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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0/09] 선열(先烈)들의 절명시(絶命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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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들이 토해 내는 단심의 애국충정 

나라는 빼앗겨도 우리 얼은 지킨다.


글 | 김중위(월간 순국 편집고문)


오늘에 우리가 누리는 번영은 어쩌면 우리 순국선열들이 뿌린 혼백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혼백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이요 넋이요 얼이다. 나라와 영토는 빼앗겨도 우리의 얼은 뺐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증해 주고 있었다는 얘기다. 선열들의 절명시를 되짚어 보고자 함이다. 이 시들이야 말로 오랫동안 잊혀진 우리 영혼의 메아리라 여겨진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한 나라를 손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대한민국이 그 으뜸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그 성공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열정에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열정은 우리 애국선열들이 뿌린 혼백(魂魄)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라 여겨진다. 혼백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이요 넋이요 얼이다. 나라와 영토는 빼앗겨도 우리의 얼은 뺐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증해 주고 있었다는 얘기다. 순국선열들의 절명시를 되짚어 보고자 함이다. 이 시들이야 말로 오랫동안 잊혀진 우리 영혼의 메아리가 아닌가 싶어서다. 


도해순국 결행한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조선왕조 마지막에 세상에 나왔더니/붉은 피 끓어 올라 가슴에 차는구나/19년 동안을 헤매다 보니/머릿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네/나라 잃고 흘린 눈물 마르지도 않았는데/어버이마저 가시니 슬픈 마음 더더욱 섧다/홀로 고향 산에 우뚝 서서/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가이 없다./저 멀리 바닷길 보고파 했더니/7일만에 햇살이 돋아오네/천길 만길 저 물속에 뛰어들며는/내 한몸 파묻기 꼭 알맞겠네”


(我生五百末/赤血滿腔腸/中間十九歲/鬚髮老秋霜/國亡淚末己/親沒痛更張/獨立故山碧/百計無一方/欲觀萬里海/七日當復陽/白白千丈水/足吾一身藏)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경북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적이 있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이 자결하기 1년 전인 1913년에 쓴 절명시(絶命詩)다.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순사(殉死)하려 하였으나 부친이 있어 뜻을 미루어 오다가 부친상을 다 치르고 나서야 비로소 1914년에 절명시에서 밝힌 대로 도해순국(蹈海殉國)을 결행하였다. 

 도해순국이란 무엇인가? 바다로 걸어 들어가 죽었다는 얘기다. 생각해 보자! 가족과 친지들이 통곡으로 전송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유유히 바다 물속으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들어가 마지막 손을 흔들며 죽었을 그 장엄한 모습을 말이다. 그것도 여름철도 아닌, 칼바람에 찢긴 파도가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내고 짐승처럼 울어 대던 동짓날, 영덕군 영해면 대진리 앞바다에서다. 

 그는 죽기 벌써 1년 전에 이 시를 통해 스스로 그렇게 죽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 번에 죽지 못하는 질긴 목숨을 끊기 위해 세 번씩이나 아편을 먹고서야 목숨을 끊을 수 있었던 매천(梅泉) 황현(黃玹)과 어찌 그리도 한 마음이었을까? 


나라 잃음 부끄러워한 매천(梅泉) 황현(黃玹)


 

매천은 전남 광양출신으로 나이 30도 되기 전에 과거시험에서 장원으로 뽑혔지만 시골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강등되자 “미치광이들이 들끓는 도깨비 나라”에 더 이상 벼슬할 마음이 없다는 말을 뒤로 하고 전남구례로 내려가 은거생활을 했다. 그 후 3천권의 책속에서 자신이 죽기까지 47년간의 역사기록인 <매천야록>을 집필한 것으로 유명하다.   

 군청으로 부터 한일 합방령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 밤 그는 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그중의 한수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다.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무궁화 이 나라가 이젠 망해 버렸네/가을 등불아래 책덮고 지난 역사 생각하니/인간 세상에 글하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누나

(鳥獸哀鳴海嶽瀕/槿花世界己沈淪/秋燈掩卷懷千古/難作人間識字人). 


