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2020/12] 한국 건축의 정수, 조선의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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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 길 따라 얼 따라
자랑스러운 우리 것들
배산임수에 터 잡고 자연과의 조화에 역점
한민족의 당당한 기개와 우아한 기품 담겨있어
글 | 편집부 사진 제공 | 한국관광공사
조선 왕조에서 서울은 수도(首都)이자 국왕이 사는 왕도(王都)였다. 그러한 서울을 서울로 만들어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궁궐이었다. 궁궐은 유지보수나 화재, 전염병, 전란 혹은 내란, 또는 왕의 개인적인 욕구나 정치적인 필요에 의해 두 개의 궁궐을 유지하며 활용했다. 그중 으뜸이 되는 공식 궁궐을 법궁(法宮)이라 하고, 다른 하나를 이궁(離宮)이라 했다. 조선 왕조 최초의 궁궐인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이었으며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이 이궁 역할을 하여 ‘조선의 5대 궁궐’로 불렸다. 조선의 궁궐 건축은 기본적인 구성 원리를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였다. 중앙부에 국왕과 왕비의 공간을 두고, 그 앞으로 국왕과 신료들이 만나는 공간을, 뒤로는 생활기거공간을 두었다. 하지만 세부적인 모습에서는 중국과 매우 다르다. 중국의 궁궐들은 일반적으로 평지에 반듯한 사각형의 건물을 세운다. 정형적이며 권위적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궁궐들은 배산임수(背山臨水)에 자리를 잡는다. 인공물인 건물을 짓고 궁궐을 꾸미는 데 자연과의 조화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한국 궁궐의 차별성을 찾을 수 있다. 서양의 궁궐은 닫혀 있다. 두꺼운 벽과 문으로 튼튼히 보호되고 있으며, 내부 역시 방과 방으로 견고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하나의 큰 건물 안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기거하며 활동한다. 반면 조선의 궁궐은 주위 공간과 자연뿐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궁궐은 국왕과 왕실의 거처이면서 동시에 관원들의 업무공간이었다. 궁궐에는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며 공무를 처리하는 관서를 비롯해서 수많은 관서가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국왕과 연결되어 정치 행정의 최고 과정을 수행했다. 궁궐이 최고의 관부(官府) 역할도 한 셈이다. 그런 까닭에 국왕은 공적인 언행을 모두 드러내게 되어 있었다. 사관(史官)이 이를 일일이 기록해 후세에 전했으며, 언관(言官)들은 국왕의 언행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국왕은 늘 유교적인 가치를 구현하도록 요구받았다. 조경을 봐도 차이가 확연하다. 중국의 조경은 궁궐 뒤편이나 옆에 아예 산과 바다를 인공으로 만들어놓는다. 일본은 작고 오밀조밀하게 인공으로 꾸며서 자연을 흉내 낸다. 이에 비해서 한국의 조경은 인공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고 자연을 인공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연에 기대면서 자연을 다치지 않고, 자연에 안기면서 자연에 짓눌리지 않는 한국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 최초이자 으뜸 궁궐, 경복궁 그 뒤 경복궁은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는데, 고종 때인 1867년 흥선대원군이 조선 왕실의 위엄을 높이고자 다시 지었다. 그 덕에 경복궁은 조선의 으뜸 궁궐의 면모를 되찾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일제가 경복궁 건물 대부분을 훼손해 근정전 등 극히 일부 건물만 보존되어 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최고 행정 관청인 조선총독부를 경복궁 안에 지어 궁궐 자체를 가려 버렸다. 경복궁은 1990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복원사업을 시작했고, 2025년 완료를 목표로 복원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광복 65주년인 2010년 제자리를 찾았다.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창덕궁 창덕궁 역시 일제 강점기에 많이 훼손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궁궐의 건축물들이 자연과 잘 어우러져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특히 산과 언덕에 둘러싸인 후원은 조선시대 궁궐 후원 가운데 가장 넓고 경치가 아름답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궁궐의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태종 때 처음 지어진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고, 지금 남아있는 돈화문은 광해군 때인 1608년에 다시 지어졌다. 창덕궁의 인정전은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왕실 가족 생활공간으로 사연 많은 창경궁 창경궁은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 때 지어진 궁궐로 경복궁 동쪽에 지어져 창덕궁과 함께 동궐로 불렸다. 성종이 왕실의 웃어른인 대비들이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창덕궁 가까이에 지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자경전을 짓기도 했다.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지은 궁궐이기에 창경궁에는 왕실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 이야기가 풍부하게 전해지고 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다 사약을 받은 곳이 취선당이고,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였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불행한 죽음을 맞았던 곳은 선인문 안뜰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은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는 창경궁에 일본식 건물과 정자를 짓고 곳곳에 일본을 상징하는 벚나무를 심었다. 뿐만 아니라 궁궐의 위엄을 떨어뜨리고 조선의 맥을 끊기 위해 창경궁 전체를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었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원지로 이용되다가 복원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창경궁이라는 이름도 되찾았다. 일제에 의해 궁궐의 면모를 잃어버린 경희궁 조선의 멸망을 지켜본 역사의 현장, 덕수궁 본래 이름이 경운궁인 덕수궁은 궁궐 안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정관헌과 근대식 석조건물 석조전이 들어서 있어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것이 특징이다.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갔다 돌아온 선조가 궁궐이 모두 불에 타 머물 곳이 없자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907년 순종 즉위 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덕수궁은 구한말 어지러웠던 시기에 조선의 멸망을 지켜본 궁궐이다. 고종은 명성왕후가 시해된 뒤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 되었다. 그러나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인 을사조약이 덕수궁의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