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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7] 꺼지지 않는 불꽃 : 8호 감방 어윤희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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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에 피어난 담대한 ‘꽃불’

꺼지지 않는 희망이 되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어윤희는 개성에서 독립선언서 80장을 나눠주다가 투옥되었고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서 1년여를 함께 보냈다. 8호 감방에서 17세 소녀 유관순의 멘토가 되었다. 8호 감방 꽃불들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5일에 한 번 콩밥 한 덩어리를 던져주었다. “아주머니 배고파요”라고 하면 자신의 콩밥까지 유관순에게 내어주곤 하던 어윤희였다. 단식기도한다고 둘러대고 말이다. 해방 후에는 한국전쟁 후 증가한 전쟁고아들의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그들을 돌본다. 스코필드 박사는 어윤희를 일컬어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칭찬하며 의남매를 맺는다.  



유관순 열사가 투옥되었다고 하는 서대문형무소 8호 감방을 또 둘러보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독립공원은 3분 거리다. 공원을 산책하거나 운동을 가곤 한다. 머리를 식히러 산보를 나가면, 붉은 벽돌의 서대문형무소가 공원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다. 무심코 지나가다 울타리로 둘러쳐진 목책에 붙은 A4 용지 크기의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간단한 공적을 읽게 된다.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 이따금 관람하러 들어가 보는 서대문역사문화관.


지난 2월 초에 또 둘러보았던 8호 감방. 그곳에서 보았던 유관순 열사 외에 어윤희, 신관빈, 심명철(본명: 심영식), 권애라, 임명애, 김향화의 사진과 간단한 설명문 몇 줄. 

그날도 무거운 마음과 퍽 아픈 마음으로 다시 서재로 돌아와 글을 마무리했었다. 학예사님은 설명을 해주시며, 여기 7명 중에 유관순 열사가 의지했던 분이 어윤희 선생(당시 56세)이라고 했다. 유관순 열사가 “아주머니”라고 부르며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털어놓곤 하던 분이라고 했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름들. 불꽃 6송이. 사진 중에 제법 미모가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김향화는 수원의 기생으로서 독립 만세를 부르다 잡혀 왔다. 어윤희는 개성에서 독립선언서 80장을 나눠주다가 투옥되었고 유관순과 같은 감방에서 1년여를 함께 보냈다. 8호 감방에서 17세 소녀 유관순의 멘토가 되었다. 8호 감방 꽃불들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5일에 한 번 콩밥 한 덩어리를 던져주었다.  


“아주머니 배고파요”라고 하면 자신의 콩밥까지 유관순에게 내어주곤 하던 어윤희였다. 단식기도한다고 둘러대고 말이다. 


기도하는 여인        

    

어윤희는 기도하는 여인이었다. 갑오개혁이 있던 1894년에 결혼(당시 18세)했으나 3일 만에 남편은 동학군으로 떠나 전사했다. 1897년에 부친마저 잃었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어윤희는 충북 청주시 소태면 덕은리 출생이지만, 부친까지 잃고 황해도 평산, 해주 등을 전전하다가 경기도 개성에 정착한다(1909년). 개성 북부교회 전도사의 설교에 감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고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다(당시 30세). 선교사의 추천으로 개성 미리흠여학교와 호수돈여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되어 전도 부인 일을 한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 어윤희는 개성여자성경학원 사감으로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를 개성에 사는 지도적 목회자들이 배부하길 두려워하자 어윤희가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개성에 전파했던 인물이다.”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원장의 증언이다. 남들이 두려움에 떨며 나서지 못하는 일에 나선 56세의 불꽃. 1919년 2월 28일 어윤희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한다. 개성에 전도 부인이었던 신관빈 지사와 함께 한 일이었다. 그 일로 심명철, 신관빈, 권애라도 함께 8호 감방에 갇히게 된다. 두려울 것이 없는 담대한 여인. 8호 감방 벽에 붙어있는 사진 속에 어윤희의 얼굴은 한쪽이 일그러진 것 같은 평범한 중년, 아니 노년으로 접어드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온 모습.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어떤 용사보다 숭고한 용맹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선택은 어떤 용사보다 수려한 울림이 있었다. 