 벼슬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지식인으로 살면서 나라 망했다는 소식 듣고 죽는 사람 하나 없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얘기를 남긴 것이다.  


사재 털어 의병 일으킨 운강 이강년 의병장

 

“오십 평생 죽기를 다짐했던 이 마음/ 국난을 당하여 어찌 살 마음을 먹으리/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끝내 나라를 찾지 못하니/지하에도 남아 있을 칼날 같은 이 마음”(五十年來判死心/臨難豈有苟求心/盟師再出終難復/地下猶餘冒劍心)


 이 시는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던 이강년(李康秊)이 1908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쓴 절명시다. 고향인 문경에서 자신의 재산 전부를 털어 의병을 일으킨 분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안동관찰사 김석중을 처형하기도 했다. 이런 격문을 발표하면서 말이다. “~조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욕뵈니 원수를 어찌 남겨두겠는가?”


매국노 처단한 대한광복군 사령관 박상진 


“다시 태어나기 힘든 이 세상/다행히 장부의 몸을 얻었건만/이룬 것 하나 없이 저 세상 가려하니/청산이 조롱하고 녹수가 비웃는구나”(難復生此世上/幸得爲男子身/無一事成功去/靑山嘲綠水嚬)


“어머님 장례 마치지 못하고/임금의 원수도 갚지 못했네/나라의 땅도 찾지 못했으니/무슨 면목으로 저승에 가나/”(母葬未成/君讐未復/國土未復/死何面目).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여 그 사령관으로 무장투쟁을 벌렸던 박상진(朴尙鎭)이 1921년 8월 대구감옥에서 사형당하는 날 아침에 쓴 시와 사형당하기 하루 전에 쓴 시다.

 박상진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 근무발령을 받았으나 그 즉시 사퇴하고 그 이듬해 만주로 건너가 석주 이상룡 및 일송 김동삼과 같은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다가 1915년에 대구에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국권회복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밀고한 칠곡의 부호 장승원을 광복회 이름으로 처단한 사례는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훗날 우리정부가 친일인사 청산에 게을리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 부호의 아들이 대한민국 건국초기에 정부 요직에 있었던 데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다.



 유일한 평민출신 의병장 ‘태백산호랑이’ 신돌석


 “누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고/낙목이 가로놓인 단군의 터전을 한탄하노라/남아 27세에 이룬 것이 무엇인가/잠시 가을바람에 감회가 이는구나/”

(登樓遊自却行路/可歎檀墟落木橫/男子二七成何事/暫倚秋風感慨生).


 이 시는 신화적인 인물, 경북 영해출신의 신돌석(申乭石)이 남겨 놓은 시다. 얼마나 잘 싸웠으면 별명이 ‘태백산 호랑’이었을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터지자 18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 중에서 유일한 평민출신이었다. 평민이었기에 ‘단군의 터전’을 한탄한다는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08년 11월의 어느 날 그에게 붙은 현상금에 눈이 먼 조선인의 손에 의해 살해 되었다. 


64세 나이에 독립정신 불태운 강우규 의사


  왈우(曰愚)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의 경우는 또 어떤가?! 

 1919년 9월 2일 오후 5시 해군대장출신의 사이토(齋藤室)라는 사람이 조선의 신임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에 내려 쌍두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던져 꺼져 가려는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다시 불태운 분이다. 때는 그의 나이 64세. 당시의 나이로는 환·진갑이 다 지난 노인이다. 일경에 붙잡힌 그는 이듬해 11월 29일 효수(梟首)되기 직전 간수가 할 말이 없느냐고 하자 이런 시 한수를 남겼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어찌 감회가 없으리요

(斷頭臺上 猶在春風 有身無國 豈無感想).” 


단두대에 올라서서야 비로소 봄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니 얼마나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애국충정이었나? 순국선열들이 토해 내는 단심의 애국충정이 새삼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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