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업열전 [2020/12] 항일운동 거점으로 활약한 사찰 - 범어사·해인사·법정사·진관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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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Inside | 길 따라, 얼 따라
민족사찰 열전
일제에 맞서 들불처럼 일어난 호국불교 정신
‘자비사상’은 나라와 민족 지키는 것
글 | 편집부
과거 수많은 외세의 침략 속에서 불교계는 항상 나라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덕분에 ‘호국불교’라는 명칭을 얻었다. ‘자비사상’에 뿌리 내린 불교의 애국애민 정신은 일제강점기에도 들불처럼 번졌다. 스님들은 비밀결사조직을 결성하고 지하신문을 만들며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사찰은 지역주민들을 결집해 만세운동을 벌이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는 등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만해·용성 스님 민족대표 참여
청년승려들 지방에서 만세운동
만해·용성 스님은 민족대표로 참여했으며, 만해 스님은 공약삼장(公約三章)을 직접 썼다. 불교계는 당일 탑골공원에서 열린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청년승려들은 각자 연고가 있는 지방으로 달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동국대 전신인 중앙학림 학생과 청년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범어사, 해인사, 통도사, 동화사, 김용사, 마곡사, 쌍계사, 화엄사, 선암사, 송광사 등에서 해당 사찰 스님, 지역주민들과 연대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남양주 봉선사와 부산 범어사 청련암은 3·1운동 만세시위를 모의한 장소이고, 대구 동화사 포교당 터와 합천 해인사 일주문은 만세운동을 결행한 곳이다. 3·1운동 후에도 전국의 많은 사찰들이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지사들의 공간으로 활용됐다. 1937년 춘천농업학교 학생운동이 진행된 곳이 춘천 청평사이고, 철원 애국단이 결성된 장소가 철원 도피안사다. 독립대동단은 월정사에서 활동했으며, 대구 안일사에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가 만들어졌다. 불교계 인사들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해외로 외연을 확장하기도 했다. 1919년 11월 15일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승려연합회 명의로 ‘승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에는 범어사와 통도사 등 주요 사찰의 중진급 스님들이 서명해 독립에 대한 의지를 드높였다.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 밀항을 시도한 불교계 인사도 여럿 있다. 신상완, 백성욱, 깁법린, 김대용 등은 1919년 4월 중국으로 건너갔다. 보름 정도 뒤에는 김법린과 김대용이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으로 활약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들은 조선의 지인들과 ‘혁신공보(革新公報)’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만주 안동현에 쌀가게로 위장한 ‘동광상점(東光商店)’을 내어 임시정부와 연결 통로로 활용했다. 김법린은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불교계는 무력투쟁도 시도했다. ‘의용승군(義勇僧軍)’ 조직을 계획하는 한편 청년승려 박달준, 김봉률, 박영희 등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에 자원 입학했다. 1920년 1월 조직된 의용승군은 일제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제주 법정사 3·1운동보다 먼저 일어난 무장 독립운동 1918년 10월 제주 법정사에서는 주지인 김연일 스님을 비롯해 강창규·방동화 스님 등이 중심이 되어 7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위한 무장 항일운동을 펼쳤다. 스님들은 1914년부터 국권회복의 필요성을 신도들에게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있었으며, 거사 6개월 전부터 조직을 구성해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1918년 9월 14일 이후 보름 동안은 마을에 배포할 격문과 곤봉, 깃발을 제작하고 화승총도 준비했다. 10월 5일과 6일은 법정사에서 정기적으로 예불하는 날이어서 이날 모인 사람들과 법정사 스님들은 7일 새벽 출정식을 갖고 거사를 단행했다. 서귀포시 중문 경찰관 주재소에 불을 놓아 전부 불태우고 전선과 전주를 잘라 통신을 끊었으며,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길을 지나가는 일본인을 집단 구타했다. 그로 인해 66명이 검거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참여자 46명에게는 최고 징역 10년형에서 벌금 30원형까지 구형됐다. 이는 3·1운동 형량보다 많은 것인데, 일제가 법정사 항일운동의 파급과 확산을 우려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 진실이 밝혀져 김연일 스님 등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28명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진관사 일장기에 덧칠해 만든 태극기와 초월 스님 칠성각에서 발견된 역사적인 자료들은 대형 태극기에 정성스럽게 싸여 있었다. ‘진관사 태극기’라 불리는 이 태극기는 일장기에 청색을 덧칠해서 만든 것으로, 일제의 탄압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학계와 불교계가 후속 조사를 벌인 결과, 태극기는 일제강점기 진관사에서 수행하며 임시정부와 연락망을 만들고 만해·용성 스님 같은 불교계 항일인사 등의 활동을 지원했던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이 3·1운동 당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일제에 잡혀갈 때까지 초월 스님은 사리를 보관하듯 태극기에 항일의 상징과도 같은 인쇄물들을 싸서 꽁꽁 숨겨놨던 것이다. 진관사가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이었고, 초월 스님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아울러 전국 사찰을 돌며 배움의 과정에 있는 학인(學人) 스님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번갯불 번쩍할 때 바늘귀를 꿰어야 한다”는 말로 독립운동에 나설 때 좌고우면하지 말고 즉시 가담하라고 일깨웠다. 중앙학림 내 한국민단본부를 설치, 상해 임시정부 및 독립군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초월 스님은 1919년 단군 건국일 기념 및 1920년 3·1운동 1주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 체포됐다. 1938년에는 전쟁터로 끌려가는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만주행 군용열차에 ‘조선독립만세’ 등의 격문쓰기를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일심회 회원 등 80여 명과 일제에 의해 구금됐다. 1943년 출옥 후에도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다가 또다시 체포됐으며, 이듬해 1944년 6월 29일 끝내 대한독립을 보지 못하고 청주교도소에서 입적했다. ‘진관사 태극기’ 덕분에 초월 스님의 항일운동이 뒤늦게 재조명됐고, 순국 70년 만인 2014년에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 참고자료: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