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08] 양평 물의 비밀 - 몽양기념관에서 만난 손기정 선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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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손기정·심훈
그리고 베를린 올핌픽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몽양은 아들의 친구가 달리기를 잘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긴다. 평소 아버지처럼 따랐던 몽양에게 베를린 올림픽 출전에 대한 갈등을 의논한다.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나가는 것은 원통하지만, 나가서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라”고 독려한다. 손기정은 이를 악물고 달렸고, 2시간 29분 19초라는 올림픽 신기록을 내고 금메달을 거머쥔다. 하지만 손기정은 환희의 기쁜 표정을 짓지 못한다. 사진 속에 손기정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리고 심훈은 손기정이 이룬 자랑스러운 쾌거를 시로 남긴 후 행방불명되어 죽음을 맞았다.
“한파 속에서 강물이 얼면 강물에 살던 물고기들도 모두 얼었다가, 봄이 되면 다시 부활하는 걸까?”라고 질문했더니, 시골에서 오래 살았다는 친구의 대답은 신기했다.
“물에는 비밀이 있어. 강 표면이 두껍게 얼어도, 얼음 밑으로 2m 속은 늘 섭씨 4도 정도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해. 그 속에서 겨울에도 물고기들은 얼어 죽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거야. 겨울엔 물색이 거의 검은빛 초록을 띠었다가, 날이 풀리면 물빛도 연두빛으로 변하지.”
“신기한 물의 비밀을 이제야 알았네. 강 표면은 얼어도 강심은 얼지 않는구나!”
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서울에서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양평 양수리(두물머리)를 찾곤 해왔다. 멀리 금강까지 가지 않아도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가 만난다는 양수(兩水)리 두물머리에 가면, 마음이 고요해지곤 했다. 마음이 차분하게 깨끗해지는 느낌이 들곤 했다. 남한강과 북한강도 두물머리에서는 서로 만나 넓은 바다로 흘러간다는데… 때로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두물머리 생각이 나곤 한다.
두물머리에 가기 위해 경의·중앙선 전철로 양수역에 내렸다. 출발할 때는 맑았던 서울 하늘과 달리 이곳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촉촉한 양수리가 되겠구나를 생각하며, 강물을 보러 가려니 빗물이 성가시다.
양평에 올 때마다 지평 전투 전적비, 지평막걸리 양조장에 몽클라르 장군 기념비, 을미의병 기념비, 황순원 문학관, 두물머리, 용문사 은행나무, 구둔역, 이항로 생가 등을 차례로 둘러보곤 했다.
언덕길 위 몽양기념관
근대사 이야기들 빼곡
비를 피해, 지나가는 노부부(90세가량)의 말대로 기념관을 둘러보기로 한다. 경의·중앙선 전철로 양수역에서 서울 쪽으로 한 구역을 이동하면 신원역이다. 신원역에서 오른쪽 언덕길을 50m쯤 올라가면 기념관과 생가가 있다고 했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가려니, 몽양길 양옆으로 5월 나무들이 초록을 더하고 있다. 보슬비 빗방울을 받으며 풀들이 바람에 살랑인다. 주변에 인가나 번화한 건물은 전혀 없고, 검은색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 몽양기념관이 있다. 계단으로 올라가니 기와집이 꽤 크다. 몽양은 양평 부잣집 첫째 도련님으로 태어났다.
전시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몽양이 계동 집에서 사용했던 갈색 책상이다. 그의 탄생에서 사망까지의 과정을 사진과 함께 설명문이 붙어있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모골에서 구한말에 태어나(1886년) 일제강점기를 살아내고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테러로 사망했다는 일대기다. 전시실의 마지막 부분엔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훈장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과 영상실까지 관람까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몽양 선생이 서울 배재학당, 흥화학교, 우무학교를 다니며 신학문과 통신직업을 익혔다는 것은 신기하지 않았다. 평양 장로교회 연합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중국 망명 후 난징(南京) 진링(金陵) 대학 영문학을 공부했다는 것도 신기하지 않았다. 해방 후 남한을 미군이 북한을 소련군이 신탁통치를 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역사 시간에 배웠던 골치 아픈 근대사의 아픈 역사. 외면하고 싶고, 읽고 싶지 않은 신탁통치에 대한 설명문.
