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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2/10] 조선 청년 이봉창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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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박탈당하고 빼앗긴 청년

일왕 향해 수류탄을 되돌려주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일왕 히로히토는 그들이 신격화해놓은 신이며 국가였다. 목숨을 걸고 일왕의 안전을 지키는 게 경시청의 당연한 책임이었다. 그런데, 바로 경시청 앞에서  식민지 지배에 있던 조선 청년이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도전 중에 도전이었다. 그들의 자존심을 할퀴는 일이었다.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이는 행복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의 피붙이도 아닌데, 여행자들 중에 몇몇은 멀리 바다를 건너 그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이들도 있다. 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나였다. 몇 달 전부터 일본 도쿄에 가면, 사쿠라다몬과 경시청, 이시카와형무소를 꼭 둘러봐야겠다고 별렀었다. 


나는 전철로 도쿄역에서 내려 황거(皇居)를 찾았다. 도쿄역에서 5분 정도 걸으면 히가시교엔이 나온다. 히가시교엔은 일반인들이 언제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왕실 정원이다. 해자 위에 안경처럼 생긴 니쥬바시(이중교)를 둘러보고 사쿠라다몬으로 갔다. 사쿠라다몬은 니쥬바시에서 멀지 않았다. 황거 광장을 따라 7~8분 정도 걸은 것 같다. 우리와 동행하며 길 안내를 해주었던 안내인(일본 거류 한국인)이 “여기가 사쿠라다몬입니다.” 라고 했다. 웅장한 무엇인가가 있을 것을 기대했으나, 사쿠라다몬(櫻田門)은 히가시교엔에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황거 왕실 정원 서쪽에 있는 문. 그리 화려하지도 않은 조촐한 풍광의 철문(鐵門)이다. 문 안쪽엔 철로 된 둥근 봉을 규칙적으로 박아놓고 그들은 그들의 왕궁을 수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을 둘러보다가 “高麗門”이라는 한자(漢子)가 눈에 띄였다. “이것은 또 무엇일까요?”라고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왕이 바깥나들이를 하려면 이 사쿠라다몬을 통해서 드나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요즘은 아침마다 사쿠라다몬의 검은 철문이 열리면, 일본인들은 그곳으로 산책을 하러 들어간다고들 한다. 


사쿠라다몬을 나오니 고풍스러운 페이지를 넘겨 도시의 모습이 펼쳐진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초록색 소나무들과 해자의 물결은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다. 도시의 높은 건물이 근엄한 얼굴을 보인다. “여기가 경시청입니다. 경시청을 보고 싶다고 하셨죠?” 안내인의 음성이 들린다. ‘사쿠라다몬과 경시청은 이렇게 가까이 붙어있구나!’ 라는 생각도 잠깐. ‘우리나라 광화문과 경찰청이 있는 위치와 거리가 비슷하네.’ 라는 생각을 했다. 사쿠라다몬에서 나오면 ‘ㄱ’ 자로 꺾여 왼쪽 거리에 경시청이 있으니 말이다. 경시청은 우리나라 광화문과 세종문화회관 자리 정도의 거리라고 할까?’ 이런 유사성을 생각하면서 길을 걸었다. 안내인이 한 마디 덧붙였다. “경시청 건너에 있는 저 건물이 일본 법무성입니다. 여기가 일본의 행정거리이지요” “네,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나는 1932년 1월 8일로 시간 여행을 그 순간 떠나보았다. 그곳에 여행을 갔던 날이 2016년 2월 1일이니, 거의 84년 전이다. ‘이봉창’이라는 조선 청년이 일왕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던 곳이다. 어떤 기록에는 사쿠라다몬이라고 되어있고, 어떤 기록은 경시청 앞에서 일어났던 일이라고 되어있다. 도쿄행 비행기 안에서도 ‘어떤 것이 진실일까?’를 내내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했던가? 


