화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기억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기억과 망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기억과 망각 여부에 따라 때로는 우리에게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들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사람노릇을 하면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아픈 역사, 순국선열의 삶과 자취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리며, 그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일이 참으로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3월 1일  

거족적 3·1운동 폭발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낭독되어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조선인’의 자주민임과 조선의 독립국임을 세계 만방에 널리 선포하였다. 3·1운동으로 1919년 3월부터 5월 중순까지 전국 각지에서 대대적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고, 거의 200만여 명의 민중이 참여했다. 국내는 물론, 중국 동북(만주), 러시아 연해주, 미주, 일본 등 우리 동포들이 있는 곳 어디서나 호응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잔혹한 탄압으로 7,000여 명의 한국인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된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에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는 등 3·1운동은 한국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남겼다.  

  

3월 2일~3일경   

전라도 고부 의병, 

일본인 경영 ‘오모리농장’ 습격


1909년 3월 초(2~3일경) 전라도 고부지방의 의병들은 전라북도 고부군 거마면 평교리에 있는 오모리농장에 진격하였다. 이들은 전라도 고부 일대의 토지를 헐값으로 매수하여 농업을 경영하며 농업 수탈에 앞장서고 있던 오모리농장의 사무실을 파괴하고, 그곳에 보관되고 있던 토지문서 등 수탈 관련 문서를 불태우는 등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대한매일신보』1909.3.4). 이는 일본군의 의병 탄압작전에 대한 일대 반격이었다.


3월 10일   

평안남도 맹산 3·1운동 

일본 군경 무차별 발포로 시위군중 51명 희생


평안남도 맹산 3·1운동 탄압사건(1919년 3월 10일)은  일본 군경이 저지른 대표적 학살 사건이었다. 특히 수원(화성) 제암리 학살보다 한 달가량 먼저 발생한 맹산 학살사건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3·1운동의 역사에서 단일 시간·장소 기준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참혹한 사건이었다. 3월 10일 일본 군경의 무차별 총격으로 맹산군 시위현장에서 무려 51명이 즉사,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박은식은 유명한 명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맹산 3·1운동 때 천도교 신자들이 많이 참가했는데, 60여 명이 사살되었다고 했다. 특히 시위군중이 체포한 독립운동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맹산 헌병분견소로 몰려오자, 이들을 안마당으로 끌어들인 뒤 문을 굳게 잠그고 사살했다고 한다. 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총검으로 찔러 모두 죽였다고 서술하여 그 참상을 폭로하였다(박은식[남만성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서문당, 2019, 244~245쪽).     



3월 13일  

‘용정 3·13시위운동’ 폭발 


3·1운동은 국내에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라, 다수의 한인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던 만주(중국 동북) 지역까지 확산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19년 3월 13일(목요일, 음력 2월 12일), 북간도(현재의 중국 연변지역) 용정(龍井)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운동에는 최대 3만여 명의 많은 동포가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었다. 현재 연변 학계에서는 이를 ‘3·13반일시위운동’ 또는 ‘3·13반일군중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일본 영사관 당국은 참여 군중을 6천여 명으로 축소하여 보고했지만, 중국 당국은 2만여 명의 많은 한인이 참가했다고 파악했다. 반면 계봉우(桂奉瑀)는 참가자가 3만 명을 넘었다고 보았다. 


연변 3·13 운동 당시 현장에서 「독립선언 포고문」이 살포되었다. 이 포고문은 ‘간도거류 조선민족 일동’ 이름으로 작성되었다. 그런데 이때 김약연 등 17명의 ‘재남북만주(在南北滿洲) 조선 민족 대표’ 명의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도 발표되었다. 김약연 등 지역 유지들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상하이, 일본 도쿄(東京), 그리고 국내외 등지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결과 국제질서 재편의 새로운 기세를 감지하고 국내외를 망라한 거족적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그것이 바로 ‘3·13시위운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3·13독립축하회 – 바로 용정 3·13운동’ 개최 이후 열강의 지원을 받기 위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과 지원, 결사대를 조직하여 국내로 진입한 후 독립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략까지 모색했다. 


