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 역사기행 [2021/01] 헤이그 특사 이위종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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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헤이그 특사
역사의 토네이도 속으로 사라지다
글 | 강소이(시인, 여행작가)
이별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가 보다. 이위종 선생은 이준 열사와 헤이그에서 이별했다. 이준 열사의 사망으로 그들은 말 한마디 섞을 수 없게 되었다. 치욕스러운 현실에 분개하여 우주의 다른 편으로 가버린 이준 열사의 순국 이후, 이위종 선생은 옷자락 하나 찾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사라졌다. 그의 최후를 실종. 행방불명이라고 역사는 마무리하고 있다. 이위종 선생을 연구하는 이들이 이준 열사의 순국 이후 사라진 그의 흔적을 찾아 무던히 애를 썼으나, 찾을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준 열사의 순국에 대한 여파가 너무 커, 살아남은 이상설 선생과 이위종 선생은 상대적으로 이준 열사에게 가려진 별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런데 몇 년 전 하바롭스크에 있는 러시아 외무성 문서보관소 창고, 한 낡은 서류철에서 이력서가 한 통 발견되었다. 이력서 첫 페이지에 “공산당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의 이력서”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이 최근에 발견된 이위종 선생에 대한 단서인 것 같다.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라는 이름은 이위종 선생이 그리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세례명이었다. 아버지 이범진을 따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생활했지만, 어린 이위종 선생에게 박혀있는 세계관은 유학이었을 텐데, 이위종 선생은 그리스정교로 개종을 한다(1905년 11월 11일). 그 종교에 심취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사로잡은 여인, 사랑스러운 엘리자베타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베타는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영애였기에, 그녀와 결혼하려면 그녀 나라의 결혼법에 따라 개종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서 얻어진 이름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 그 이름은 이위종 선생을 러시아인이 되게 한 이름이기도 하다. 부친 이범진 열사, 국권 침탈의 치욕에 자결 순국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주재 공사관들은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범진 선생은 철수하지 않고 홀로 남아서 활동을 이어간 외교관이었다. 1905년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을 때부터 이범진은 설 곳이 없었다. 공사관을 철수하고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있었지만, 이범진 선생은 귀국이 두려웠다. 일본이 득세하고 있는 대한제국으로 돌아가 봐야 자신의 안전은 독 안에 든 생쥐가 될 것이었음이다. 공사관 문을 닫고 이후 1년간은 본국을 방문하려는 러시아인들에게 입국 비자를 발급해주면서 수수료로 연명을 했다. 1905년 이후 일본이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여 이마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체르노레첸스카야 거리에 허름한 별장에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망명 외교관 신분이 되었다. 러시아 외무부의 배려로 매달 100루블 연금으로 어렵게 살았다. 한동안 이범진 선생은 공사관 보증금, 옷가지와 가재도구 등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내다 팔면서 러시아에서의 삶, 아니 이승에서의 삶을 정리했다. 결국, 이범진 선생은 1911년 1월 26일에 목을 맨 후 권총 자살을 한다. 국권 침탈에 대한 강한 항거의 표시였다. 일본에 합병된 조국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자결을 선택하겠다는 도전이었다. 이것은 일본에게 큰 불쾌감과 모욕이 되었다. 국권 침탈을 인정할 수 없다는 단호한 항거의 표시였으니 말이다.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 외에 더 강하게 항거할 수 있는 무기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이위종 선생은 부친 이범진 선생과도 사별했다. 가족이자 동지 잃은 고통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해 이위종 선생 또한 부친 이범진의 자결로 인해 공황이 왔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다른 부자(父子)들처럼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었다. 