일본에 대한 도전 중에 도전

제국의 자존심을 할퀴다


84년 전,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황거로 돌아가는 일왕의 경호는 경시청의 책임이었다. 경시청은 일왕을 엄호(嚴護)해야 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그들이 신격화해놓은 신이며 국가였다. 목숨을 걸고 일왕의 안전을 지키는 게 경시청의 당연한 책임이었다. 그런데, 바로 경시청 앞에서 식민지 지배에 있던 조선 청년이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일본에 대한 도전 중에 도전이었다. 그들의 자존심을 할퀴는 일이었다.


일본은 세계 언론에 늘 이렇게 보도했었다. “일본이 조선을 잘 다스려서 조선인들은 일본의 지배에 감사하며 늘 평온하게 잘 살고 있노라”고. 그런데 이 사건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일본의 일왕을 죽여야 할 만큼 억압받고 분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립을 원합니다.”라는 저항의지를 온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었다. 일본은 경시청 앞에서 던졌던 이봉창의 폭탄 투척 장소를 바꾸어 발표했다. “행사를 마치고 궁으로 들어가던 궁궐문(사쿠라다몬) 앞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우리는 여기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이봉창의 일본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이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은 1940년 2월부터였다. 그런데, 이봉창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25년부터였으니, 그 이름은 일본의 강압으로 지은 게 아니었다. 7년 전에 일본인의 양자(養子)가 되어 받은 이름이었다. 철저히 일본인이 되어 황국신민이 되고 싶었던 스물네 살의 조선 청년 이봉창의 선택이었다. 


굴욕적인 괄시에 분노하며

세상을 막살던 조선 청년


일본식 복장 하오리를 입고 게다를 끌고 다니며, 일본말을 유창하게 잘했던 조선 청년 이봉창. 아무리 안간힘을 쓰고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는 조센진이라는 이유로 봉급을 깎여야 했고, 봉급을 떼어야 했고, 승진 기회에서 밀려야 했다. 아니, 일자리를 빼앗겨야 했다. 빼앗겨 본 사람은 안다. 박탈당해 본 사람은 안다.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안다. 자격을 제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운 일인지를. 수모와 괄시를 받는 굴욕이 얼마나 분한 일인지를…. 일본에서 받은 굴욕적인 괄시에 대한 분노였을까? 주인으로부터 그는 한심스럽다는 질책을 받고 회사를 그만둔 일도 있었다. 가방점 외판원을 할 때도 판매금을 탕진하기도 한다. 


그랬다. 일본에 대한 이봉창 나름의 분노의 표출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센진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무시당하고 학대받았던 것에 대한 분노. 그렇게 세상을 막 살던 조센진, 기노시타 쇼조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더욱 변해갔다. 14세부터 과자가게 점원으로 시작해서 19세 때 남만철도회사 운전 견습생을 했던 이봉창. 1925년(24세 때)에 오사카로 건너가 부두노동자가 되기도 했던 이봉창. 


그러나 도일(渡日)과 함께 그는 변했다. 막일과 이 가게 저 가게 점원으로 돈벌이를 위해 살았고, 판매금을 갖고 도주를 일삼는 부도덕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독립 운동가다운 거룩함이 그에게 없어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던졌다. 아무도 던지지 못하던 수류탄을 일황을 향해서…


청년 이봉창의 아름다운 변심

“왜 일왕을 죽이지 못하오”


그가 일본을 떠나 상해로 이동한 것이 1931년 1월의 일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러 일부러 그곳으로 찾아갔는지, 조센진을 차별하는 일본이 싫어 새로운 곳으로 돈을 벌러 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상해에서 안중근 의사의 막내 동생인 안공근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안공근은 임시정부를 찾아가 보라고 소개한다. 그렇게 해서 이봉창, 기노시타 쇼조는 김구 선생과 임정의 독립 운동가들을 만난다. 그리고 그는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왜 일황(日皇)을 아직도 죽이지 않고 있소?”라고 직언한다. “일개 일본 대신도 죽이지 못했는데 어떻게 일왕을 죽이겠소?”라고 누군가 대답한다. “일황(日皇)의 능행을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일황이 내 앞을 지나갈 때 폭탄만 손에 있다면 던지고 싶었소.”라는 말을 한다. 