일본 제국주의에서 해방되었으나, 해방이 광복이 아니고 신탁통치로 이어져야 했던 근대사 이야기들이 빼곡하다.
몽양과 손기정 선수의 인연
고개를 떨군 금메달리스트

여운형 선생이 1929년 상해에서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일이 있었다. 서대문감옥과 대전형무소에서 3년간 갇혔다가 풀려난 후,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된다. 1937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후, 손기정 선수가 몽양의 경호를 맡기도 했으며, 1947년 몽양의 영결식에서 철로 만든 관을 운구한 것도 손기정 선수였다. 서울에 돌아와 몽양 선생에 관한 책을 도서관에서 여러 권 구하여 읽으면서, 손기정 선수와 여운형 선생의 인연을 이해하게 되었다.
손기정 선수는 신의주 출신이다. 태어나보니(1912년), 조선은 일본 제국주의의 속국이었다. 가난하여 배를 곯는 일이 많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매일 2km가 넘는 먼 거리를 뛰어다녀야 했다. 압록강 주변을 뛰어다녔다. 달리기를 잘하는 이유로 학교 선생님은 서울로 가길 권하여 양정고등보통학교(양정고등학교) 학생이 된다. 서울에서도 참외 장사를 하고 우동을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닌다. 몽양의 아들인 여홍구와 손기정은 양정고보 학우였다. 몽양은 아들의 친구가 달리기를 잘하는 것을 기특하게 여긴다. 평소 아버지처럼 따랐던 몽양에게 베를린 올림픽 출전에 대한 갈등을 의논한다.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나가는 것은 원통하지만 나가서,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라”고 독려한다.
손기정은 이를 악물고 달렸고, 2시간 29분 19초라는 올림픽 신기록을 내고 금메달을 거머쥔다. 함께 출전했던 남승룡은 동메달을 딴다. 손기정은 환희의 기쁜 표정을 짓지 못한다. 사진 속에 손기정은 고개를 떨구고 있다.
물 표면이 얼어도 강심 깊은 곳은 얼지 않아서 물고기들이 영하의 날씨에도 얼어 죽지 않는 것처럼, 손기정 선수의 피는 조선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출전하지 말았어야지요.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출전하여, 마라톤에서 1등을 한 것은 일본에게 영광을 준 것이죠. 그때 우리는 다 빼앗겼었으니까요. 주권도 영토도 국적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내주었으니, 대외적인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조선인들의 국적은 조선인(Korean)이 아니라, 일본인(Japanese)이었다. 그건 손기정이 선택한 국적이 아니라, 조상들이 잘못 만들어 놓은 일본의 속국이라는 통탄할 현실이었다. 달리고 싶었고, 세계 만방에 자신이 달리기의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자존감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어쩌면 배를 곯고 살았던 지독한 가난이 그를 달리게 했고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하게 했는지 모른다.
몽양기념관에서 손기정 선수 사진 앞에서 울컥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선중앙일보 호외에 실린
심훈의 절명시

영하의 날씨에도 얼어 죽지 않는 강물 속에 물고기들처럼 금메달리스트보다 더 오래 사는 월계관 나무. 조경을 위해서 그냥 심어놓은 줄 알고, 그냥 지나칠뻔했다. 그 나무를 보러 일부러 제주도에서 올라오셨다는 70대 할머니 두 분의 설명이 없었다면, 손기정 동상 아래쪽에 있는 심훈 선생의 시비를 읽는 데 온 정신을 빼앗길 뻔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1937년 8월 9일) 쾌거 소식으로 인해, 8월 10일 조선중앙일보의 새벽은 떠들썩했다. 사장인 여운형 선생은 호외를 급히 내보내라고 했다. 그 호외 뒷면에는 심훈 선생이 작시(作詩)한 시가 적혀 있었다. 그 시는 심훈의 절명시가 되었고, 심훈은 행방불명되어 죽음을 맞았다.
그의 소설 「상록수」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배우까지 캐스팅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일본은 심훈의 사인(死因)을 장티푸스라고 발표했다. 몇 년 전 당진에 있는 심훈문학관에서 해설사님에게 들었던 설명이 생각난다.