이범진 선생의 서툰 외국어를 이위종 선생이 커버해주며, 대한제국의 공사관의 참사관으로서 외교관 일을 함께하던 콤비였다. 이위종 선생은 이범진 선생의 손과 발, 혀의 역할을 하여 러시아와 각국 주재 외교관들과의 관련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대한제국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외교로써 구국운동을 했다. 두 부자는 한 곳을 함께 바라보는 가족이자 동지였는데 그런 부친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위종 선생은 이제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의논할 곳도 없이 광활한 러시아 땅에 혼자 남겨졌다. 아버지 이범진 선생 덕분에 화려한 귀족으로 살던 생활도 이제 막을 내렸다. 혼자 남겨진 이의 절망과 고독을 엘리자베타는 위로하지도 감싸주지도 못했다. 조선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는, 그저 외국 여자였다. 가정을 위해 닭을 키워 내다 파는 양계장 일도, 역무원 일도 해보았지만, 이위종 선생이 감당할 일들이 아니었다. 결국, 아내 엘리자베타는 이혼 청원서를 내고 딸 셋을 데리고 이위종 선생을 떠나갔다. 이위종 선생이 러시아 귀족으로서 받는 연금 50루블도 양육비로 쓰겠다고 그것마저 엘리자베타는 이위종 선생에게서 채어갔다. 이 부분을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 (이승우, 김영사)에서 읽으면서 나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준 열사의 아내 이일정 여사가 떠오른다. 이일정 여사는 종로구 누상동 집을 팔아서 종로구 안국동에 부인상점을 낸다. 머리빗, 실, 바늘, 등 세간살이를 팔아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이준 열사를 돕는다. 이준 열사는 이일정이 안살림을 잘 챙겼기에 마음 놓고 대일구국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선독립협회’, ‘개화당’, ‘대한보안회’, ‘대한협동회’, ‘적십자회’, ‘공진회’, ‘만국청년회’, ‘국민교육회’, ‘법안연구회’, ‘헌정연구회’, ‘국채보상연합회’ 등을 결성하여 구국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를 해준 이가 이일정 여사다. 그런 이일정을 이준은 동지로 여겼다. 『대륙의 영웅 최재형』이라는 책에서 읽은 바에 의하면, 최재형도 상당한 연하의 아내 엘리나(조선인, 러시아 망명)와 구국 운동의 방향과 방도를 늘 의논하는 동지였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엘리자베타는 러시아 여인이었으니, 이위종 선생의 고뇌를 이해할 역량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위종 선생이 화려한 귀족이었을 때만 그를 사랑한 러시아 여인 엘리자베타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 귀족 신분으로 인해, 소비에트 정부에 의해 혹독한 차별을 당하며 어려운 생활을 했다. 후에 러시아인 남편 로파힌과 결혼하여 1남1녀를 두었으나, 1943년 독소전쟁 때 레닌그라드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사망한 지 수개월 만에 백골이 되어 발견되었다. 900일 동안 독일군에게 봉쇄되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이위종 선생 곁에서 돌봐주고 뜻을 함께할 수 없었던 여인, 엘리자베타. 화려한 귀족 여인은 화려할 때만 이위종 선생의 아내였다. 그런 아내를 위해 이위종 선생은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정교회로 개종까지 했었다. 그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1907년 7월에는 헤이그 특사 동지 이상설과 이준을 헤이그에 남겨둔 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던 이위종 선생이었다. 마음을 다 주었어도 떠나간 여인 엘리자베타. 이위종 선생과 세계관이 달랐을 것이고, 그녀는 그의 조국 현실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을 것이며, 이위종 선생과 함께 고민하며 함께 방도를 찾는 동지와 동반자가 되길 기대하는 건 우매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11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 정부는 이위종 선생의 혈족을 찾아내었다. 3대까지 연금을 지급한다는 국가보훈처의 서훈 정책에 따른 것이었나 보다.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된 이위종 선생의 후손은 대한민국 국적과 함께 연금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한국인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진 속에 후손들을 보면서 이위종 선생이 사랑했던 여인의 유전자를 생각했다. 조국 위해 할 수 있는 일… 거듭 생각하고 실천하다 이위종 선생이 부친 별세 후에 조국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도를 세운다. 조국 독립의 유일한 희망은 러시아 황실을 움직이는 일이라고 결단하게 된다. 