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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 역사기행 [2020/12] 노모자키에서 군함도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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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 길 따라 얼 따라

순국선열 역사기행 


조선의 아픔과 비극이 담긴 지옥섬

그 안에서 우리는 다만 사람이고 싶었다. 


글 | 강미경(시인, 여행작가)

      

  의 모습이 마치 군함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군함도’라는 이름이 붙은 섬. 하시마라고도 부르는 이 섬은 일본 최초로 현대식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선 곳으로, 현대적인 도시 기능을 갖추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15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엔 끔찍하고 안타까운 역사의 비밀이 숨어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 동원, 죽음과도 같은 노역을 시킨 현장으로 그 악명이 높았다. 이들은 지하 천 미터 아래 탄광으로 내려가, 자기 한 몸 제대로 뉘이기도 힘들 정도로 좁고, 45도가 넘는 뜨겁고 캄캄한 곳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해야 했다. 군함도는 세계문화유산이 될 가치란 무엇인지, 인류가 오랫동안 보존하고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하는 역사의 공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보게 된 <군함도>이야기. 그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검색을 통해 군함도에 대해 알아보다가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 소설을 구해 읽었다. 그렇게 군함도 이야기를 알게 된 게 지난 해 가을의 일이었다.  


 몇 번씩 일본 큐슈 섬에 여행을 다녀왔으면서, 나가사키에도 다녀왔으면서 군함도(군칸치마, 하시마섬이라고도 함)를 둘러보지 않고 온 것이 마음에 걸리곤 하던 겨울 어느 날.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누르지 못하고 다시 여행 가방을 꾸려 나가사키를 찾아갔다. 나가사키 역에서 택시로 10분 이동하여 나가사키 항을 찾았으나, 군함도로 가는 배를 탈 수가 없었다. 미리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승선이 허락된다는 응답이다. 몇 년 전부터 군함도 관광객이 늘어나서, 원하는 여행자는 다섯 해운 회사들도 모두 감당을 해내지 못한다고 했다. 오전 9시 30분과 오후 1시 30분에 두 번씩 제한적으로 하시마 섬으로 배가 떠나지만, 파고가 높은 날은 하시마 섬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하고 그 섬에 상륙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붙은 여행이라고 했다. 


죽음과 같은 강제노역의 현장, 군함도를 아시나요?


   ‘군칸치마’, ‘하시마 섬’이라는 명칭을 가진 이 섬은 군함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군함도’라고도 불린다. 이 섬이 2015년 7월 5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그곳을 찾는 일본인들과 외국 관광객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은 세계 어디를 가도 흔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꼭 가보고 싶은 것은 그곳에 숨겨진 조선의 아픔과 비극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가사키에 여행을 갔으니, 가서 묵념이라도 올려드리고 와야 할 것 같은 마음. 그러나 손톱만 하게 여린 감성이 받아들여지지 않는지, 배편이 없다는 것이다. 나가사키 항에서 발길을 돌리며 아쉬움과 야속함이 몰려온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던 배편을 놓친 첫 번째 나가사키 여행은 그렇게 여행길을 접어야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쉬운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다시 나가사키 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리고 미리 하시마 행 배편을 한국에서 예약하려 하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노모자키 수선화 공원 언덕에 올라가면 하시마섬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서 노모자키 여행을 계획하며 다시 후쿠오카 공항에 내리게 되었다.  


 하카타 역에서 카모메 열차를 타고 나가사키 역으로 이동했다. 나가사키 첫 번째 여행에서 익혀둔 나가사키 시가지들이 반갑기만 하다. 나가사키는 노면전차가 발달되어 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첫째 날, 우리 일행은 노면전차를 타고 나가사키 곳곳을 여행했다. 평화공원과 오카마사하루 기념관,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 데지마, 데지마 워프, 차이나타운, 나가사키 야경 등….


 둘째 날, 나가사키 역에서 육교를 건너 노모자키 행 시외버스를 타고 노모자키로 이동했다. 55분 정도 지나니 버스는 조용한 시골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고즈넉한 시골길이다. 오른쪽은 바닷길이었다. 바다. 일본은 섬나라이니 어디를 가든지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쉽게 바다를 볼 수 있다. 바닷가 일본 마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본 특유의 지붕과 집 모습이 이채롭기만 하다. 일본 바닷가 풍경에 한참 동안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데, 군함 모양의 섬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제를 기억하는 자에게만이 내일은 희망이다


    ‘저게 바로 군함도구나!’ 버스 차창 밖으로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낸 군함도. 군함 모양 그대로다. 진회색 빛 아니, 검은 잿빛의 섬. 검푸른 바다 위에 말없이 우뚝 모습을 보인 군칸치마, 하시마섬. 그 섬을 조선인들은 ‘지옥섬’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이 섬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다가 숨진 이들이 122명이라 했다. 강제 징용된 이들이 800여명이라고 했다. 그들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겪어보지 않은 우리 후손들은 알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저 책에서 읽었을 뿐이고, 그저 들어서 알 뿐이다. 그들 중에, 나와 피 한 방울 섞인 가족이나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분노가 치솟는다.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우리들과 같은 피를 나눈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는 생각. 저려오는 가슴을 누르며 차 창밖으로 눈에 들어온 군함도가 밉게만 보인다. 