권애라에게 독립선언서를 받아들고 “내가 배포하겠다”라고 나서며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20여 년 동안 전도 부인으로 살았던 그녀에게 변곡점(turning point)이 되게 했던 일이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신앙인의 양심으로, 가슴속에서 끓고 있는 애국심에서 선택한 56세 여인의 결정. 그녀의 결단으로 전도 부인 신관빈과 개성에 독립선언서를 뿌렸다. 


교회 지하실에서 숨죽이고 있던 독립선언서는 어윤희에 의해서 그렇게 배포되었다. 예배당 창문 커튼을 잘라 만든 태극기를 들고, 개성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개성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은 어윤희, 신관빈 전도 부인의 공로였다. 어윤희 지사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가면서. 


“내 몸이 묶일지언정, 내 마음을 묶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강한 신념의 힘


일본에게 몸이 포박당할지언정, 독립에 대한 열망과 옳은 일에 대한 자신의 의지는 포박할 수 없다는 단호한 태도일 것이다. 

일본이 어윤희에게 어떤 참혹한 고문을 가했을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 일이다. 누가 시켰느냐는 배후를 묻는 일본인에게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우냐?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한 거다”라고 쏘아붙였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이면 닭이 우는 것처럼, 독립할 때가 되었다는 자연의 순리, 우주의 순리를 단언했다. 인간에게 신념은 이렇게 사람을 무섭게 무장시키나 보다. 남편도 부모도 잃은 여인.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약한 조선의 여인이 이처럼 신념에 찬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신앙의 힘인지도 모른다. 풍랑 이는 새벽 바다에 던져져도, 고래 뱃속에 들어가서도, 사자 굴에 던져져도 동아줄을 열망하는 신앙의 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참으로 강한 게 신앙인가보다. 


어윤희는 유관순과 함께 비밀통신방법으로 감옥에 벽을 두드려 옆방에 갇힌 투사들과 연통했다. 17개 감방 동지를 규합하여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투쟁을 주도했다. 1919년 12월 24일 성탄절 전야에도 옥중 만세 시위 투쟁을 전개했다. 어디에 처하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를 전하라는 성경 말씀대로, 대한의 독립을 외친 어윤희 지사. 유관순 열사가 매일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고문을 당할 때마다 위로하며, 상처를 보듬어주던 어머니 같은 손길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꺼지지 않는 불꽃


어윤희는 1920년 4월 28일에 석방되어 개성에서 전도 부인의 일을 하면서, 신간회와 근우회 개성 지회의 주역이 되었다. 독립 항쟁과 여권신장에 힘쓴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보따리 장사로 가장하여 보따리 속에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다니며 여전히 개성 곳곳에 전하며, 독립에 열정을 불태웠다. 여성들을 계몽하는 일에도 헌신적이었다. 체구는 작지만, 야무진 어윤희 지사의 행보는 출옥 후에도 독립을 향해서 걸었다. 


그러나 1931년에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어윤희는 아동복지 활동에 헌신하게 된다. 1937년 감리회 지원으로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한다. 개성 유지의 도움이 있었지만, 이번에도 용기 있는 결단의 길을 연다. 의병과 독립투사들의 시신이 장작처럼 쌓이고, 그들의 자녀들은 고아가 되었다. 그들을 돌봐야 한다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이번에도 어윤희 지사가 선택한다. 어떤 이유로든 보육원에서 돌봐야 할 아이들을 돌보았을 것이다. 그녀도 남편이라는 울타리와 부모를 잃은 빈 둥지였으므로….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마포에 서강 유린보육원을 설립한다. 특히 한국전쟁 후 증가한 전쟁고아들의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그들을 돌본다. 


스코필드 박사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어윤희가 8호 감방에 있을 때였다.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였던 노순경을 방문했다가, 8호 감방의 꽃불들을 보게 된다. 어윤희가 출옥 후에도 끝없이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며, 스코필드 박사는 어윤희를 일컬어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고 칭찬하며 의남매를 맺는다. 스코필드가 8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재산의 일부를 어윤희가 운영하는 유린보육원에 기증한다. 헐벗고 굶주린 고아를 돌보는 일에 발 벗고 나선 어윤희 지사나 그 일을 도운 스코필드 박사나 모두 백합처럼 향기로운 분들이다. 