이위종 선생에게 남은 것은 이제 조국밖에 없었기에, 제정러시아의 장교가 되기로 하고 블라디미르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프랑스에서 생시르 사관학교를 이미 다녔던 터라 100일간 단기 장교 교육 후, 제정러시아 장교로 임관된다(1916년 5월 1일). 황실 근위대 장교가 되어, 니콜라이 2세를 가까이에서 알현하려 했으나 그는 뜻밖에도 유럽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독일군과 싸워야 했다. 운명의 신은 이위종 선생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내몰았다. 이는 일본이 러시아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위종 선생의 추방을 끊임없이 요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어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을 일본이 망각할 리 없었다. 또한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로 인해, 이위종 선생은 러시아 당국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헤이그 특사에서 돌아온 1908년 3월에 이위종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장인인 놀켄 남작과 동행했다. 아버지 이범진이 구국운동 자금 1만 루블과 함께 그곳으로 보낸 것이다. 최재형의 집에서 이범윤, 안중근, 엄인섭을 만나게 된다. 그때 이위종 선생이 벨기에제 브라우닝 8발 권총 한 자루를 안중근에게 전해주었다는 말이 있다. 후에 하얼빈 의거 때 이토 히로부미를 살상하게 했던 총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위종 선생과 안중근의 끈끈한 연관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중근에게 총을 구해준 이는 최재형이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으니 어떤 말이 맞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총은 안중근이 직접 구한 게 아니었고, 이위종 선생이든 최재형이든 동지가 구해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면서도 최재형이나 이위종 선생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고, 그들은 무사했다는 게 중요한 일일 것이다. 다시 이위종 선생의 동부전선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독일군에 체포된 이위종 선생은 6개월 동안 발트해에 멀지 않은 서드비나강 근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집단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러시아 정규군에 복귀되어 동부전선 최전방 참호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에서 일어난 식량 폭동으로 경찰과 군대가 폭도와 뜻을 같이하면서 혁명으로 탈바꿈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볼셰비키 붉은 군대의 장교가 되어 총부리를 정부군에 돌리게 되었다. 다 아는 것처럼, 차르가 양성한 제정러시아 장교들은 민중에게서 멀어진 차르 황실에 미련을 버리고 혁명군에 가담한다. 이위종 선생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으리라. 1905년 1월,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10만 명의 노동자들을 총칼로 진압했던 피의 일요일, 1917년 2월 혁명과 7월 혁명을 목격했던 기억의 경험 인자들이 이위종의 총부리를 돌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평화로운 시위대 10만 명 시민에게 정부군이 총을 쏘았고, 하얀 눈밭에 시민의 피가 흥건하게 물들었던 피의 일요일. 어쩌면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초청장을 보냈던 니콜라이 2세가 회의 개최 때에는 대한제국을 외면했던 일이나, 자신을 떠나버린 아내의 나라 러시아에 대한 반발인지…. 이위종 선생의 그 당시 심정을 생각해 본다. 사회진화론에 따라 열강들이 제국주의 침략으로 약소국을 식민지로 삼는 것을 목격하고 통탄해왔던 그였다. 이위종 선생이 생각하는 사회 진화 다음 단계는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만이 조선 독립의 첩경이 될 것을 믿었던 것 같다. 1918년 4월, 일본은 7만 5천 명 대병력을 시베리아에 진주시킨다. 러시아 내전 간섭군이다. 일본 간섭군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의 일환으로 이위종 선생은 볼셰비키 혁명군(적군)의 사령관이 되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사관학교를 두 군데나 졸업했고 동부전선에서 다져진 실력으로 이위종 선생이 지휘하던 부대는 연전연승을 거두었다는 것도…. 그 당시 러시아에 거주하는 대부분 고려인은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주창했다. 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윤치호가 실력양성론을, 무력 투쟁을 주장했던 고려인 중심의 연해주 세력이 독립전쟁론을 주장했었다. 독립운동의 세 가지 방략 중에서 이위종 선생은 무력 투쟁을 선택한다. 그가 프랑스 생시르 무관학교와 제정러시아 블라디미르 사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우고 장교 훈련을 받았으니 그의 선택은 당연하였을지도 모른다. 