 일본이 그 섬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는 데 성공을 했다. 이웃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을 우리는 넓은 마음으로 축하해 주어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섬에서 착취당하고 죽어갔던 우리 조상들이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 한국 정부에서도 문화유산 등재를 반대했지만, 결국 국제 사회에서 강국인 일본에게 보기 좋게 밀리고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맞았다는 군칸치마. 일본은 문화유산 등재를 반대하는 한국정부에게 약속했었다. “군함도(하시마섬, 군칸치마)에 조선의 강제 노동자들의 희생도 있었다는 것을 게시판이라도 세워 명시하겠다”고. 그러나 일본은 바로 말을 바꾸었다. “force to labor"는 강제 징용의 의미가 아니고 “force to work(조선인들도 노동하게 되었다)”라고. 이런 사실들을 일본에 가기 전부터 미리 알고 갔지만, 군칸치마를 직접 보고 나니 가슴이 더욱 저며 왔다. 


 버스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을 듣고, 우리는 수선화 공원 정류장에 내렸다. 예약해 둔 료칸(숙소)에서 송영버스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숙소까지는 도보로 7분 거리라고 해서 걷고 싶었으나, 바다 바람이 매섭기만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후 네 시가 넘도록 점심을 먹지 못했기에 속이 쓰려서 송영을 요청했다. 손님이 우리 일행 세 명 뿐인데도 기꺼이 송영해주는 그들. 


 걷기엔 꽤 힘들었을 것 같은 길을 지나, 우리는 료칸에 도착했다.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 후, 나는 료칸 데스크에 가서 ‘군칸치마 자료관’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송영을 나왔던 일본인이 거기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러나 5시 5분 전. 기념관에서는 “5시에 폐관을 한다” 면서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쌀쌀하고 냉정한 태도를 보인다. 열리지 않는 유리문 앞에서 또 다시 돌아서며 할 수 없이 료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가 보니, 한국에서 예약할 때 우리들의 국적이 ‘한국’이어서 였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방에서는 군함도가 멀리 측면으로 불편한 모습으로 보였다. 어느 객실에서나 ‘군함도’가 보인다고 해서 예약했던 료칸이었다. ‘여기서도 한국인이 차별을 받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데스크로 가서 조용히 요청을 했다. 


군함도 본질을 망각하고 있는 일인들의 얄팍한 상술


   “군함도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과 “군함도를 보기 위해서 일부러 노모자키까지 왔으며, 전객실에서 군함도를 볼 수 있다고 해서 이 료칸을 선택했으니, 군함도가 잘 보이는 방으로 바꿔 달라”고. 간곡한 내 눈빛이 통했는지,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라고 하면서, 방을 세 개나 보여주었다. 305호. 그들의 친절에 흡족해 하며 캐리어를 옮기면서 나는 엉뚱한 풍경을 하나 목격했다. 바로 옆방 306호로 3명의 일본인을 안내하는 료칸 지배인이 한 말이 쓴 웃음을 짓게 했다.  “이 방은 이 료칸에서 가장 군함도가 잘 보이는 방입니다. 우리 일본인들에게만 내드리는 방이지요. 군함도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자부심 아닌가요!” 


 그 말에 일본인들은 “아리가또, 아리가또 고자이마쓰.(고맙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라고 응대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여기서도 한국인이 밀렸구나. 똑같은 요금을 내는 손님에게도 그들은 한국인을 차별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씁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 료칸은 바닷가에 지어져서 노모자키 바다와 군함도가 정면으로 보인다. 료칸 정원을 산책하며 군함도를 바라보며 아픈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다 바람이 매서웠다. 멀지만 손에 닿을 듯한 군함도의 모습이 가슴을 후벼 파고 들었다. 


 그곳에 강제 동원되어 하루 15시간씩 강제 노역에 시달렸을 조선의 남정네들. 미쓰비씨 가문이 그 섬을 사들인 것은 1890년이었다. 군함도에 좋은 품질의 석탄 때문이었다. 이 석탄으로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해면 아래 1,000m 부근까지 내려간 탄광이었으니 습도 95%, 온도가 30도는 넘었었고, 가스 돌출 사고가 작은 속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을 식민지인들. 지배는 언제나 혹독하고 무서운 것일 거라는 생각이 노모자키 바다의 거센 파도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비좁고 경사진 갱도에 들여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체구가 작은 청년들을 징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바다 바람이 거칠게 볼을 때려오기에 우리들은 실내로 들어왔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면 식사를 할 수 없다는 안내가 있었기에 우리들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늦은 점심으로 샌드위치로 간단히 쓰린 속을 달랬던 우리들이다. 그 료칸의 식당은 1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전체가 유리로 되어있었다. 투명한 유리를 통해서 군함도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라고 그렇게 건축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행자들을 위한 배려(?)를 생각하면서, 군함도를 철저히 상업에 활용하고 있는 료칸 측의 두뇌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안내된 테이블 좌석에 앉으며 나는 또 한 번 마음이 상했다. 군함도가 직접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는 이미 일본인들에게 배정되어 있었고, 우리 일행에게는 두 번째 줄에 자리를 주었다. 