중국 당국은 3월 13일 정오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독립축하의 취지 설명이 끝나자, ‘조선독립’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군중은 기뻐서 흐느끼고(喜而泣), 흐느끼면서 뛰며(泣而蹈)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보고했다(「中華民國外交檔案」1919년 5월 16일 吉林省長密咨 제39호). 용정의 3·13운동 과정에서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 지방관헌들의 발포로 17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넘게 부상하는 큰 피해가 났다. 


3월 15일   

이승만정권 ‘3·15 부정선거’ 자행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자유당의 이승만이 다시 대통령 후보가 되고, 야당에서는 민주당의 조병옥이 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러나 선거를 10일 앞두고 갑자기 조병옥이 세상을 떠나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어 대선이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자유당의 ‘충성파’들은 40%를 사전투표하고,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투표를 자행하는 등 공무원과 관변단체를 동원하여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이처럼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대구·부산·서울·마산 등 대도시에서 대거 일어났다. 특히 마산에서 시위도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김주열(金朱烈) 군의 시체가 바다에서 발견되어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경세원, 2016, 204쪽). 결국 3·15부정선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20일   

미국과 소련,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外相)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과정으로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양 점령군에 의해 세워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린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미·영·중·소에 의해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또 남북 분할점령으로 인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 점령군 사이에 공동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결정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에 따라 19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여러 문제 해결을 위해 예비회담을 열었고,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제3조 조항에 따라 제1차 회의를 열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신탁통치’를 실시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5월 8일 결렬을 선언하였다. 


미국은 신탁을 반대하는 우익 정당을 참여시키자고 주장했고, 소련은 신탁반대 우익정당을 배제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한영우, 『미래를 여는 우리 근현대사』, 175쪽). 그 뒤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역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같은 해 7월 10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 남한과 북한의 대립과 분단과정이 심화되었고, 마침내 1948년 8월과 9월에 남북 분단정부가 세워지고 말았다.  


3월 23일    

장인환·전명운 

친일미국인 스티븐스 사살


1908년 3월 23일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는 공교롭게도 미리 협의하지 않았지만, 거의 동시에 친일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 처단하는 거사를 단행하였다.


미국인 스티븐스는 1904년 12월 27일 미국 주재 일본외무성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일본이 한국에서 매우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며 일본의 침략을 찬양하고 다녔다. 특히 스티븐스는 "을사조약은 미개한 조선인들을 위해 이루어진 조치로 조선인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라 했다. 이때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한국 교민 네 사람이 분노하여 그를 구타하고 말았다. 


하와이 이민자 출신이었던 장인환과 전명운은 스티븐스가 1908년 3월 23일 미국 워싱턴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차역에서 사살하려는 계획을 짰다. 먼저 전명운이 쏜 총알은 빗나갔지만, 장인환이 쏜 총탄 2발은 명중하여 결국 스티븐스는 3월 25일 죽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 미국에 유학 중이던 이승만에게 두 의사의 재판 통역을 부탁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는 이들이 ‘범죄적 암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의거는 ‘해외 독립운동의 효시(嚆矢)’, ‘항일 의열투쟁의 단초(端初)’로 거론되며, 1년 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월 25일   

일본 순사와 황해도 은률 군수 총살 

민양기(閔良基) 사형집행으로 순국


민양기는 조선 독립을 희망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대한독립단에 가입한 뒤 동지 10여 명과 함께  평안남도 대동군 일대에서 일본 순사 1명을 총살하고, 또 은률군수 최병혁(崔丙爀)을 총살하였다. 그는 해주 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다시 평양복심법원에공소를 제기했으나, 역시 1심대로 판결을 받았다. 다시 경성고등법원에 상고했지만, 기각당하고 말았다. 그는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결국 1922년 3월 25일 정오에 사형이 집행되어 한많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그는 간수에게 끌려 사형장을 향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크게 소리를 지르며 ‘대한독립 만세’를 여러 번 부르고, 교수대에 올라서 다시 머리를 숙이며 조용히 기도하였다. 그는 최후의 유언으로 “내가 죽은 후에 나의 어린 자식과 아내와 집안 일에 관한 일을 나의 백부(伯父)에게 부탁하여 잘 보호하도록 말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동아일보 1922. 3. 30 3면).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중국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으로 순국


1909년 10월 26일 중국 동북지방의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일본 당국의 부당한 재판과정을 거쳐 결국 사형을 언도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과정에서 ‘이등박문 죄악 15개조’를 내세우는 등 이토 히로부미 처단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일본 사법당국은 처음부터 안 의사를 사형에 처하려고 하는 등 민주주의 국가의 3권 분립을 스스로 위반하였다.  