정식 교육을 받은 것은 문창보통학교에 4년 다닌 게 전부였던 그였다. 독립운동가가 될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신흥무관학교와 같은 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적도 없고, 민족의식 운운하는 고등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그저 막노동과 상점 점원으로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는 식민지 치하에 가난한 노동자였다. 방탕과 횡령, 결근을 일삼는 불성실한 떠돌이 노동자. 그의 마음을 지켜주는 좌우명도 신념도 없던 황국신민이 되고 싶었던 이봉창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하늘이 들었다. 이 마음을 하늘이 받아주었다. 


김구 선생은 그에게 일자리를 알아봐 주었다. 악기점과 인쇄소에서 일하며 3개월에 한 번 정도씩 김구 선생을 몰래 만났다. 그리고 상해에서 지내는 1년여 동안 이봉창은 엄청난 전환을 한다. 김구 선생에게 영향을 받아서인지, 일본에서 받은 수모에 대한 반항심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한 순간이라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으며 제대로 살고 싶었던 이봉창. 그는 임정의 독립 운동가들의 의심과 경계 속에서도 자신을 믿어주는 김구 선생에게 맘을 열게 된다. 친아버지에게도 어머니랑 같이 버림을 받았었던 이봉창이었다.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서라도 일본인이 되어 대접받으며 잘살아보고 싶던 이봉창이었다. 

그가 상해로 오기 전, 1928년 일왕(이로히토)의 즉위식을 보러 교토에만 가지 않았어도 그의 오늘은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차비를 들여 히로히토를 보러 가던 중 검문을 받고 그는 유치장에 9일 간 갇히게 된다. 이봉창은 일본인 신분이었지만, 그의 가방에서 나온 ‘한글 편지’가 문제였다. 고향 친구와 나눈 편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로 쓰인 편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애써도 씻기지 않는 조선인의 피가 자신에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었다. 일왕의 즉위식을 보면서, 자신이 황국신민임을 확인하여 일본 땅에서 잘살아보려 다짐하려던 그의 꿈은 부서졌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일본에 분노한다. 아니, 자신이 황국신민이 될 수 없음을. 조선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은 2등 신민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부두에서 막노동이나 하며 일본의 밑바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아픔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라를 빼앗긴 조국의 현실 때문임을…. 


그리고 그는 일황(日皇)에게 폭탄을 던지고 싶은 사람으로 변한다. 기노시타 쇼조에서 이봉창으로 자아정체감이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상해에서 만난 김구 선생은 그런 이봉창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를 믿어주기 시작하고 격려하고 따뜻하게 대접해주었다. 아버지처럼.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말이 있다. 남자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해서 이봉창은 “세상에 쾌락이라는 것은 거의 맛보았습니다. 영원한 쾌락을 맛보고 싶습니다.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할 성업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라는 의지를 김구 선생에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상해 임시정부 요원들과 김구 선생을 지켜보며 자신이 할 일을 찾아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어에 능숙하고 동경 지리를 잘 아는 그에게 엄청난 임무가 주어졌다. 그것은 그가 행동으로 옮기고 싶었던 일이었다. “사람은 자신의 맘에 품은 대로 이뤄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시간이다.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

영웅과 인간 사이, 고뇌를 넘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침체되어 있었다. 자금이 부족하여 임시정부 사무실 월세도 내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만보산 사건으로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때였다. 독립군과 임정의 활로가 어려움을 갖고 있던 때에 김구 선생은 한인애국단을 조직했고, 항일의거를 계획하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해서 김구 선생과 이봉창은 뜨겁게 뜻을 모은다. 김구 선생은 1여 년 동안 준비해 오던 일을 그와 상의했고, 이봉창은 자신이 찾던 일을 맡겨주어 감사해했다. 1개는 일왕에게 던지도록, 1개는 자살용으로 수류탄 2개를 구해주었다. 군자금 300원과 함께. 80원의 봉급을 받고 악기점 점원으로 있던 이봉창에겐 큰돈이었다. “이 돈을 갖고 도망을 가면 어쩌려고 제게 이렇게 큰돈을 주십니까?”라고 물었고, “나는 자네를 믿네”라고 김구 선생은 대답했다. 