“상록수 영화가 만들어져서, 대중들에게 미칠 어마어마한 영향력 때문에 일제가 심훈 선생을 제거한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고 싶다.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의 쾌거를 시로 써서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으니, 두 선수의 쾌거로 인해 조선인들의 민족의식이 들불처럼 일어나 엄청난 동요를 일으킬 것을 내다보고, 요시찰인물이었던 심훈 선생을 제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과 상상이다.
오오, 조선(朝鮮)의 남아(南兒)여!
마라손에 우승한
손(孫)군과 남(南) 군에게
- 심훈(沈薰)
그대들의 첩보(捷報)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 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할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지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서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손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엿던 선조들의 정령(精靈)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심훈 선생은 두 선수의 첩보 는 2연에서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1905년 을사늑약, 1910년 국권침탈, 1919년 기미 독립 만세운동 실패로 연속되었던 조선의 근래의 발자취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로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향의 하늘도 올림픽 횃불을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한다”고 했다. 2천 3백만 조선인들에게 희망과 승리의 기쁨을 주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심훈은 “마이크를 잡고 전 세계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라고 했다. “승리를 거머쥔 이제도 이제도 세계인들은 조선을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것이냐?”고 세계만방에 마라톤 승리를 통해서 민족의 자존과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외교권, 주권, 태극기를 빼앗겼으나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혈관에는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모를 사람은 세계인 중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심훈의 시는 “마라톤 승리는 조선인들에게 긍지와 희망을 준다”라는 강한 확신과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
이 시는 대전 현충원 손기정 선수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체육을 좋아했던 몽양
스포츠로 단결 이루려
경기장 스피커에서 1위를 호명하는 소리는 “기테이 손(Kitei Son)”이었으나, 독일 아나운서는 알고 있었다. “한국 대학생이 세계의 건각들을 가볍게 무리쳤습니다. 그 한국인은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었습니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뒤를 지나 뛰었습니다. 그가 이제 트랙의 마지막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우승자 ‘손’이 막 결승전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고개를 떨구었다. 승부욕에 불타서 세계인들에게 달리기의 왕이 되고 싶었던 조선인 손기정 선수. 선대(先代) 정치가들의 잘못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달 수 없었던 아픔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한 힘없던 선대의 잘못으로 금메달 월계관을 쓰고도 죄인처럼 고개를 떨군 손기정 선수. 얼어버린 강(江)의 표면을 생각한다.
1937년 8월 13일 자(字) 조선중앙일보 석간신문에 손, 남 두 선수의 쾌거를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두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채 보도했다. 이 일의 선봉에 선 것은 유해봉 기자였다. 총독부 검열에서 무사히 통과되었던 일이다.
8월 25일 자(字) 동아일보 기사에도 일장기가 지워진 채 기사가 실렸다. 이길용 기자와 이상범 화백의 애국심이었다. 일장기에 청산가리를 부어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이다. 이 일에 관련된 기자들은 모두 총독부에 끌려가 40일이 넘도록 고문과 고초를 당해야 했다. 동아일보는 발매가 금지되고 정간되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자진 휴간에 들어갔다가 1937년 11월에 폐간되었다.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을 독려하면서, “제군들은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려라”고 환송식에서 선수들에게 독려했던 몽양 선생은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 사진 보도로 인해 신문사 문을 닫아야 했다. 체육을 좋아해서 조선중앙일보에 스포츠란을 일부러 만들 정도였다. 이 시기에 몽양 선생은 조선체육회 이사, 축구협회 회장, 농구협회 회장 등 단체장을 맡으며 경기를 주최하고 젊은 선수들을 후원했다. 스포츠를 통해서 청년들의 단결과 독립정신을 고취했다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어느 기념관이나 그곳에서 기리는 이를 추앙하고, 그 인물의 긍정적인 공로(功勞)로 일관하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남한강과 북한강 물줄기가 하나로 만나는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가까운 거리 신원리 묘골 출신 몽양 선생. 키 크고 덩치가 컸던 카이젤 수염의 미남, 여운형 선생을 양수리 물을 보러 갔던 여행길에서 우연히 조우했다. 그가 살다간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혼란기를 읽으면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았다.
몽양길을 걸어 내려와 신원역에서 전철을 타고 2시간여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은 비가 오지 않았고, 탁한 공기가 몇 시간 전 양평 공기를 그립게 한다. 다시 양수리 강물이 보고 싶다.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 『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