사형집행 며칠 전 정근(安定根)·공근(安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신은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하지 말라.……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 형장에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3월 28일   

김익상·오성륜·이종암 ‘황포탄의거’,

다나카 기이치 대장 저격


꼭 100년 전인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30분 경, 일본군 육군대장이자 남작(男爵)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필리핀 마닐라로부터 일본으로 귀국하는 도중에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의열투쟁 독립운동 조직인 의열단에서는 다나카를 사살하여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온 천하에 알릴 것을 결정하고 치밀한 거사 계획을 세웠다.


다나카는 1920년 10월 일본이 ‘훈춘(琿春)사건’을 조작하고, 이를 이유로 중국 연변(북간도) 지방에 침공하여 수많은 한인 동포들을 학살한 ‘간도 대학살(일명 경신참변, 혹은 간도참변)’ 당시 육군대신(육군상)을 맡고 있던 자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의 무력탄압과 이른바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剿討)계획’의 수립과 실현을 통해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많은 한인들의 학살에 관여하고 책임이 있는 인물이었다.


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이종암(李鍾巖) 등이 치밀한 거사계획을 세워 황포강변의 황포탄(黃浦灘) 부두에서 세 차례나 총을 쏘고 폭탄을 던졌으나, 다나카 저격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다나카 앞을 지나던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희생되고 말았다. 거사 직후 김익상과 오성륜은 결국 체포되고, 이종암은 탈출에 성공했다. 김익상과 오성륜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에 수감되었는데, 5월 2일 오성륜이 일본인 다무라 주이치(田村忠一)의 도움으로 탈옥, 도주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김익상은 이후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 나가사키공소원(長崎控訴院)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1924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여러 번 감형되어 14년의 옥고를 치르고,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감옥에서 출옥하였다(『韓民』 6호, 1936.8.29, 2면). 하지만 나중에 일본인 형사에게 끌려간 뒤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3월 30일   

조선혁명군 특공대원 이선룡, 장호원 

동일은행 습격, 12,000원 군자금을 빼앗다  


  1931년 9월 일본의 ‘만주사변(일명 9·18사변)’ 도발 이후 일본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중국 동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조선혁명군, 한국독립군 등 운동조직을 무장독립운동단체로 전환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보다 본격화하였다. 아울러 중국관내에서는 김구가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윤봉길의거, 이봉창의거, 유상근·최흥식의거 등 의열투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 세력을 응징하는 한편, 국내외에 한인독립운동가들이 건재함을 과시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2년 3월 30일에 조선혁명군 병사 이선룡(李先龍)이 특공대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동일은행 장호원 지점을 습격하여 군자금으로 12,000원을 탈취하였다. 식민지 치하에서 신음하던 한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일본 경찰들은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장세윤,『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 역사공간, 2016). 

『동아일보』는 이 사건에 대해 1932년 4월 4일 호외까지 발행하여 대서특필하며 관심을 보였다. 이 신문은 “경기 강원 충북 등 3도를 걸치고 넘나들며 신출귀몰하는 권총범인은 (중략) 백주에 권총을 들고 은행을 습격하야 강원 경기 충북 등 3도경관의 단잠을 못 자게 하든 이 범인은” 이라고 대서 특필하였다.  또 신문뿐만 아니라 『삼천리』, 『동광』, 『제일선』 등 여러 잡지에도 특집으로 이선룡의 활동상을 실어 만주에서 항일무장 단체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제 경찰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직접 독려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경기·강원·충청 3도 경찰이 대거 출동했는데, 연인원 6천명과 비용 2만여 원이 투입되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32. 4. 4).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 등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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