이봉창은 1931년 12월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한인애국단에 입단을 했다. 한인애국단 1호였다. 두 손에 수류탄을 들고 활짝 웃으며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목에 ‘선언문’을 걸고. 그 순간 김구 선생의 심정은 착잡했나보다. 함께 찍은 기념사진에 그의 표정이 무겁다. 그러나 “반드시 이룰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웃는 얼굴로 찍읍시다”라면서 이봉창은 표창장을 받은 것처럼 웃었다. 민족의 앞날을 위해 이뤄야하는 일이지만, 한 청년을 죽음의 길로 떠나보내면서 김구 선생인들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이봉창은 울먹이는 임정 요인들 앞에서 희극배우처럼 활짝 웃는다. 승전 선수처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고, 그는 잡혔다. 일경이 엉뚱한 사람을 잡아가려 하자, “그 사람이 아니고, 나요 나. 폭탄을 던진 사람은 나란 말입니다.”라고 외쳤고 그는 당당히 잡혔다. 그리고 그는 1932년 9월 16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9차례에 걸친 비공개 재판 후였다. 350여 명의 경찰이 겹겹이 둘러싸인 가운데, 황국신민이 되길 갈망했던 우리의 이봉창은 그렇게 처형되었다.


경시청 앞에서 사진을 찍고 우리들은 무거운 마음으로 전철을 탔다. 경시청 앞에 바로 전철역이 있어서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 함께 동행하던 친구는 갑자기 “숙소로 돌아가서 쉬고 싶다”고 했다. 아침에 호텔을 나설 때, 하늘이 몹시 흐려 있었다. 해서 챙겨왔던 우산을 들어주던 친구는 “팔이 아프다”고 했다. 서울에서 가져왔던 나의 빨간 여행 수첩도 무겁다고 했다. A용지 반 크기의 나의 수첩과 3단 우산. 그 친구를 숙소로 데려다주고 다시 이치가와형무소로 가기로 했다. 


전철을 몇 번을 갈아탔는지 모르겠다. 헤매고 헤매어서 우리는 이치가와형무소에 도착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형무소 터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형무소 건물은 모두 헐렸고, 그곳은 어린이 놀이터가 들어서 있었다. 전철에서 내렸을 때는 비를 머금은 잿빛 하늘이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골목골목을 가로 질러 우리는 간신히 놀이터를 찾을 수 있었다. 어린애들이 몇 명 놀고 있었다. 바람도 불고 있었다. 금방 비가 올 것 같은 동경 하늘 아래, 놀이터 한 구석에 검은 비석 하나가 덩그마니 서 있다. 그 비석을 보는 순간 나는 울었다. 펑펑 울었다. 그냥 소리 없는 눈물만 흘렀으면 좋았으련만, 내 목에서는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아니 마음이 요동을 쳤다. 이곳에 구금되었던 김지섭 의사, 박열 의사, 이봉창 의사 등 우리의 순국열사들의 아픔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가슴을 쥐어뜯었다. 이곳에서 순국했다는 이봉창 의사를 부르며 목이 멨다. 


이 검은 비석 하나 찾아서 전철을 몇 번씩 갈아탔던 내 고생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왜 그러셨어요? 32세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못한 총각이…. 그렇게 오열하며 그를 위해 묵념을 올리고, 나라를 위해 기도를 올리고 그렇게 한참을 거기에 서 있었다. 꽃 한 송이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을 울음을 그친 후에야 알았다. ‘형사자위령탑(刑死者慰靈塔)’ 앞에는 누가 갖다 놓았는지 조화(造花)만 몇 송이 꽂혀 있었다. 언제 불이 꺼진지 알 수 없는 향대(香臺)만 조그맣게 놓여 있었다.  


필자 강소이 
서울 출생.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으며, 월간 <시문학>으로 시, <서울문학>에 수필로 등단했다. 한국시문학문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국제협력위원으로 있다. 문단에 나와 시와 수필, 평론 등을 쓰며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던 필자는 최근 역사 유적지 여행을 정리한『독립운동가 숨을 만나다 1, 2, 3권』을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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