 “창가 자리로 달라”고 요청하자, “이미 오래전에 저들이 먼저 예약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는 답변이었다. 료칸에서 내준 유테카(일본식 복장)를 입은 일본인들에게 창가 자리를 빼앗긴(?) 채 우리는 식사를 해야 했다. 나는 코스 요리로 예약해 두었던 것을 취소하고, 단품 요리와 사케를 주문했다.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들이 하루에 두 번 주먹밥으로 식사를 했었고, 주먹밥 한 덩어리에는 잡곡 보다 콩깻묵이 80% 섞인 식사를 했었다는 기록을 읽었던 기억. 그들이 고통을 겪었던 하시마 섬을 바라보면서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는 게 미안한 마음. 그곳에서는 음식보다 아픔을 먹어야 할 것 같은 심정. 따뜻한 사케로 아프고 언 마음을 달래면서 군함도의 비극을 바라보기만 하던 노모자키의 노을 짙던 저녁 하늘.


 그러나 우리 일행이 꽤 오랫동안 저녁 식사를 하며, 음식점 유리창으로 보이는 군함도를 보고 객실로 돌아올 때까지 창가 자리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미리 예약해 둔 손님은 오지 않고 내내 창가 자리는 테이블마다 비어 있었다. 우리 일행에게 내주어도 좋았을 자리마다 씁쓸함과 로칸 측의 거짓말만 앉아 있었다. 저녁 내내.


세계적 문화재가 되기엔 끔찍하고 안타까운 비밀의 역사 


료칸 로비를 지나다 보니, 로비 가득 군함도에 대한 사진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복도에도 군함도 사진 천지다. “우리의 자랑, 군함도” 라고 쓰여 있다. 일본은 군함도를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도쿄보다 인구밀도가 9배나 높을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살았다고. 콘크리트 고층 아파트며 수영장, 병원, 영화관, 술집, 이발소 등 사진이 즐비하다. 신흥도시의 모습의 평화롭고 부흥된 모습의 사진들…. 그러나 “채탄 41톤 달성 축하”라는 글귀는 큼직하게 쓰여 있으나, 그 섬 구석 합숙소에서 짐승처럼 학대받고 착취되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기록이나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전시된 사진들을 일일이 사진기에 담자, 료칸 지배인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주시한다. 


 ‘저 여인은 한국인인데 왜 자료들을 저렇게 열심히 사진기에 담고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본 대로 느낀 대로 기록하고 글로 쓸거거든요’ 라고 단호한 눈빛을 보내며,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다. 나가사키 항에서 배를 타고 군함도에 들어가 본 것보다 여기서 더 많은 것을 나는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군함도. 군함도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숨겨진 조선과 중국인 노동자들. 그들은 분명 착취를 당했다. 주겠다고 약속했던 임금은 미쓰비씨 회사나 미쓰비씨 은행에 강제 적금의 명목으로 갈취당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한 달에 50엔이었다. 50엔은 지금 한국 돈으로 500원 남짓 된다.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 힘들다고 붙여진 이름 ‘지옥도’ 군칸치마. 일본의 근대화와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뒷면에 착취당했던 조선인들은 2017년 5월 현재 대부분 작고했다. 일본에 물질적인 보상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다. 


    그 당시 지옥보다 더 무서운 노동에서 탈출하려고 섬을 빠져나갔다가 총살을 당했던 이들도 많았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나가사키 시내 원폭의 잔해를 청소하는 일에 동원되었다가 방사능에 노출되어 원자병을 얻은 이들도 허다하다. 이것이 군함도 화려한 ‘세계문화 유산 등재’ 의 영광에 감춰진 식민지 백성의 검은 역사다.


골프여행지로 유명한 노모자키. 매월 1월이면 수선화가 만발하는 노모자키의 수선화 공원-수선화축제. 그리고 노모자키 어느 해변에서나 내다보이는 군함도의 눈물. 일본의 영광 뒤에서 숨죽이고 있는 피해국들의 아픔. 나라를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울타리 없던 백성들의 한이 서린 하시마섬. 노모자키에 다녀온 지 두 달 반이 지나서야 이 글을 쓰면서, 무거운 숙제를 하나 해결하는 기분이다. 이미 몇 년 전에 한수산 작가가 <군함도>라는 소설을 써서 세상에 군함도의 아픔을 알렸다. 서경덕 교수와 ‘무한도전’ 프로에서도 그 일을 했다. 


 일본 여행에서 맛있는 일본 음식을 즐기고, 아기자기한 일본 상품들을 구입하고 일본의 풍경을 담아오고, 골프 여행을 하면서도 단 1분만이라도 생각해야할 것 같다. 일제 강점기 때, 큐슈 섬 나가사키현에서 서남쪽으로 뱃길 40여분 떨어진 군함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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