이름 없는 마더 테레사들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고, 모진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다가 석방된 이들은 대부분 그들의 행보를 멈추거나 행보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윤희 지사는 전도 부인에서 독립투사로 다시 보육원을 운영하는 사회사업가의 길을 걷는다. 자그마한 키에 야무진 표정. 그녀가 삶의 족적을 그렇게 내디딘 마음의 결단–행보를 결단하고 실행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8호 감방 시절, 5일에 한 번 던져주던 콩밥 덩이를 받아먹던 배고프고 서러웠던 시절. 배고파하던 유관순에 대한 구슬픈 기억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 당시 나라를 빼앗겨 먹을 것이 풍부하지 못했으니, 누구나 굶주리던 시대이니 고아들을 먹이고 돌봐야 한다는 천사의 마음을 실천한 것일까? 


세상은 마더 테레사 수녀를 성인(2016, Saint)이라고 칭송한다. 우리의 어윤희를 우리는 이름 석 자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도 허다하다.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윤봉길, 안중근, 김구 등만 있었을 것으로 아는 우리들. 교과서에서 배운 허다한 독립영웅들보다 더 많은 익명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밤하늘의 별만큼 무수하다는 것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윤희 지사는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의 서훈을 받았지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고 하늘에서 침묵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던 성현의 말씀처럼, 그들은 독립을 위해 헌신하여 행복하고 마음이 떳떳했으리라. 자신의 안일을 위해 걸은 이들을 우리는 친일자라고 비난한다. 


어윤희 지사를 만나서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의 영혼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8호 감방 시절에 심명철(본명 : 심영식)이 지어 함께 불렀던 노래 가사가 어윤희로 하여금 고아들을 먹이게 했다”고.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8호 감방에 수감되었던 심명철 지사.


지난 2월 초 내가 8호 감방을 둘러보러 갔을 때, 서대문공원은 간밤에 내린 폭설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하얀 눈밭 위에 유난히 붉은 벽돌은 선명했고, 8호 감방의 꽃불 7송이의 삶의 방식은 각자가 명징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어윤희 지사가 만약 유관순 열사처럼 이화학당 출신이었다면, 어윤희 지사를 이화인들의 노력으로 어윤희를 건국훈장 애족장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설핏 지나간다. 만약 천안 출신이었다면, 천안시가 유관순 열사의 추모각을 짓고 기념관을 지어 유관순 열사를 기리듯이 어윤희 지사도 그렇게 기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간다. 어윤희 지사의 족적도 그리 범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 일신의 안위만을 돌보지 않고, 커다란 의미의 “너”를 위해서 살아낸 그녀의 삶은 일생 전체가 대의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30세에 기독교에 입문하여 전도사가 되고 전도 부인이 된 것은 개인적인 신앙의 실천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56세의 나이로 남들이 마다하는 일-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담대한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앙으로 무장하였다 해도 애국심이 없다면 행동으로 옮기기 힘든 일이었다. 어윤희의 결단으로 인해 개성에서도 3·1만세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커다란 공로자다. 특히, 보따리를 들고 행상을 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개성 곳곳을 다니며 가정마다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일 또한 기릴 일이다. 유관순 열사가 충청 지방 유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했던 일과 맥락이 같은 행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출옥 후, 1937년 감리교 지원이 있었다고는 해도,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하여 고아들을 돌본 일도 한국의 마더 데레사가 아닌가? 해방 후에도 그 일을 중단하지 아니하고 월남하여 마포에 서강 유린보육원을 설립한 일도 마찬가지 실천이다. 기독교 전도사로서 신앙의 실천이었다 해도, 사회에 이바지한 기여도는 누구 못지않은 일이다. 그녀는 마더 데레사 수녀처럼 기려지고 성인으로 추대할 만한 큰일을 해냈다. 결혼한 지 3일 만에 남편을 잃은 여인, 부모를 모두 잃은 여인.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여인. 그 시대에 사회적인 약자일 수밖에 없던 그녀는 56세에 독립 투사로 뒤늦게 사회사업가로 사회에 이바지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를 기리는 일에 인색하다. 


마포에 있는 서강 감리교회에 “장로어윤희여사기념비”가 세워져 있을 뿐이다. 유린보육원 출신들과 교회 차원에서 세운 비석이다. 