이경하가 경찰과 군사와 치안을 담당하는 병조판서, 한성부판윤, 포도대장, 훈련대장 등을 맡았던 무관이었다는 것을 앞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무관이었던 조부의 핏줄을 받아서인지 이위종 선생은 군인 장교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한 것 같다. 제국주의 침략 아래 목적은 모두 하나였다 한편, 신한촌을 중심으로 이상설,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이동휘가 모여 대일 구국운동을 펼치곤 했었다. 이들이 이곳에 학교, 교회, 신문사 등을 두고 항일투쟁의 본거지로 삼게 되자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시예트를 공격하고 신한촌을 불태우는 일이 있었다. 2천 5백여 명의 고려인이 살상되었다. 1920년 4월의 일이었고 이 4월 참변에서 최재형도 일본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일로 신한촌은 괴멸되었다. 이후에 고려인들이 일본군에게 갖게 된 적개심은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연해주 지역, 우랄 이서(以西) 지역 고려인들은 붉은 군대를 지원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연해주 지방의 대일운동은 무력 투쟁에 의한 것이 대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엄밀히 말하면, 이위종 선생은 사회주의 공산당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 초기 독립 운동사가(獨立 運動史家)들에게 저평가되기도 했다. 이 부분은 매우 미묘하기도 하고 심각한 이념의 문제라서 글에서 다루기도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 보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이념이 대두되기 전에 우리 민족의 적은 오직 하나 일본이었다.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침략에서 우리 민족을 지켜내야 하는 당위성 앞에 그들은 오직 한 가지 생각이었을 것 같다. 헤이그 특사 3명 중 조명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어 있던 이위종 선생을 생각해 본다. 그가 볼셰비키 혁명당 사령관으로 적군(赤軍) 쪽으로 기울었다는 이유로 그가 주목받지 못했다고 해도, 그의 의도는 일본 간섭군과의 항쟁을 위한 것이었다는 동기를 본다면 항일 독립운동사에서는 이위종 선생의 공로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해서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고, 그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국적과 연금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은 독립 이후의 문제였다.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고 나서의 문제였다. 매우 다루기 힘든 문제를, 나는 조심스럽게 쓰고 있다. 언제 어디로 연기처럼 사라졌는지 그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이위종 선생에 대한 글을 어렵게 쓰고 있다. 그에 대한 유적지가 전혀 없어서 유적지를 둘러보지도 못했다. 그에 대해서 알 방법은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이승우, 김영사) 책 한 권이 전부였다. 이 책을 읽고 이위종 선생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편안하지만은 않다. 이 글은 다분히 이 책을 읽은 감상과 검색을 통한 공부가 전부였다는 것을 밝혀둔다. 남겨진 게 거의 없는 이위종 선생. 그의 발자취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때 그가 남긴 연설문과 인터뷰 기사가 전부다. 하바롭스크 러시아 외무성 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이력서 한 통이 전부다. 이런 멋진 세상을 이위종 선생은 꿈꾸지 않았을까?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었던 세계화한 왕족 이위종 선생,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런던, 러시아 등을 두루 다녔고 7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언어의 천재.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에 특히 능통했던 구한말 대한제국의 유능한 재원 이위종 선생. 그가 결국, 꿈꾸었던 것은 국권을 회복한 나라에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을까? 궐석재판으로 일본에 의해서 귀환이 금지된, 잃어버린 조국. 그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으리라. 우리는 그의 후손들에게 한국인의 국적을 주었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될 것이다. 만약, 이위종 선생의 영혼이 아직도 시베리아 벌판에서 바람처럼 떠돌고 있다면, 그분에게 말하고 싶다. “특사님의 국적은 Korean입니다”라고. “들리시나요? 이위종 특사님, 당신은 한국인이십니다.”