청주시 상당구 목련로 충북미래여성프라자 1층에 있는 “충북여성독립운동가 전시실”에 그녀의 흉상이 충북지방의 독립투사들 흉상 속에 함께 서 있다. 한국에서 그녀를 기리는 것은 두 곳이 전부다. 더욱 많은 이들이 어윤희 지사를 알도록 기려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기려지고 칭송받아 마땅한 한국의 마더 데레사이므로…. 자식이 없었으니, 보육원 원아들을 자식 삼았을 것이고, 누구도 그녀를 기리는 일에 앞장서지 않고 있다. 그녀가 34세에 다녔던 미리흠 여학교와 호수돈여학교는 북한에 있으니, 그녀의 모교는 그녀를 위해 힘쓰지 않을 것이다. 청주시 또한 그녀 한 사람만을 위해서 힘을 모으지 않고 있다. 충북의 독립투사는 그녀 외에도 이화숙, 박자혜, 윤희순, 박재복, 신순호, 오건해, 임수명, 연미당, 신정숙 등이 있다. 그녀들 모두를 위한 기념관을 각각 건립하여 기릴 수도 없을 것이고 기념관을 채울 자료들조차 부족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다. 그들을 기리고 기리는 일….


새벽을 알리는 닭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우냐? 우리는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한 거다.”


어윤희 지사가 남긴 말을 떠올리다가 문득 어윤희 지사가 언급한 “닭”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녀는 어떤 의미에서 “닭”을 말했을까? 새로운 하루의 시작,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를 상징적으로 말한 것일 것이다. 그녀가 한 말은 산문적이지만, 이육사가 ‘광야’에서 읊은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연상하게 한다. 


이육사 시인이 말하는 “하늘이 처음 열리고”는 “태초에 세상이 창조되어 열리고”라고 해석해 보자. 그렇다면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는 닭도 세상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를 생각해 보자. 닭은 동이 트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알람이 울리듯 새벽을 알린다. 닭의 생리이다. 새 아침, 새벽에 우는 닭은, 어둠이 걷히고 새로운 독립의 날을 갈망하는 그 시대 모든 이들의 열망의 표상이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애국지사. 서로 안면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 때 이 땅의 모든 이들의 집단적 갈망은 광복이었을 테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인 새벽을 떠올린다. 그리고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을 광복의 메시지로 비유적으로 쓰고 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벽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닭이 운다”는 자연의 순리.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한 거다”라는 확신에 찬 단언. 어느 남성 독립운동가나 사상가 못지않은 신념에 찬 명언이 아닐까 한다. 


어윤희의 “독립할 때가 왔으니까 궐기하는 거다”라는 구절은 이육사 시인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구절과 일맥상통한다. 


어윤희는 일상어로 산문 식으로 표현했고, 이육사는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시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두 애국지사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일치한다. “닭의 울음/광복을 위한 절규”는 독립 만세 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남성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에 눌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활약이 저평가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독립투사보다 치열하게 독립을 위해 헌신하며, 생의 마지막 날까지 고아들을 돌보았던 사회 기여자의 이름 석 자조차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서양의 마더 테레사 수녀는 추앙하면서….


엊저녁 고단하여 자정이 되기도 전에 잠을 청했다가 웬일인지 새벽에 잠이 깨었다. 이곳은 서울이니 닭 우는 소리보다, 자동차 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몇 달 전 충남 부여에서 열흘이 넘게 지낸 적이 있다. 새벽마다 닭 우는 소리에 잠을 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어윤희 지사가 말한 “새벽이 되면 누가 시켜서 닭이 우냐?”는 말과 이육사 시인의 시 구절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가 떠오르면서 두 애국지사가 말하는 닭 우는 소리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시대, 우리에게 닭 우는 소리는 무엇일까? 


군사간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총으로 일본을 물리치려 했던 이육사 시인은, 이 새벽에 총구를 다듬었을 것이다. 새벽에 광야와 청포도 같은 시를 지을지도 모른다. 


어윤희 지사는 어느 마을에 전해줄 독립선언서를 보따리 속에 묶어, 먼 길을 나서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린보육원 시절, 어윤희는 보육원 고아들을 먹이려 새벽밥을 짓느라 부산할지도 모른다.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장날, 독립 만세를 부르자고 유림들을 설득하러 오늘도 품에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짚신 발로 새벽길을 나설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들은 하늘에서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을 것 같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새벽길을 떠나고 있는가?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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